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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Oct 13. 2020

「민주적인 리더십과 대중 기만」 (1/10) 아도르노

번역 이래로

『Vermischte Schriften I/II』T.W. Adorno

©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ain 1986’


II Gesellschaft, Unterricht, Politik

‘Democratic Leadership and Mass Manipulation’

'민주적인 리더십과 대중 기만*'

(*This article forms part of the authors continuing collaborative work with Max Horkheimer)



‘리더십’과 ‘민주적 행동’의 개념은, 현대 대중사회와 상당히 깊게 연루되어 있어 현재의 상황[대중사회]에서 그 의미를 당연히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리더라는 관념은, 왕들이나 봉건 영주의 관념과는 대조적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부흥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이는 리더가 정치 정당을 대리하여 행동 및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동시에 합리적인 논쟁을 통해 조직의 구성원들(rank and file)을 이끌 자격이 충분한 사람을 선출하는 정당 정치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로버트 미헬스Robert Michels(1876~1936)의 저명한 책인 『정당 사회학』 이 출간된 이래로, 정치학은 루소주의적 고전 정치학이 더 이상 사실들과 상응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근대 정당들, 고도로 집중된 기득권(세력)에 의존하는 정당들, 그리고 이러한 정당들이 제도화되는 상이한 발전과정이 보여준 것은 진정으로 민주적인 기능을 하던 리더십이, 과연 현실에서 이러한 리더십이 한 번이라도 발휘된 적이 있었을까 싶더라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정당과 리더십의 상호작용은 이제 선거를 통해 확인되는 추상적인 다수 의지의 공표[확인] 정도로 점점 더 국한되고, 이러한 기제는 확립된 [공식화된] 리더십의 지배 아래 예속되었습니다. 물론 결정적 순간들에 있어 ‘풀뿌리’ 민주주의가 공인된 여론과는 반대로 놀랄 만한 활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이와 함께, 리더십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못하게 되고, 소수 몇몇이 다수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곳 어디에서나 잠재되어 있는 권위주의적 성향은 거리낌 없이 그 성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짓된 ‘카리스마’를 부여받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이 부풀어버린 외양에 걸맞게 속이 비어버린 리더라는 인물들은 사회 변동으로 인해 리더를 필요로 하는 구조가 만든 절대적인 수혜자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변동은 근본적으로 대중 자체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사람들이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불안해했을 때, 사람들이 민주적 정치 과정의 진정성과 효율성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민주적 자기 결정권(self-determination)의 문제를 그만 놓아 버리고, 그들 중 최소한 힘이 있어 보이는 듯한 사람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그들의 리더를 말입니다. 권위주의적 요소[리더]에 대한 동일화(identification)**와 내부 투사(introjection)의 기제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배에 예속되게 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이는 프로이트에 의해 기술되었던 바, 교회나 군대와 같은 계층[계급]적 조직에 관련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제들은, 특히 [지배-피지배 관계를 본질로 하는 그룹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정치 정당과 같이 권위주의적 요소를 본질로 하는 특정 그룹 내에서도 기능하는 것입니다. 이 위험은, 당분간은 일어날 법하지 않습니다만, 리더십이 영속적으로 구축(entrenchment)해 놓는 것에 대응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이뤄지는 관찰은 다음과 같은 예측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반민주적 작용력과 반민주적 운동을 발생시킨다는 것, 바로 이것이 가장 명백한 징후로써 위험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화 : 동일화는 이상화理想化를 다른 면으로 둔다. 자기 보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인은 자신이 꿈꾸는 스스로에 대한 이상적 자아상을 포기하면서 그곳에 지도자의 이상을 두고자 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 형상은 비어있다. 지도자는 개별화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도자는 '초인'이면서 또한 동시에 '보통 사람'으로서 개인에게 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인은 동일화 과정을 밟는다. 이는 그 괴리를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은 이를테면, 히틀러의 꿈을 꾸고자 한다. 나의 이상이 '될' 히틀러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히틀러의 에고가 나의 에고가 되는 것이 나의 이상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식이다. 따라서 개인은 '지도자가 구체화된 것'으로서, 이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반대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데, '조직과 집단의 이상'이 개인의 자아(에고)를 대체한다. 개인이 지도자에 대해 동일화할수록 그를 이상화하게 되는 것은, 개인에게는 끔찍이 구체적인 것으로서 조직이 발하는 권위가, 사실 그에게 가장 추상적으로 다가와야 할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도된 현상에서 권위와 권위주의적 요소 자체가 개인의 이상으로 딱딱하게 굳어가고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어야 할 에고가 녹아 껍질 안에 갇히게 된다. 바로 이 모습이 잠재된 에고의 리비도(성적性的 에너지)가 최적으로 사용 가능하게 된 형태이다.  아도르노가 『사회학 논문집1』(문병호 옮김, 세창출판사, 2017)「프로이트의 이론과 파시스트 선전 선동 형태」에서 말하기를, 프로이트 자신은 파시즘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국면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음에도 그의 이론이 파시스트 대중 운동의 발흥과 그 본질을 명백하게 내다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개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시키는 끈이 리비도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고(Ibid, 562)" 보는데 여기서 끈은 파시스트 선동가가 구사하는 기술, 즉 대중선동(기만) 기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기술에는 지배 대상으로 하여금 '복종의 틀에 맞춰지는 정도'가 더욱 증대될수록 '지배자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대중의 심리적(무의식적) 메커니즘이 활용되고 있다. "기본적인 리비도적 에너지를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시킴으로써 이 에너지의 표출을 정치적 목적에 어느 정도 적합하도록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은 파시스트 리더십에 들어 있는 기본 교리들 중의 하나이다. 종교적 구제와 같은 객관적 이념이 대중 형성에서 행하는 역할이 작을수록, 대중 조작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정도가 더욱 증대되며, 완전할 정도로 제약받지 않은 사랑이 억압되어야 하는 정도와 복종의 틀에 맞춰지는 정도가 더욱 증대된다.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내용에 너무나 적게 들어 있다(Ibid, 566)." 주목할 지점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대중에게 내면화하기 위해서 사랑(리비도적 에너지)을 표출하는 방법이 조작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사랑을 불가사의하게 만드는 것에, 그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사랑을 오히려 언급하지 않는 것에 있다. 


 민주주의 사상과 리더십의 이념들이 단순한 언명에 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 본질적인 의미의 반대면을 가려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의미를 더 구체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종종 맹목적으로 강력한 제도나 데마고그들의 의도에 따라서 행동하고, 따라서 정확히 민주주의의 근본 개념과 스스로의 합리적 이해 추구에 반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입센 Ibsen(1828~1906)이 『민중의 적 Enemy of the people』에 관한 테제를 구상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사실상 중우정치(ochlocracy)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문제시된 이래로 지금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상식처럼 여겨졌습니다. 어떠한 고려 없이 민주주의 이념을 순전히 형식적인 방식으로 적용하거나, 다수의 의지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위해 민주적 결정의 내용적 부분을 소거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며, 종국적으로 민주주의 제도의 폐지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아마도 역사상 어떤 시대보다도, 민주적 리더십의 기능이란 민주주의의 주체들을 창출해내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의 욕구와 필요를 의식하는 인민, 기득권이 형성한 수를 셀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들[기능하는 체계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못 박아버린 이데올로기[의 기만적인 기능]에 맞서, 의식하는 인민의 창출인 것입니다(it is the function of democratic leadership to make the subjects of democracy, the people, conscious of their own wants and needs as against the ideologies which are hammered into their heads by the innumerable communications of vested interests). 인민들은 민주주의의 원리(tenets)를, 이를 위반할 경우 그들 자신의 권리행사를 지연시킬 것이며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에서 불투명한 정치적 공작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타당하게(logically)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대중문화(산업)가 생각과 사상을 통제하는 주술을 걸어놓은 시대입니다. [따라서 상식선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믿음, 민주적 주체가 결코 정치적 공작의 대상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등] 이까짓 것들이 평범한 상식으로 공준이 되고 있다는 점이 제게는 너무 유토피아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In an era like ours, when the spell of a thought-controlling mass culture has become almost universal, such a postulate, plain common sense though it may be, seems rather utopian).


천진난만한 이상[유토피아적 낙관]은 가정합니다. 어떤 지적이고 관념적인 수단만으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은 단순히 “그들에게 팩트[지배적인 현실]를 알려줘라(give them the facts)” 정도에 절대 만족하지 않을 만큼의 권력이기 때문에, 곧 대중의 의식을-무의식과 마찬가지로-조건 짓고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되며 기민해지고 또한 의심을 품습니다. 나아가 만약 그들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문제가 당면 사안이 된다면, 그들은 온갖 종류의 믿게-만드는-것들에 맞서 심지어 프로파간다의 최고조의 압력에 맞서 [이성적인] 냉철함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의 만연한 이데올로기적 양식에 대항하는 강력한 반대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단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적인 계몽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의 모든 자원을-결과적으로-끌어들여야만 하는 이러한 반대 경향에 의해서 추동될 수 있을 것입니다(Democratic enlightenment has to lean on these countertendencies which, in turn, should draw on all the resources of scientific knowledge available to us).


그러나 우리의 모든 자원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시도가 리더십 자체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도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리더십을 파헤치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현대 대중사회에서는 그 어느곳에서나 (권력이나 금전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으며 그렇게 자원을 전달받은 이가 다른 이유 없이, 오직 그것을 전달받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권력자나 재력가로[스스로를 이 시대의 리더로] 여기는데 거리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는 핵심 이상인 인민의 지적 자율성[사리분별능력]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습니다(They would require a fearless debunking of the kind of leadership, promoted in modern mass society everywhere, which enhances an irrational transference or identification irreconcilable with intellectual autonomy, the very core of the democratic ideal). 이와 동시에 민주주의적 계몽 과정은 민주주의적 리더십마저도 강력하게 제약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민주주의적 리더십[민주주의적 지도부]이 기회를 잡았다고 했을 때, 즉 그들이 목표로 하는 진보적인 방향으로 대중의 정서가 움직인다고 했을 때, 민주적으로 계몽된 상태에서는 민주주의적 리더십에 분명한 한계가 부여됩니다. 이것은, 리더십이[지도부가] 이 기회를 잡기 위해 아무리 상상력을 늘여본다 한들 이 경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한계입니다. 즉, 민주주의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대중의 심리상태[희망, 절망, 기대, 자포자기]를 착취하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 방법을 통해서 대중을 동원하겠다[함께 하겠다]는 리더십은 지양되는 것입니다. 대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식의 해방이지 의식의 노예상태가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민주적인 리더는, 물론 그가 단순히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감싸안는 방식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켜온 사람 그 이상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정신기법적(psychotechnical)’ 계산도 삼가며 비합리적 수단을 통해 대중과 집단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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