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사회의 시민계급 형성과 영웅의 운명
1. 자유주의적 리얼리즘: 의도된 소설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필연적인 모순을 객관적으로 모사하는 것을 그 강령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따르면 소설은 ‘당성’과 ‘총체성’ 그리고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생략)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정관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소비에트 문학과 비평의 본질적인 방법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적 발전 속에서 현실을 진실하고, 역사적-구체적으로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여기서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노동자들을 이념적으로 개조하고 교육하는 과제와 일치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창작에 있어서 창의력 발현과 다양한 형식, 문체, 장르의 선택에 관한 특별한 가능성을 보장한다>." (이병훈,이양숙(2018)「사회주의 리얼리즘과 1930년대 세계관과 창작방법 논쟁」,128)
2. 계몽소설: 통계로 말을 하는 소설
오디세우스는 단순히 신화적인 영웅일 뿐만 아니라 근세 시민사회의 ‘개인’의 전형을 보인다. 신과 정령의 세계에서 온갖 난관을 극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 그에게서 서구 시민사회의 개인을 발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보존을 위해 신과 거래하기도 하고 신을 속이기도 하며 때로는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는 현대인의 원상으로 우뚝 서있다. 스스로 기만하는 자이며 동시에 계몽시키는 자이기도 한 그는 선원들로 하여금 그들의 귀에 밀랍을 채워 봉하게 하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묶게 한다. 그는 신화를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신화적인 공포를 대상으로 이성의 위력을 시험하기에 이른다. 김지영은 한국 시민사회의 개인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의 자연으로 된 강제적 속박의 틀에 묶이지 않는다.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매번 가까스로 빠져나간다. 우연에 기대는 작품, 우연적인 작품이라고 하기에 단계 단계를 밟아나가는 소설의 흐름이, 가까스로 벗어나는 김지영이 우연을 우연으로 취급하는 것을 거부하게 하며 나아가 이것을 어떠한 의도로 치환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제시된 모든 것이 평균과 거리를 가진다. 그 이유는 평균이야 말로 모든 것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균으로 된 삶은 공허하다. 삶은 평균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균질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소설이 제시한 평균은 통계학의 이상으로서의 정규분포에 속하지 않는다. 소설 속 평균은 의도된 평균이며, 균질화된 것에 마주해 특수화된 평균이다. 특수하게 선택된 주인공의 삶은, 이것을 과정이라고 보기에 힘들겠지만, 반복적으로 운행되어야 할 열차가 앉을 선로의 경로가 선택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이해관계의 불투명성 속에서, 강요된 선택이 민주적인 결정으로 둔갑한다. 소설이 제시한 사회의 지배적인 논리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예속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이 논리와 형식이 일치하는 한, 이를 형상화한 소설은 또한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하여 지배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사회가 개별 인간에 대해 그러하듯 소설은 사회에 대해 지배적으로 되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발원했지만 사회에 대하여 사회적인 반테제를 형성하는 것, 몇몇 위대한 소설들만이 그러한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제시한 사회의 지배적 논리가 당장 사회의 형식과 불일치하는 경우에서는 소설은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무엇으로 은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은폐된 무언가가 그것을 은폐하는 무엇으로 여겨지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이해관계의 불투명 속에서, 그럼에도 열차는 목적지에 최단거리로 가려한다. 하지만 최단거리로의 주행이 중단 없는 주행을 말하지 않는다. 매 순간 이것이 최단임을 각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최단에 대한 결정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의도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울서 부산을 가는 KTX 또한 몇 번을 멈추는데 대전 이전과 이후, 대구 이전과 이후에 그 노선으로 설정된 필수적인 정차역들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설은 명확한 목적(지)을 가진 채 탑승자를 그곳으로 실어 나른다. 탑승한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는 안내방송이 말 그대로 탑승자 전원에게 유익한 정보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에 쫓기는 승객, 부산이 아닌 중간역에서 하차해야 하는 승객에게 그것은 아직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믿음에 대한 보증이다. 바로 이렇게 각 장에서 통계와 숫자들이 우리 중 몇몇은 내려야 할 역을 알리고 있다. 다시 속도를 붙이며 나아가는 그 뒤로 지나쳐 가는 것은 풍경이라기보다 목적지와의 상이성이다. 이러한 이동에 익숙한 사람은 달리는 기차에서도 곧잘 자다 깨 안내방송이 나오기 전 풍경을 보고 지금 어디쯤 왔는지 유추하여 알아맞힌다. 명확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채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은 매번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의문을 품을 것이다. 왜 하필 이곳일까 하는 의문을 말이다. 하지만 소설과 비유로 쓰인 기차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기차를 타면 사람은 그대로인 채 장소가 바뀌지만 소설은 소설 그대로 사람이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진다는 것에 있다. 다시 한 번,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그대로인 대상과 달라지는 대상과의 대비되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기차의 물질성과 소설의 비 물질성의 차이이다. 무엇도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고,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애초에 설정된 의도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앞서 생략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일부가 꼭 생략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러한 맥락에 맞닿아있다.
3. 몇몇 판타지적 모티프
소설 속 결혼생활은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즉,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계몽 이전의 인간에게 신화적인 속박은 바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신화적인 공포와 비교하여 현대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된 결혼 이후의 생활은 다원화된 사회의 혼란으로 인해, 응당 알려져야 할 것이 되고 말았다. 결혼 생활은 알려지지 않은 공포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없어야 한다는 계몽의 강박이 부딪히는 공간이다. 현대 한국의 대중문화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관음증 프로그램들은 결혼생활 이후 당면할 미지의 공포에 대하여 그러한 공포를 경감시켜줄 적절한 기제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판타지적인 로맨스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은 판타지적인 육아과정이며, 그 아이가 자라 혼자 살게 되는 면면을 드러내는 과정은 오늘날 멈춰버린 인간의 미성숙 상태를 옮겨놓은 사진과 같다. 그러나 내가 이를 판타지로 부르는 이유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에 겨냥된 것이 아니라, '중간과정 생략’이라는 소설이 제시하는 형식이 판타지스럽기 때문이다.
남편이 사과에 이르는 과정, 자각에 이르는 과정,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과정, 실패하는 과정, 심지어 가사를 나누는 과정, 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 어떠한 과정들의 자리 모두, 그곳은 숫자와 통계가 선점하고 있다. ‘중간과정 생략’이 자주 일어나는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 강해지는 궤적은 기하급수적이다. 그리고 보통 그 자리에 퍼센트와 몇 배수 몇백 배수, 숫자들이 점철되기 마련이다. 또 하나의 모티프는 남편이 건네는 사과이다. 이토록 아름답게 사과하는 남성을 본 적이 없는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과는 사과를 받는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형식을 갖춘 사과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어머니의 경우. '나 때는 말이야' 하고 말하지 않고, '우리 때는 그랬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앞의 말과 대비되는 지점은 혁명 이후에 쓰인 교과서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방식과 유사성을 보인다. ‘어머니’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와 다르게 계몽의 세례를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이미 처음부터 충분히 계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 빙의에 대하여
‘남의 말을 인용하는’ 주인공은 빈껍데기이다. 빙의는 빈껍데기로 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주체성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말을 빌려야 말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담지한 것은 주체성이 아니라 그저 그에게 부과된 기능일 것이다. 그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수를 셀 수 없는 체계들이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체계 자체의 논리에 따라 분화하며 그 수를 더욱 늘려가고 있다. 그에 맞춰 점점 더 복잡해져 만가는 사회는 체계와 체계, 체계와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무수한 갈등들로 뒤덮인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단 하나의 논리가 사회의 모든 개별적인 것들 위로 군림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경제적 논리 앞에 선 모든 사실들과 사실들이 맺는 연관관계가 배를 드러내며 굴종할 태세를 취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상호 모순된 이미지를 굳이 힘겹게 밖에서 찾는 수고는 한국 사회에 의해 덜어진다. 한국사회는 너무나 복잡한 사회인 동시에 참으로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사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소설이 한국사회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로 읽히는 것에 조금의 부연이 필요하다. 정확히 이 소설은 보고서인데, 오직 앞선 모순을 남김없이 받아들인 그 자체로 문제인 보고서로써 사회에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삶이 없다. 삶이 살지 않는, 껍데기로 된 자기 보존의 원리가 스스로 말을 하고 있다.
주인공이 자기 보존에 성공한 껍데기로 남게 된 것은, 하나의 형식이 되는 것을 그 목적으로 둔 소설의 의도와 일치한다. 소설은 평균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피할 수 없이 예정된 운명에 저항하는 것에서 인간의 고통이 비극을 그려내는 것이라면, 그러나 애초에 피할 수 없게 설정된 것으로서의 의도가 지시한 바에 충실한 평균치 인간의 저항이란 그러한 의도에 따라 저항으로 된 적응과 같다. 양자는 구분 불가능해진다. 주인공은 저항하는 듯 언제나 적응한다. 그는 고통받지만, 이러한 고통의 궤적은, 적응의 정도가 강렬해질수록 떠안게 될 고통은 감쇠되는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그 그래프는 자기 주체의 자기 포기를 향해 나아간다. 주체와 주체가 만나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양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그러나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객체화될 때 요구되는 것은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태세를 갖춘 이가 집어 든 도구로 된 합리성이다. 최초의 ‘빙의’의 순간 불려 나온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합리성이다. 도구로 된 합리성은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목적으로 그 자리에 섰다. 소설 속 제시된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곧 합리적으로 다가오는 어떤 이성이 말을 건다. 이를 몸속으로 불러들여 마주한 상대에게 전하고자 했던 바는 주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에 비슷하게 되지 않고, 그를 지켜보는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에 수렴한다.
빙의의 순간이 상기시키는 것은, 처음 거울을 마주해야 했던 실험실 안의 동물, 곧 아연하게 된 동물과 이후의 그의 행위를 좇는 과학자의 눈동자이다. 거울은, 임신한 아내에게 말을 거는 남편에게는 출산 중 사망한 이를 마주하게 하고 명절날 남의 집에 와 노동하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 남편의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마주하게 하고 기다리고 있다. 거울은 거울을 바라보는 대상을 모두 함께 지켜보는 눈동자를 기다린다. 당황하는 표정 깊숙이 우리가 어렵지 않게 발견해내는 것은 그렇게 당황해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마치 이것이 새롭게 발견된 사실인 양 흥분하게 한다. 마치 그들도 그들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흥분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