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
잘 알려진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오늘날 한국에 왜구들이 창궐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을 규정할 수 있는 몇몇 말들 중 ‘조선’은 사회적으로 널리 합의된 용어이다. 따라서 잘 알려진 주장과 사회적으로 합의된 공론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응하는 전쟁상태를 떠올려 봄직하다. 이름하여 임진왜란을 말이다. 한국의 위인들이 곧 잘 이순신과 비교되어 숭배되고 있다는 사실은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굉장한 흡인력을 가지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주장은 간사한 계책의 해체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지금 공격받고 있다고, 우리는 역사적으로 계속해 침탈당하고 있다고, 그 적들은 과거의 적들의 후손이라고, 그리고 그곳에 영웅이 있었다고, 또한 영웅은 홀로 싸우고 있다고, 영웅은 적들과 적과 같은 아군에 의해 그렇게 고립되어 왔다고, 그러나 과거와는 다르게 오늘날의 영웅에게는 우리가 있다고, 우리는 그 간계를 꿰뚫고 있다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영웅을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일련의 주장은 그렇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렇게 해체되는 것은 적들의 간계가 아니라 우리의 복잡한 현실을 겨낭하는 듯하다. 그 이유는, 그로부터 떠오른 희망이 해체된 사실에서부터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뒷받침된 딱딱한 설득에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희망은 강제된 희망이다. 나아가 영웅이 다양한 적들에 둘러싸인 상황에 굴하지 않고 왜구들을 소탕해나갔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충분히 딱딱한데 간악한 무리들이 장군에게 가했던 고통에 비례하여 더욱 경화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라는 듯, 오직 이것만이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굳어진 사실은 희망에 반대할 수 없는 위력을 싣고 있는 것이다. 희망은 또한 반대될 수 없는 희망이기도 하다.
이렇게 널리 인정되고 있는 간계의 해체는 이름하여 병법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방법론으로서 그러한 방법론으로부터 기대되고 있는 승리는 장군으로부터 전승된 방법인 동시에 장군의 이름 아래 확실한 것으로서 이들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있다. 즉, 사람이 아니라 방법이 방법이 아닌 사람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장군은 실험을 통하여 승자의 공식을 정초해 나갔다. 실험은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그에게 전장은 곧 실험장이었던 것이다. 변인을 통제한다는 것은 싸움이 벌어질 장소에 대한 통제이자 싸움이 일어날 시점에 대한 통제이다. 장군이 요구한 것은 완벽에 가까운 통제와 그에 의한 실험의 성공, 전장에서의 승리이다. 즉, 그의 승리는 과학적 승리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병법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 맞다면 장군의 이름을 연호하며 나타난 무리들의 그런 기대는 의미없고 허망한 종류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선명한 의도를 가지고 오늘날 실험을 벌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거대한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실험장에서, 즉 한국에서 곧 백전불패의 신화가 쓰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여. 그러므로 오늘날 승리할 자는 과거의 승전행렬에 참여했던 자로서 스스로를 이순신의 후예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전통의 계승자로, 눈 앞에 아른거리는 승리와 그런 승리를 가로막는 적의 간계들과 그럼에도 나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스스로에게서 발견한다. 하지만 실험의 결과로 나타나야 할 승리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실험만이 계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승리할 자들이 염원하는 장군에 대한 감정이입의 기회는 여타 조건들과 함께 통째 그 실험 결과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은 해당 실험의 초기 오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자금의 출자자인 어떤 기업이 그가 연구실에 의뢰한 실험 결과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 것이 법칙적으로 증명될 수 있듯이, 부정은 부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부정당해온 것은 실험과 계속된 실험에서 사이에서 등장하는 이순신들이다. 부정하는 자로서의 이순신, 오늘날의 이순신은 부정하는 자로서 출현한다.
바로 이렇게 출현한 것에서 무섭게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의심이다. 자기기만은 계속될 실험의 새로운 제조건이 된다. 자기기만하고 있는 믿음의 후예들은 부정함으로써 부정된 실험을 계속해나간다. 이들은 이들이 주장한 실험과는 완전히 다른 실험을 계속해온 것이다. 실험의 중단 없는 지속이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결과에 의해 이들의 방법론이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이들의 방법론이 향하는 대상은 사회이다. 이곳은 이름하여 이순신 사회다. 객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승리를 쟁취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순신들은 사회적으로 진즉 멸문지화를 당했을 종류의 인간이다. 그들은 사회적 오류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제기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잉태했으나 그 사회를 위해 그 사회에 반대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다만 사회에 출현시킨다. 이순신들이 상처와 함께 연정연승하는 과정, 이름하여 백전불패의 사회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은 한국이다. 하지만, 실험의 주체가 아닌 오직 실험대상으로서 등장하는 이들의 존재는 과거에 이미 경험된 슬픔을 오늘날 다시 느끼게 한다. 오직 이 지점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고통받는 이들만이 마찬가지로 고통받은 이를 위해 고통받았던 그의 후예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이순신을 부르짓는 이들은 자기기만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왜곡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오도되고 있는 예의는 곧 전장에서의 예의로, 그에게는 차라리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쪽으로 그를 몰아세웠던 압력이다. 반면에 이러한 예의를 오도하고 있는 쪽은 죽음을 선전하며 죽음을 향해 누군가를 몰아세우고 있다. 그렇게 사회에 의하여 몰아세워진 이가 바로 이순신의 후예이다. 하지만, 오늘날 부정적으로 진보를 거듭한 사회에 의해 몰아세워진 이가 결국 서게 될 곳이 그전 사회에 의해 간척이 끝난 벼랑이라는 점이 이미 죽은 자를 부러워하게까지 만든다는 점에서 이곳은 지옥이다. 한국은 자살로 만들어진 더 이상의 자살이 허락되지 않는 지옥이다. 이순신들이 만들어지는 이러한 사회는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회인, 지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