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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Jul 13. 2020

글쓰기와 체력

작가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엘레나 페란테: 글을 쓰며 담배를 태우는 데에는 무언가를 속이는 기쁨이 있다.

                        -담배와 술, 코카인이 현실에 더욱 잘 맞설 수 있게 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Elena Ferrante: ‘Writing while smoking was a deceptive pleasure’

                       -Cigarettes, alcohol and cocaine give users the illusion of coping with reality better

번역: 이래로


제가 자연스럽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담배였습니다. 열두살 때 담배를 피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약물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은 했지만,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술이나 다른 향정신성 물질의 영향 아래에선 글을 쓰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 물론, 꽤나 많은 작가들이 위스키나 그런 친구들의 도움 덕택에 대작을 얻어내곤 합니다만, 저는 자제심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술은 멀리하게 됐지요. 한 사람은, 정신을 흐트러트리곤 하는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서 어떤 류의 작가가 되어 보일 수 있을까요?



그래도 사실 저는 이미 저만의 자극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커피와 함께 하는 담배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카페인과, 얼마나 많은 니코틴을 이제껏 빨아들여 왔는지! 커피 마시는 것은 예전에 관뒀습니다만, 수십여 년 간 제 인생에 담배가 곁들여지지 않는 순간은 없었습니다. 글 쓰며 담배피기, 글을 적어 내려가며 담배 연기를 들이켜고 내뿜는 것은 저만의 순수 쾌락이었달까요. 전 애초에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만적 기쁨이라는 것을요. 이것이 제 자신을 망치고 있으며, 다른 이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요. 주기적으로 이 강력한 쾌락의 고리를 끊어내려 노력했습니다. 옥상에서 소리쳐 선언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종내엔 실패했습니다. 몰래 흡연하곤 했습니다. 몰래 피는 기쁨이란 제가 알고 있는 최대의 기쁨을 넘어서더군요. 분명 몰래 피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낯선이와 만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좋지 않습니다. 담배 없이 책을 읽는다? 무섭습니다. 담배 없이 글을 쓴다? 끔찍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여러 이유로, 저는 금연에 성공했습니다.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지 않는 담배 한 까치의 공백이 절 공허케 했습니다. 제가 애정하고 존중하며 우애하는 귀한 분들을 만나지 않기도 했습니다. 제가 무언가 실수하거나, 무례한 언사를 할지도 모른다고, 저 스스로도 총기를 잃어버렸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저를 더 이상 예전과 같이 대해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와 달리 제 자신이 더욱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달까요.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 바로 나 자신의 상황으로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를 느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선 못살겠구나, 그 연기 없이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세상의 선명함을 바라볼 용기가 내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담배, 술, 코카인은 그 정도에서 약간의 차이만 있지 모두 까만 색안경 같달까요.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의 불화를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는, 더욱 편히 감내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요?  몇 달간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는 단 한 줄도 써내려 갈 수 없다고, 담배 없이는 내가 가장 애쓰고 아끼는 바로 그 글쓰기를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물며 수년간 금연을 해온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확실히 저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나마 제 나약한 의지가 (포기하지 말라고) 이렇게 속삭여준 덕분에 저는 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우며 괜찮다고 위안을 얻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된다고요. 지금 멈추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내가 써야 할 글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요.




이 지점에서 시인과 소설가의 길은 갈라진다. 시인은 계속 불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이제 불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다들 웃을지 모르겠으나, 예컨대 건강이나 체력 같은 것이다. 마라톤을 한다는 사실로 널리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가 “긴 소설을 쓰는 것은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해요. 신체적인 강함이 예술적인 감수성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라고 말한다면 놀랄 사람이 많지 않겠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마르케스의 말을 들을 때도 과연 그럴까?

  그 자신에게 글쓰기란 권투와 같다는 헤밍웨이의 글이 제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았지요. ……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작가는 글을 쓰는 매 순간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하며 건강해야 합니다.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 상황이나 감정적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작가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주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작품 창작은 좋은 건강 상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소설가에게 건강과 체력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소설가란 임시의 직업, 과정의 지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소설가란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하겠다. 소설가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소설 쓰기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결국 그는 매일 소설을 쓰게 될 텐데, 그러자면 건강과 체력은 필수적이다.

-알라딘 eBook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묻게 되었다. ‘다시 한번’이라 말한 것은, 예전에 던진 질문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라'는 수준의 순진한 질문이었던 반면에, 이번의 물음은 좀 더 본질적이라는 뜻에서 이다. 순수하게,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나는 몸을 불태워 글을 쓰는 어떤 초인을 떠올렸던 것이 분명하다. 위에 인용한 글은 <작가란 무엇인가>에 쓰여있는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이다. 인용한 글은 첫 번째 질문에는 직접적으로, 두 번째  질문에는 간접적으로 답을 해주고 있다. 나는 그래서 인용으로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 가난이 엄습한 눅눅한 집에 사는 작가는 차라리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희생된 자들의 대열에 뒤따라 나서지 않는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상에서 진실로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 그렇게 글을 써 내려가는, 혹은 모든 것이 꼭 그렇게 멈춰져 있진 않다는 식의 순진한 생각에 비탄하여 정말로 모든 것이 멈춰져 있다고 되려 주장하는... 행렬의 마지막 순번에 다다르려는 최대한의 순응(최소한의 저항)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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