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이 지난 뒤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들었다.
곧 잔치는 끝이 날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매일매일 잔치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벌어지는 난장 속에서 이것이 제발 끝이 나기를 바라고 있는데, 끝없는 축제는 기릴 것 없는 대상에 향해 있다. 그 사람이 나이다. 지역주민이라고 할까. 세입자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가 더 오르길 바라지 않는 주민으로서 축제가 제발 멈춰주기를 기도했다. 나는 세를 감당해내는 주민으로서 집주인의 계획에 차질이 되지 않길 바라 왔다. 한때나마 그리 믿었다. 저축의 꿈은, 내 집 마련의 꿈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축제의 연장, 무한한 페스티벌의 현장 한복판에서 월세를 벌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간을 하염없이 세고 있다. 시간은 단위로-한 시간- 흐르기 때문이다. 다음 축제에 다가올 환호성에, 집주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벌어야 할 지금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벌어 놓기 위해 지금을 지불한다. 나는 이곳에 계속해 살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 적합한 사람인가?
서른, 잔치는 계속된다. 나는 일상을 하루라도 일상과 일상 사이의 일상에 살아보길 원하지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발작이, 때론 한 번의 심정지가, 혹은 주기적인 투석이, 그 우연성과 생의 필요 사이의 운명이 전체 삶의 배경이 되어 버리듯, 나는 벌어지는 노름판 사이에 낀 심부름꾼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남의 심부름을 위해 일상 사이를 외줄 탄다. 운명은, 강대한 주인으로, 심부름꾼이 ‘놀음판’에서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듯이, 벗어난 운명이란, 예를 들어 소위 평범한 삶으로의 복귀는, 주인과 맞서싸워줄 마찬가지의 강대한 손님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주인에게서 벗어난 삶은 과연 불가사의한 신화의 영역에 포개어진다.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은 신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족쇄에서 나를 풀어줄 손님은 나에게서 헐벗고, 불쌍한 인간을 보았을까? 아니면 주인이 챙겨주는 밥과 따뜻한 자유를 누리는 복에 겨운 노예를 보았을까? 하지만 손님이 주인과의 도박에서 건 것은 나의 운명이 아닌 그 자신의 운명이다. 그 또한 자유를 위해 운명처럼 주인의 도박판에서 사그라졌다.
서른, 잔치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한다.
나의 운명은 꽤나 명확하게 청사진 속에 제시되어 있다. 누구의 청사진인가? 언제 그려진 것인가? 능력있는 파티플래너는 일 년의 계획이 미리 있다고 들었다. 모름지기 열심히 살아가는 자영업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는 남의 잔치에 불려 다니든, 잔치와 잔치를 잇는 선 하나쯤 머릿속에 콱 박아둔 꽤나 능력 좋은 비렁뱅이가 되든, 잔치와 잔치 속에서 서른마흔다섯 살에 사그라져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기릴 일 없는 대상에 향해 놓인 어쩌면 마지막 하나 남은 초가 되어서 꺼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꽤나 오래 살아 남아야 할 것이다.
서른, 잔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2019_12_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