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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Dec 17. 2020

근현대사를 다룰 필요가 없는 영화 <극한직업>

다시 쓴 <극한직업>

국가적 영웅 국가 건국 영웅 국민적 영웅 국민 / 투사 열사 항쟁 개인 시민

<명량>의 비범성 <국제시장>의 평범성 / 이데올로기/ <변호사>의 특별성 <1987>의 평범성  /이데올로기*

국가적 위기상황/ 근현대사의 격랑 /일상화된 생존투쟁


2019년 상업영화로서 <극한직업>은 그 목적을 초과 달성했다. 1,600만 명이나 본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다른 영화들 역시 모두 목적을 달성한 영화들이다. 이렇게 성공한 영화들에서 그 성공의 이유를 열심히 찾아주어야 하는 일은 오늘날 새로운 스포츠가 되었다. 경기장의 관중은 선수들을 내려다보면서 규칙 아래에서 작동하는 그들의 플레이를 매 순간 평가하는 게임을 한다. 축구 경기장과 야구 경기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 플레이어의 초인간적인 퍼포먼스에 겨냥되어 있는 것이 곧 오늘날 개개인이 처한 무력한 상태에 대한 반사反射로서 경기장에 집약되어 울려 퍼지듯이 성공한 상업 영화의 그 성공에 함께 기뻐하며 만족하는 대중이 기꺼이 영화에 던지는 한 줄 평은 오늘날 영화가 보이는 무기력함을 선전하며 도처에 널려 있다.  충분히 분석된 <극한직업>의 성공 이유는 ‘코미디’ 장르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목적이 상업적 성공인 영화들은 대개 자기 보존을 위해 약자들이 그러하듯 신중하다. 이러한 신중함은 영화가 나아갈 최고로 안전한 길을 미리 확보해 놓는 신중함인 것이다. 보장된 길로서  장르 문법은 영화를 규정하는 첫 번째 범주가 된다. 즉, 영화에 저마다 장르라는 것이 있고 장르에는 또 그 장르를 구성하는 고유한 장르 문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극한직업>은 액션 코미디 장르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재밌다’는 것이다. <극한직업>이 성공한 이유는 ‘오직 재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관람객의 이러한 코멘트는 이렇듯 영화의 영화 자체로서의 무해함을 선전한다. <명량>과 <극한직업>, <신과 함께>, <국제 시장> 등 역대 흥행 순위를 차례대로 두면 순위는 다만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과 함께 이 영화들이 무해한 정도만큼의 무력함으로 서로 막상막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무력함은 지배자들의 술책일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논리적 귀결(『계몽의 변증법』)”인 것처럼 영화의 무력함은 자본의 술책일 뿐만 아니라 영화 산업이 발전하는 것에 그 원인을 두는 끝내 치료할 수 없는 영화의 만성 질환으로 되었다.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는 무력하다

그러나 영화의 무력함은 근현대사를 다루며 또 다룰 수 있었던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뤄진 내용은 형식이며 허락받았다는 측면에서 형식이 곧 내용이 된다. <극한직업>이 본질상 근현대사를 다룰 필요도 없는 영화이고 애초에 그런 의도는 더더욱 없는 영화로서 근현대사가 표현된 영화인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위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둔 장예모 감독의 <인생>을 <극한직업>과 대비하고자 한다. 우선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영화 <인생>(1994)이 중국에서 상영 금지되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과 위화의 소설 『인생』(1993)이 출판 당시 베스트셀러였다는 점 그리고 위화와 장예모 모두 중국에서 인정받는 소설가와 감독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개혁개방의 중국은 이전의 중국을 비판해야만 한다. 권력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로 되어야 할 내용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의 폐허에서만 재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영화에서 비판되고 있는 대상인 마어쩌둥 집권기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중국에 의해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생>의 주인공 푸궤이(福贵)는 도박 중독자이다. 도박빚으로 대저택을 비롯한 가산 전부를 잃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그렇게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되고’ 힘겹게 노동하며 가족을 부양하고자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역사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국공내전이 일어나고 그는 포로로 잡혔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향한다. 마오쩌둥 집권기 대약진 운동 과정에서 어린 아들을 잃는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하나 남은 딸마저 잃게 된다. 역사적 파랑을 거쳐  잠잠해진 말년의 푸궤이는 아내 지아전(家珍)과 죽은 딸의 남편 완얼시(万二喜) 그리고 손자인 만터우(馒头)와 함께 살아간다. 만터우가 살아갈 앞으로의 세상은 점점 좋아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각색된 것으로 영화와는 다르게 소설에서는 푸궤이만 남게 된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운명에의 순응이 곧 근현대사의 격변에 대항할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지며 대세에 순응하는 것은 미덕이며 적응은 살아남은 개인에게 필연적이다. 받아들여진 영화로서 <인생>은 한국의 천만 영화가 가진 위상을 선취했다. 충분히 받아들여진 내용은 이제 굳어진 형식이 되어 내용 자체가 내용으로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내용의 출현을 금기시하는 <극한직업>의 형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적된 내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지점을 드러내기 위해 <극한직업>의 각 인문들과 장면들을 해석해볼 것이다. 코미디 영화로서 이 영화는 적응과 낙관 그리고 무엇보다 중독에 관한 영화이다.


-코미디 장르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마약에 대해서만큼은 총기류와 다른 실용 문법이 존재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아저씨>와 <베테랑> 등에서 등장한 극적 도구로써 마약은 극악한 범죄조직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개연성 혹은 상층부의 일상적 부패 등 지극히 돈과 관련된 것으로서 등장한다. 그와 반대로 총기류가 등장하고 실제로 사용되는 <달콤한 인생>과 앞서 언급한 <아저씨> 등 에서는 총기류는 개연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그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총이 등장한 시점부터 마약은 총의 등장을 위한 개연성 확보 장치로서 자동적으로 등장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극한직업>은 어떠한가? 단적으로 <극한직업>에서 범죄자는 총이 아닌 버스가 잡고 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제껏 사용된 영화적 장치들이 가지고 온 판타지가 철저히 극복된다. 범죄자는 경찰에게 연행되지 않고 교통사고를 당해 구급차로 수송된다. 웃음은 현실적이다. 또한 <극한직업>에서 마약이 제시되는 방법은 이제까지의 마약 문법을 답습하지 않는다. 마약은 프랜차이즈화 되어 치킨과 함께 배달된다. 마약이 비인도적인 방식을 통해 유통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마약은 다른 것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마약은 성공이다.


-근현대사

근현대사는 개인이 주조되는 과정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인간이 점점 더 고차적인 대상으로 중독의 단계를 높여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독에 대한 치료는 한 인간을 다시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하는 동시에 치료 약물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푸궤이는 도박중독이다. 그를 치료하는 것은 그가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재산을 잃고도 재산에 놓지 못하는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고서도 전혀 포기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박판에 자신을 끌어들여 재산을 가로챈 롱얼이 공산당에 의해 끌려가는 순간 그는 깨닫는다.  "도박으로 재산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내가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 푸궤이는 곧장 집으로 가 인민해방군을 위해 짐꾼으로 일했던 ‘증명서’를 찾아 집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그는 그렇게 안심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전과는 다른 인간으로 거듭난다. 대약진운동은 남녀노소에게 노동을 부과했다. 푸궤이의 아들 요우칭은 과로로 인해 아무데서나 자다가 당간부 춘셩의 차에 깔려 죽게 된다. 용서할 수 없었던 춘셩 마저 그가 반동으로 찍혀 이전의 정치적 입지를 잃고 고통을 당해 자살하려고 하자 용서한다. 용서하는 마음은 이제는 힘을 잃은 공산당 간부를 향해 있지 않고 자신처럼 고통받는 한 인간을 향해 있다. 숙청 과정 중 의사들이 대부분 끌려갔고 바로 그 시기에 출산해야 했던 자신의 딸은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체제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생전의 아들에게 전했던 격언 “병아리가 거위가 되고 거위는 양이 되고 양이 자라 소가 되고 소가 다 자라면 매일 굶지 않는 공산주의가 된다”는  “소가 다 자라면 만터우가 다 자란다”는 말로 바뀌어 손자에게 전해진다. 손자는 그러면 소 등에 올라탈 것이라고 답하지만 그는 “다 크면 소 등을 타지 말고 기차나 비행기를 타야지, 그때는 생활이 더욱 좋아질 테니까”라고 화답한다. 기차나 비행기가 대중화된 오늘날 근현대사는 선택과목이 되었다는 사실은 한 인간이 사회로 나가기 직전 그의 경제적 실존이 문제시되는 시기에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여겨지는 시험에서 이 과목이 쉽게 선택되지 않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경제적인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설명력을 가지며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극한직업>의 세계는 모두 무언가에 중독된 세계이다. 이 세계는 그 이후의 완성된 세계이다.

주인공들이 모인 ‘마약반’은 마약 수송책으로 이용되게 된다. 물론, 이들이 그것을 깨닫고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나 국가 권력이 대리 유통하는 마약이라는 설정은 보통 국가 권력의 존재 이유가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인물들

남성 J는 도박 중독이다. 남성 R은 폭력 자체에 중독되었다. 남성 G는 반장 R(아버지)로 부터 인정받기 위해 산다. 영화에서 이 세 명의 중독자들이 불러올 고통의 짐은 모두 여성이 진다. 이것 자체로는 이 영화의 한계가 명확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현실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짐 진 자로서의 여성이 보이는 억압 또한 근현대사 이후 여성에게 부과된 새로운 억압의 차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남편(R)이 자꾸 칼에 맞아 실려온다. 그 걱정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는 아내는 남편의 속옷에 몰래 부적을 넣는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못 살겠으니까. 그럼에도 이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장이 되었음에도 계속해 현장에 나가 폭력을 행사하고 또 당하는 ‘죽지 않는’ 폭력의 화신으로 살아간다. 형사 N은 사랑하는 경찰 J가 어디 가서 또 도박이나 하다가 미쳐 누군가를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그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놓았다. 실제로 J는 위험한 순간에서도 마작을 하고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범죄자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한다. 남성 G는 마약반의 막내이다. 그는 신혼집을 구비하기 위해 모아둔 자신의 사비를 털어 반장에게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현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약혼상대는 작중에 등장하지 않으나 이 G의 거듭된 행동의 결과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 자명하다.


마지막으로 극 중 최강으로 나오는 악당의 호위무사가 있다. 그는 여성이지만 그의 주인인 악당이 굳이 총 쏘겠다는 것을 손으로 가로막으며 모두 그의 주먹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다시 말해, 주인-악당이 더러운 일을 하는 걸 못 참는다. 그러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쓰러질 때 총든 악당께서는 그런 충심의 호위무사를 버리고 홀로 배 타고 도망을 친다. 특히 이 마지막의 호위무사는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게 현재적이고 완료상태의 배신을 당한다는 점에서 논외이나, 다른 여성들과의 비교 속에서 이 여성이 당한 배신이 구시대적이라는 점이 특정된다. 즉, 나머지 모든 여성들은 남성으로 인해 야기된  자신의 짐이 아닌 짐을 지게 될 가능성을 떠안고 있다. 첫 번째 우리 반장님 R은 어떨까? 절대 죽지 않는 것으로 전설적인 좀비 반장은 폭력적 상태에 중독되어 있다. 반장은 현장에서 살해될 위험이 다분하다. 도박중독 G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 속의 여성들은 남성성에 중독된 남성들로 인해 상시적인 위협에 노출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근현대사 이후의 인간들

막내는 극 중 유일하게 마약을 한다. 이는 의도치 않게 그 맛을 보게 된 것으로 봉지에 묻은 티끌만도 못한 마약을 섭취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현대사의 격랑 이후의 인간상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인생>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고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에서  비로소 근현대사가, 위의 푸궤이가 손자에게 격언을 넘겨주었던 상황에서 표현되었듯, 개인적 관계로 이어진 반면 이후의 인간들은 이러한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주조되었다. 다시 말해, 막내는 작중에서 제일 맹목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삼대독자이기까지 하다. 결혼자금을 홀랑 털어다 반장 치킨집 차리는데 바치려 하기도 하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감각 상실은 오늘날의 나침반인 경제적 성공의 지침이 아닌 인정 결핍의 상황에서 비롯된 이후 인간의 혼란함을 보여준다. 무엇에 정향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그는 눈 앞의 남성에게 인정받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는다.  그 어떤 과제에도 열심히지만 출세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열심일 뿐이다. 그는 그저 반장이 좇는 목표인 성공 즉, 마약조직 타파와 치킨 프랜차이즈 성공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에 동원된 존재이다. 여기서 막내의 성공이란 '아버지•보스•스승'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주목할 지점은 본인 역시 자신의 미래가 밝지 않음을 알고 있다는 것에 있다. 야근 지옥에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예상되는 산재의 위험[칼 맞을 위험] 등등에도 오히려 끝까지 밝은 모습으로 일관한 그를 보며 나는 이후의 인간이 지닌 허위를 발견한다. 그는 사건의 전모를 밝힐지도 모르는 마약봉지의 발견에도 그것을 적중시키지 못한다. 도리어 그는 그것을 흡입한다. 그는 실체가 드러날 시간에 약에 취해 자신을 잃는다. 처음으로 자기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코앞에 두고 그는 약에 취해 한 마리 개가 되어 끌려 다닌다. 목 줄에 매인 채로 활약을 하긴 한 그는 사건이 끝난 뒤 자신이 뭘 했는지 도무지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는 조직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구성원으로서 노동의 목적에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오히려 정신 멀쩡히 사업을 구상하는 두 거물 범죄자와 조리 있게 말하는 중간보스들이 보여주는 명백한 악보다 더욱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주관 없음.'  청년이 이 극한 세상 속에서 직업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은 이 영화에선 그 윗 세대들에게 통째로 넘긴 미래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의미하며 그는 이 노동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역사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근현대사 이후의 인간에게 상시적인 기억의 통제 상태는 하얗게 세척당한 이후의 인간이 처한 역사적 존재 망각 상태이다. 현실에서도 노동 현장에서 청년들이 죽어나간다. 이처럼 영화에서도 막내는 곧 죽게 될 것이다. 어쩌다 맛 본 성공의 맛이 자신의 성공이 아니었다는 점을 끝내 깨닫지 못 한 채 그에게 남은 일말의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더 위험한 일로 그를 내모는 현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채 그렇게 벼랑으로 자꾸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약이라도 한 것처럼 그저 열심히, 다만 열심히 일하며 위로 내려오는 칭찬을 바라면서 그렇게 결국 죽임 당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개연성을 과도하게 확보하고 있다. 그 하얗게 거품 문 짐승에게서 나는 나를, 또 우리를 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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