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고싶다 벌써 일주일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어

나가고싶다 - 그_냥

by 김이름

30년 넘게 살아가면서 딱히 기억에 크게 남는 생일은 없었다. 학창시절에 반에 한 명씩 존재했던, 반의 분위기 잡는 무서운 친구의 생일이 되면 그의 친구들은 깜짝 파티를 늘 준비했다.

싸우는 연기를 하거나 종량제 봉투에 주인공이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넣어 준다거나 아니면 케이크를 얼굴에 던지는 빅 이벤트를 하는 걸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생일자 주인공은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받은 모습을 보였는데 때때로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감동의 깜짝 파티를 받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늘 고민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어서 난감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생일 깜짝 이벤트를 받은 것 보다 그 친구가 한아름 받은 종량제 속의 군것질거리가 부러웠다는 것이다.


내 생일은 늘 방학이었기 때문에 기억하는 친구가 없었다. 옆자리 친구와, 주변에 앉은 친구와 친해질 무렵 꼭 서로 생일을 물어보긴 했는데 내 생일을 듣는 친구들마다 오, 방학이네. 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응. 그렇게 됐어.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 된 것 뿐이다. 원하는 날에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닌걸.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만 해도 성대한 생일잔치를 하긴 했다. 일단 유치원에서는 생일 날에 맞춰서 파티를 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달 생일자를 한 날 한 시에 한데 모아 파티를 해주었다. 주인공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고 왔고 사탕으로 이어 만든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다. 유치원 때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장난감집 문을 벌컥 열어 문 앞에 있던 친구의 쌍코피를 낸 것만 기억난다), 사진을 보면 함께 한복을 입은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만든 무대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 참 피곤하셨겠다 싶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다. 이 시간은 동네잔치급이었던 것이다. 친구들 뿐 아니라 친구들 부모님들도 모이셨고(낮에는 어머니들, 밤에는 아버지들), 사온 음식이라고는 버터 크림이 잔뜩 발린 케이크 하나 뿐, 카레 향이 나는 치킨, 콩나물 비빔밥, 불고기, 잡채 등은 집 안에서 어머니들끼리 직접 만들어 상에 올려주셨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당연 치킨이었다.


생각해보면 초대받은 친구들 중 나와 한 남자아이 빼고는 이렇게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행사급 파티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 남자아이의 부모님은 우리 집과 특히 친해서 비슷하게 진행했던 듯 하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 생각해보면 일반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내 동생부터는 이런 이벤트를 열지 않아 내심 미안했다. 동생이 이런 생일 잔치를 열게 될 쯤에는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주변에 더 이상 이런 친구들이 없기도 했다. 어릴 적 당연히 받았던 것들에 대해서 지금은 부모님께 감사하고, 첫째만의 특권을 누린 것 같아 동생에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든 이사를 간 뒤로부터는 이런 동네 행사는 끝났다.


이사와 함께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까지 친구들과도 큰 파티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방학의 여파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느꼈지만 연구실 소속이 되면서 조금 달라졌다. 연구실에서는 '실비'라는 개념이 있었다. 실비를 보험보다 연구실비에서 먼저 접했던지라 나중에 보험을 챙길 때 상당히 혼돈이 왔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연구실원이 되자마자 연구실원들은 나의 이름 다음 생일을 먼저 물었고, 방장 책상 위 탁상 달력에 메모가 되었다.


내 생일이 다가오기 전 다른 사람의 생일이 먼저 찾아왔다. 방장이 내 사수와 나를 조용히 불러 케익을 사오라고 체크카드를 건네줬다. 그때 입실 후 생일을 물어본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내 생일에 모른척을 해야하나 하고 잠깐 고민했다. 당시에는 할 일이 많아 바쁜데 굳이 모여서 이렇게 해야하나, 내 생일날 조차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같이 힘든 시기에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 주었다는 것도 참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연구실 졸업 직전 생일날, 생일자였던 나를 일부러 데리고 나간 선배가 연락을 받고(연구실에서 이제 들어와도 된다는 사인) 나에게 "이제는 뭔지 알지?" 라고 킥킥대며 말했고 나도 웃음으로 대답했다.


취직을 해서도 이런 생활은 계속되었다. 전공 특성상 취직을 해도 다 학회에서 만났던, 아니면 논문에서 들어본 사람들이었기에 생일이 되면 돌아가면서 서로 파티를 해주었다. 연구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생일날 호출받아서 휴게실에 들어 갈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민망했던 기분이 아직까지 떠오른다.

두 번째 직장에서는 생일을 맞은 월에 케익이 나왔다. 그럼 모두 사무실 뒤 편의 긴 회의테이블로 이동해서 노래를 불러주고 다같이 케익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한 달에 생일자가 여러 명이 나오면, 가장 높은 사람의 케이크만 오픈했고 나머지는 집에 가져가서 가족과 먹으라고 했다. 이렇게 매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었구나.




그래서 생일과 이 노래와 무슨 상관일까 싶을 것이다. 때는 2021년 타시도에 공무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던 때였다. 출장은 금요일 밤에 끝났고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출장가느라 처리하지 못한 일을 하러 사무실에 출근했다. 2박 3일 출장으로 사무실을 떠났다가 와서 그런가 업무에 도통 집중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이마가 핑 돌았고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엥? 왜이렇게 뜨거워? 더운가 싶어서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공공기관이라 아무리 낮춰봤자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눈길이 체온계에 닿았고 어차피 집중도 안되는데 좀 쉴 겸 무의식적으로 체온계를 이마에 대고 찍었다. 37.1도? 진짜 덥긴 덥나보다 싶어서 에어컨 밑으로 가서 바람 좀 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엔 모니터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심각함을 감지하고 다시 체온계를 이마에 찍어보았다. 38.3도. 코로나일 수 있겠네.


가장 먼저 한 일은 USB에 업무에 필요한 파일을 복사해넣었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때의 나는 체온계의 숫자를 보자마자 가방의 USB를 찾았고 필요한 파일이 무엇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우니 그냥 D드라이브 안의 폴더를 통째로 복사를 했다. 파일이 이동하는 동안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98%, 99%, 완료가 뜨자마자 USB를 뽑고 창문을 닫아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주말에도 여는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코로나 양성이 떴고 바로 출장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들 나만큼의 증상은 없다고는 했지만 병원을 찾아 검사를 해보니 다같이 양성이 떴다. 그대로 일주일 격리가 시작되었다.


이상하게도 양성이네요 라는 답변을 들은 다음부터 모든 병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침을 삼킬 때는 바늘이 사방으로 꽂힌 밥을 넘기는 것 같았다. 열은 심해지고 밤마다 기침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집으로는 가야했으나 다른 가족들에게 옮겨서도 안되었기에 나는 방 안에 일주일을 살게 되었다. 엄마가 문 앞에 음식을 놔주면 문만 빼꼼히 열어 가져갔고, 화장실을 갈 때에는 준비해 둔 비닐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껴서 이동했다. 화장실을 쓰면 소독 스프레이로 내가 만진 모든 곳을 뿌려댔다.


그래도 삼일째가 되니 살만해졌다. 밤에서 새벽까지는 여전히 기침에 시달렸지만 이상하게 해가 뜨고 나면 출근하지 않고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활이 나쁘진 않은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코로나 양성 확인증을 받았을 때 종이에 찍힌 날짜를 보았다. 이제 이 날짜부터 7일간 바깥에 나올 수 없다. 마음 속으로 제발.. 을 외치며 7일 뒤 날짜를 세어보았다.


아 내 생일이네. 생일날까지 꼼짝없이 방에 갇혀있어야 하는구나. 생일날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릴 때처럼 엄마가 성대한 파티를 열기로 계획했다가 취소가 된 것도 아닌데(5인 이상 집합 금지여서 모일 수도 없다), 상당히 좌절감을 느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족에게 연락했다. "코로나 양성 나왔어요. 나 생일날까지 집밖에 못 나와."


생일날 이 노래를 들었다. 나가고싶다 벌써 일주일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어.

가족들은 내가 보이는 거실 한 가운데에서 생일 케익에 초를 꼽았고 노래를 불러줬다. 그리고 케익 한 조각이 문 앞에 배달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라고 방문을 열게 해주어서 나도 케익을 보며 축하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집 강아지들도 내 얼굴을 오랜만에 보니 좋은지 짖어댔다. 빨리 나보고 오라고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데 나도 나가고 싶었다고. 내가 석방된 날, 내 생일은 이미 지나가고 없어진 뒤였고 그런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뽀로로에 나오는 루피라는 캐릭터가 투명한 필름지에 인쇄되어 케익의 주변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때를 기념하려고 그 띠지를 내 방 앞에 붙여놓았다. 오랜만에 본가에 갈 때마다 그 띠지를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저렇게 좁은 방에 일주일을 갇혀 지냈다니. 정말 나가고 싶긴 했겠다.





노래 한 곡으로 전체 생일을 돌아보게 된다. 내 생일에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준 동료들, 선후배들과 부모님의 수고와 배려로 지낸 하루였다. 요즘엔 생일 축하 받는 게 부담스럽기도 해서 카톡 프로필에 뜨는 내 생일을 숨김 처리 했다가, 이럴 때나 안부를 주고받는 거라는 친구들의 말에 다시 공개로 전환하였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피곤함을 꽤 느끼는 편이지만 누군가의 생일때 만큼은 적극적으로 소통해보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그럼 앞으로의 날들은 여러 관계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날들이 되겠지?

글 초반에 딱히 기억에 남는 생일은 없다고 한 말을 취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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