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자가 여행을 시작하기까지.
스위치를 눌렀을 때 전구에 불이 팟- 하고 켜지듯 하루아침에 "몽골에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문득 쏟아지는 별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설을 맞아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동네에 유일하게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계셨고 화장실은 푸세식이어서 마당으로 나와야지만 갈 수 있을 정도로 시골 깊은 곳에 위치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싶다고 엄마를 깨웠고, 요강을 들이미는 엄마 손을 밀어내고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눈을 부스스하게 뜬 채 고무로 된 할머니의 파란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때 하늘에 총총 박힌 별이 오싹하게 느껴질만큼 가득했고 나는 그 별을 보고 우와- 하고 외쳤던 추억을 종종 떠올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이 점차 가공되어서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풍경이 실제 내가 눈에 담은 것인지 상상력이 끼어들어 미화가 된 것인지 이제 분간은 가지 않는다. 처음으로 엄청난 별들을 마주한 후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갔지만 그런 별을 다시 한번 본 적은 없었다. 이제는 그런 시골까지 가로등이 들어서고, 더 이상 할머니 댁에서 잠을 자도 되지 않을 거리의 지역으로 이사를 왔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별을 또다시 봐야겠다는 결심이 서고 난 후 연쇄적으로 떠올린 것이 몽골이었다. 회사 출장을 제외하고 해외여행은 2018년도 호주가 끝이었다. 그 전에도 해외 여행은 종종 갔었는데 자의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해외 여행은 20대 때 반드시 가야 하는 것 중 하나로 손꼽혔었기에, 그래 나는 20대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여러 국가를 돌아다녔었다. 호주를 끝으로 나는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고 만료된 여권의 기간을 연장하지 않고 지내왔다. 이랬던 내가 스스로 여행을 가고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거의 처음인 듯했다. 7월쯤 결심한 것 같은데, 7-8월 극성수기에는 오히려 회사가 피서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더워서 여행하고 싶지 않았다. 전에 다니던 직장보다 연차 쓰기 쉽고 편한 곳으로 이직을 했었기에 9월쯤으로 계획을 잡았는데, 이때는 시간을 맞출 친구가 없었다. 몽골 여행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을 때, 혼자 가면 정말 심심한 곳이라는 후기를 보았다. 나는 이것저것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최근에 누군가와 함께일 때의 즐거움을 많이 느꼈고, 내가 보고 즐기는 것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끝에 동생이 떠오르자 동생한테 몽골 여행 패키지 상품 링크를 첨부하며 문자를 보냈다.
"이 링크 봐봐. 여기 갈래?"
"8월 말이네? 몽골 좋아. 갈 거면 9월 초 어때? 이때도 연차 쓸 수 있어?"
"미리 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어. 몽골은 단체나 패키지 여행만 가능하대. 나중에 9월 다되어가면 상품 비교해보고 정하자"
"응 나는 그럼 지금 미리 특별휴가 올려 놔야지!"
이 연락을 마지막으로 몽골 이야기는 한 달 가까이 뜸해져갔다. 이 시기쯤 퇴사를 고민했고, 심사숙고 끝에 퇴사를 하고 나니 몽골 여행 날짜는 아무때나 동생한테 맞추어도 되겠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수입이 생길 동안 돈 쓰는 건 자제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에 더 힘이 실릴 무렵 몽골 여행을 하루라도 빨리 취소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오랜만에 설레는 일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더 상처받기 전에 지금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네.'
그무렵 좋아하는 작가님의 북토크에 참석하게 되었다. 작가님이 과거에 쓰셨던 책 내용이 너무 좋아서 북토크를 신청했는데, 알고보니 신간 도서를 발매하면서 북토크를 하시게 된 거였다. 북토크 하루 전에 부리나케 책을 읽고 당일 토크 장소에 들어가기 직전 카페에서 마저 읽었다. 급히 읽게 되었지만 이번 책 또한 매우 공감이 되어서, 공감가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면 책 통째로 형광펜을 칠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북토크가 시작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소감이나 여러 하고 싶은 말들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책의 콘텐츠 중 아래의 내용을 말씀드렸다.
"음, 그러니까 저는 가장 신기한 분들이, 이를테면 내년 추석을 끼고 황금연휴가 한 열흘 생긴다는 걸 알고, 아직 올해 추석도 지나지 않았는데 미리 비행기표를 끊어두는 분들이에요. 어떻게 무려 1년 뒤의 일을 계획할 수 있을까. 지금 발딛고 있는 삶이 얼마나 단단하면......." 마지막 문장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중략)
1년 뒤를 기약하는 삶이 왜 나는 쉽지 않을까. 그날 먹을 식량을 그날 구하러 다니는 수렵채집인도 아닌데.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으레 봄에는 가을을, 가을에는 내년을 준비하며 자기 삶에 미래를 끌어들여 왔다는데.
(중략)
비교적 먼 미래에 있을 무언가를 꿈꾸는 일 자체를 언제부턴가 하지 않고 살았다. 버킷리스트 같은 거라도. 재미로라도.
(중략)
"누군가 그럴싸한 계획을 세운다. 처맞기 전까지는." 몰아치는 운명(?) 앞에서 인간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 때 떠올리는 마이크 타이슨의 말. 나는 처맞는 게 두려워 지레 계획하길 포기했던 걸까. 하지만 계획을 안 한다고 해서 처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계획 없이 처맞는 것이 계획을 세우고 처맞는 것보다 실망감이 덜해서? 그렇다면 고작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단 말인가.
(중략)
1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기약하며 사는 이들이 꼭 지금 이 순간 굳건히 디딜 땅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인생에 그런 순간, 그런 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일지도 모르고.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면서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걸 믿는 이들이 삶을 계획한다. 삶은 어김없이 덮쳐오며, 살아보지 않은 쪽으로 흐른다는 걸 아는 이들이.
고쳐 쓰는 마음 - 이윤주 p.94 (1년 뒤의 비행기 티켓)
간단히 말씀드렸던 내용을 공유하자면, 위 문단을 읽고난 후 몽골에 가기 전 계획이 어그러져 슬픈일이 닥쳐와서 내가 쳐맞기 전에 미리 취소해서 자기위로를 하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려고 했다, 비단 이번 몽골 여행 뿐만 아니라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삶은 어김없이 덮쳐오고 살아보지 않은 쪽으로 흐른다는 구절을 읽고 이번 여행은 내 손으로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여행 당일까지 버텨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을 한 듯했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 동생한테 특별 휴가를 쓴 날짜를 다시 확인하고는 몽골 패키지 여행 링크를 서로 공유하며 속전속결로 패키지를 예약하고 결제까지 마무리했다. 미래에 무언가를 하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하기엔 내 삶이 불안하다고 느끼던 시절, 고작 한 달 앞도 보이지 않던 때의 습관이 아직도 남아있었나보다. 패키지 여행의 예약 내역서를 읽으며 다짐했다. 앞으로의 삶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어떠한 변수로 인해 이번 계획이 어그러져서 슬픔에 처맞더라도(?) 털고 일어나서 또 다음을 계획하며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