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만세운동의 날

눈 내린 밤의 놀이터

by 박호단

추웠다. 작년 여름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11월 들어 기온이 떨어지자 경험해본 적 없던 겨울 달리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 공기는 차가운데 내 몸은 데워져 땀이 흐르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열 노천탕이 부럽지 않은 이 만족감은 추우면 추울수록 컸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장의 신호가 심상치 않았다. 다리를 앞으로 뻗을 때마다 얇은 트레이닝복 하의 속을 냉기가 훑고 지나가면서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왔다. 달리기를 멈추고 산책로의 화장실을 다녀와도 다시 뛰기만 하면 도지는 증상 때문에 오늘은 결국 평소의 삼분의 일도 못달리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평소만큼 충분히 열을 올리지 못하고 미적지근하게 집으로 돌아오자 추위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목표한 거리를 다 달리고 피니쉬라인이라도 있는 듯이 마지막 발을 힘껏 내딛은 다음, 숨을 몰아쉬며 잰 걸음을 걸을 때면 세상 의기양양한 기분이 되곤 했다. 오늘 하루 그걸 못했다고 이렇게 찝찝한 걸 보니, 혹시나 어쩌면 설마하니 만에하나 그 의기양양하던 기분이 러너스 하이라는 것이었나? 에헤이. 그럴리 없다. 러너스 하이라는 것은 자고로 나처럼 뒤뚱뒤뚱 걷듯이 뛰는 사람한테 긴가민가하게 오는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뛰는 사람에게 오르가즘처럼 불현듯, 드디어 왔네 왔어 내가 왔도다 하고 찾아오는게 아니던가. 나는 불경한 상상이라도 한 양 고개를 휘젓고 땀도 나지 않은 몸을 데우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샤워 후 저녁을 준비하는데 지인과 짧은 통화를 마친 남편이 송도에 눈보라가 휘몰아친다더라 말을 전했다. 서울과 송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우리는 좀전에 맑은 하늘에 노을이 지는 걸 봤는데 희한하네. 라는 대꾸가 끝나기도 무섭게 강 건너가 보이지 않도록 눈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카톡창에도 눈이 내렸다. 서울 영등포 눈발 날리기 시작. 경기도 용인 전혀 기미 없음. 경기도 안양 어 여기도 오기 시작. 경기도 용인 앗 그새 쌓였음. 얼마나 촐싹맞은 눈구름인지 천둥번개를 동반하고 마치 스콜처럼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퍼붓고 있었다. 이렇게 쌓이는 눈이 최근 몇 년새 온적이 있던가? 아이들은 며칠 전에 본 영화 미드나이트스카이가 떠오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호들갑을 떨던 아이들은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놀이터로 달려내려갔다.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아이들이 여럿 나와있다. 신난 꼬마들은 쌓인 눈이 매트리스라도 되는 듯 눈바닥에 몸을 던졌다. 플라스틱 눈썰매도 속속 등장한다. 우리집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고 싶은데 눈이 잘 안뭉쳐지니 동생을 바닥에 놓고 굴린다.

베란다 문을 닫고 들어와 커피를 내려 마셨다. 몇십분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혼자 있는 저녁시간이다. 오늘은 글쓰기 과제를 제 시간에 할 수 있겠군 마음 먹고 핸드폰을 켰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인스타그램이나 구경하고 있다. 피드는 눈쌓인 밤의 놀이터 풍경으로 가득하다. 꼬마만세운동이라도 일어난 듯, 갇혀있던 꼬마들이 다들 뛰쳐나왔다. 점점이 찍힌 패딩점퍼입은 아이들과, 줄줄이 찍힌 발자국들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몽글해진 마음으로 삼십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쿠키를 꺼내 먹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다 된 빨래를 널고 집안을 정돈하니 그제서야 아이들이 상기된 볼을 하고 들어왔다. 눈놀이 후엔 핫쵸코지. 어느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기억하며 밀크팬에 우유를 데워 코코아 가루를 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함께 나가 썰매를 끌어주느라 고생한 남편에게는 뱅쇼를 데워주었다. 나도 한 잔 마셨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다투어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모여앉은 김에 바게트 조각과 치즈 조각도 조금씩 나눠먹었다. 우리는 분명 한 시간 전에 저녁을 먹었는데.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왜 달리기를 그렇게나 열심히 해도 살이 전혀 빠지지 않는가에 관한 글이다.

그런데 러너스하이 정말 궁금하다. 오늘의 폭설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걸까. 아니면 갑자기 눈이 내린 밤, 놀이터의 아이들을 보며 은근히 미소지어지는, 그런 흐뭇하고 신나는 기분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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