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바깥은 여름>은 읽고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 이외의 사람들이 풍경처럼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는, 그렇게 흘러가는 엑스트라에게도 마음이 쓰인다. 가령,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살아가고 있는 소년의 눈으로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에서.
삼삼오오 벤치에 모인 엄마들이 육아 정보를 공유하고, 한담을 나누며, 걱정과 관심, 애정이 담긴 눈으로 자기 자식 바라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노찬성과 에반>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가 되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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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는 수영 어디 다녀요? 아아 셔틀이 오는구나. 어휴 저희 애는 수영 꽤 다녔는데 도통 늘지를 않더라고요. 뭐든지 좀 느린 것 같아요. 태오 다니는데로옮겨볼까? 생각해봐야겠어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우리, 아이들 7시까지만 놀릴까요. 들어가서 씻기고, 저녁도 먹여야하고. 아우, 이놈의 놀이터 수발 언제 끝나냐 증말. 어머 쟤네 좀 봐. 얘들아 미끄럼틀 통 위에 올라가지 말랬잖아. 내려와내려와. 너무 위험해. 엄마가 뉴스에 나온 이야기 해줬지?
엄마가 말했잖아. 여기보다도 낮은 미끄럼틀에서 떨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아이 이야기. 늘 조심해야해. 뭐라는거야. 조심하라는데 궁시렁거리기는. 뭐? 그 아이는 조심을 안해서 죽은거냐고?
… 엄마라고 다른 사람의 삶을 이렇게 무심하게 소비하고 싶었던 건 아니야. 한 생명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이야기를, 누군가의 세계가 무너졌을 사건을, 내 아이 겁박을 위해 쉽게 언급하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놀이터 앞 벤치에 삼삼오오 앉아서 한담을 나누는 시간의 엄마는 스스로에게도 참으로 보잘 것 없이 느껴지긴하네. 보잘 것 없어서 오히려 모든 발화가 쉽게 이루어지고 쉽게 증발될 것 같다 하면 변명일까. 모든 이야기가 납작하게 눌려 통과되는, 그런 필터나 풍경이 된 느낌이야. 거대한 부피감을 가진 3차원의 세계가 일어나고 스러지는 역동 속에 엄마 혼자 납작한 종잇장으로 남은 느낌이야. 그럴 때 엄마는 울대를 한껏 부풀리는 수컷 개구리처럼 부풀려보지, 그 벤치에 앉아있어야하는 당위성을. 네 안위에 대한 걱정과 너에 대한 사랑을. 하지만 부풀려진 울대의 투명한 막 안으로 훤히 비쳐보이는 빈 공간을 누가 볼새라 다시 푸쉬쉭 공기를 빼버리곤 해.
그리곤 초라한 마음으로 엉덩이를 털고 들어와서 너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소설을 읽지. 그 벤치의 3355 중 1이었던 나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별볼 일 없어보이고, 중심에서 한없이 밀려나 있지만 저마다 커다란 우주가 담겨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없이 땅으로 꺼지는 상실감과 절망감, 아무리 노력해도 한오라기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는 흔한 풍경을 용케도 아름답고 의미있게 풀어낸 소설가의 문장들, 그래서 나랑 닮은 그들의 절망 속에서 엉엉 울다가도 개운하게 다시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만드는 시간들.
엄마는 이어폰을 꼽고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는 걸 좋아했어. 붐비는 공간이어도 이어폰을 꼽고 있으면 내가 큰 버블 안에 들어가서, 나 혼자만의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나만을 위한 음악, 나만을 위한 공간, 나만을 위한 시간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좋았어. 그런데 얼마전에 호흡공동체라는 책을 쓴 작가의 북토크를 들었거든. 그분이 공기관계라는 단어를 쓰시더라고. 코로나와 폭염 같은 위기가 닥치면서 우리는 함께 공기를 공유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한다고 말야. 나 혼자만을 감싸는 공기 주머니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래도 같이 숨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가며, 위험을 관리해가며 공기관계를 재설계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한다고.
엄마는 놀이터 앞 벤치에 앉아서도 이어폰을 꼽고 혼자이고 싶은 마음이 늘 컸거든.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공기 관계가 재정립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 꼽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감정의 공동체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한 안간힘을 함께 느끼고 호흡하며 울고 웃었어. 다시 날이 밝고 다시 해가 저물기 두어 시간 전, 놀이터의 시간이 돌아왔을 때, 벤치의 3355 친구들에게 이 소설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거야. 우리는 삶이나 생, 공동체 같은 단어를 공유하기에는 서로 멋쩍고 쑥쓰럽거든. 하지만 쑥쓰러울 뿐이지 우리가 정말 가볍고 납작한 존재라서는 아니야. 그리고 엄마에게는, 여전히 쑥쓰럽지만 그런 단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비밀스런 공간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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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형 의자에, 영우는 유아용 접이식 식탁 의자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
“입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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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할머니는 대답 대신 볼우물이 깊게 패게 담배를 빨았다. 담배 연기가 질 나쁜 소문처럼 순식간에 폐 속을 장악해나가는 느낌을 만끽했다. 그 소문의 최초 유포자인 양 약간의 죄책감과 즐거움을 갖고서였다.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
찬성이 채근하자 할머니는 강마른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바닥에 톡톡 털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
"노찬성과에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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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수와 수족관에 갔을 때 두 사람 머리 위에도 비슷한 얼룩이 아른댔다. 하지만 그건 물그림자였던가. 빛 그림자였나. 한 손을 길게 뻗어 “빛도 얼까?” 중얼대던 이수가 떠올랐다.
"건너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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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어어, 흐어어” 하고 웅얼댈 때 그것은 빙하가 무너지는 풍경과 비슷했다. 수백만 년 이상 엄숙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얼음의 표정과 흡사했다. 그것은 무척 고요하고 장엄했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였다. 뭐랄까, 세상에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멸망, 침몰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마지막에 온전한 문장 하나 완성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가 눈을 감자 세상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고요에 휩싸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동시에 내 속에 거대한 그리움이랄까 욕구가 일었는데, 그건 내가 태어난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거였다.
"침묵의 미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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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풍경의쓸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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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가리는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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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어디로가고싶으신가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