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에서 네 시간 동안 있었던 일
* 9시 20분
토요일 아침 아이스크림집 앞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200미터는 족히 되어보였다. s는 줄의 끝에 차를 잠시 정차하고 아이를 먼저 내려주었다.
“엄마 근처에 주차하고 올게. 5분에서 10분 정도 걸릴거야. 엄마 올 때까지 절대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꼭 서있어, 알겠지? 사람들 더 온다, 빨리 가.”
아이가 엉거주춤 차에서 내려 줄에 합류하는 걸 보고 그는 며칠전에 잠시 들렀던 근처 광주요 건물로 차를 몰았다. 오전 9시 20분. 아직 그릇가게는 문도 열기 전이고, 발렛파킹 직원도 출근 전인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대로 반듯하게 주차해두고 잰 걸음으로 경사진 골목을 올라갔다.
아이스크림집이라기엔 거대한 5층짜리 건물. 창마다 붙어있는 샛노란 피카츄와 새빨간 포켓볼 스티커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5분 사이에 대기줄은 더 길어졌다. s는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줄 선 사람들을 재빠르게 훑었다. 열 살 아이가 엄마를 먼저 알아보고 빽빽한 줄 사이에서 손을 들어보였다. 그는 잃어버렸던 아이를 되찾기라도 한 듯, 손을 꽉 잡고 아이 등을 문지르며 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5월 말의 볕은 오전 나절에도 따가웠다. 볕이 더 따가워지기 전까지, 통통한 짧은 팔에 빨간 볼을 한 피카츄는 아이스크림집 창에 붙어 사람들을 계속 줄세울 것이다. 오뉴월 사이에 걸친 한 달 동안 이 아이스크림 회사에서는 포켓몬스터 팝업스토어를 열기로 했다. 매장에서는 아이들이 오매불망 얻기를 원하는 포켓몬빵 포함 도넛과 인형, 스티커를 팔았다.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그들은 문 앞에서 번호표를 발행했다. 10시 오픈이니 9시 반쯤 가서 번호표를 받자는 생각은 무척 안일한 것이었다. s와 아이는 약 40분 동안 줄을 서서 입장 대기번호 398번을 받았다.
그들은 번호표를 받아들었으나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아이스크림집에 들어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서있는 젊은 스탭에게 넌지시 입장 예상시간을 물었더니 두서너시간이라는 애매한 답이 돌아왔다.
두서너시간. 번호표를 받은 어떤 부모와 아이들은 벌써 근처 편의점에서 박스를 가져다가 돗자리처럼 깔고 컵라면을 먹거나 맞은편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고 무한대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s는 한남동 지리에 빠삭한 사람이다. 조금만 걸으면 대사관 사이사이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 쾌적한 갤러리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깔고 앉을 박스를 구할 필요는 당연히 없었다.
* 10시 10분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몽골, 인도, 남아공, 이집트 대사관을 천천히 지나 갤러리바톤의 그날 첫 관람객으로 들어갔다. <Off the Beaten Track - 당신이 가보지 못했던 길>이라는 전시의 제목이 얼룩 하나 없는 유리창에 작고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알록달록한 피카츄가 꽉 채운 아이스크림 가게의 창과는 대조되는 여백과 투명함이었다. 넓지 않은 전시장에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에 낮은 신발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따각따각 울렸다.
미술관의 새하얀 벽에 비치고 있는 것은 밀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늪지대의 영상이었다. 새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늪지대의 푸르름을 감상하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다보니 잠시 후 작은 콰르르 소리가 나면서 나무 한 그루가 천천히 물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공중에서 나무를 지탱하던 와이어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 d야, 저 나무 가짜였어. 엄마, 그러네요, 가짜였네요.
곧이어 가짜나무 뒤에 가려져있던 잔가지의 나무들과 푸른 하늘도 화면에서 뚝 떼어지는가 싶더니 물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처럼 낮은 쿠르릉 소리를 내며, 사실은 액자였던 하늘과 나무가 물밑으로 다 가라앉았다. 액자와 설치물이 가라앉은 그곳에는 아까와 크게 다를 바도 없는 나무들이 서있고, 설치물들을 삼킨 물결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일렁였다. 엄마 저기 남은 풍경은 진짜일까요? 5분도 안되는 동안 두 번에 걸쳐 속은 모자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으나, 영상은 끝났고 풍경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조금 얼얼해져서 갤러리바톤을 나온 대기번호 398번의 모자는 두 나라의 대사관을 더 지나 타데우스 로팍으로 향했다. 좁은 대지에 이 각, 저 각으로 비틀어 중정까지 만들어낸 근사한 건물이 보였다. 타데우스 로팍은 이 건물 2층에 자리잡은 세계적인 갤러리 체인의 아시아 내 첫 분점이다.
이곳에서 한참 전시 중인 젊은 작가 올리버 비어의 회화에는 붓질의 흔적이 없었다. 큰 스피커 위에 캔버스를 두고 푸른빛 안료를 뿌리면 안료는 음파가 진동하는대로 캔버스 위에 춤추듯 무늬를 만들었다. 그렇게 생겨난 무늬에 작가는 다양한 이름을 붙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두 소년, 이상한 열매, 끝없는 몸짓.
s는 미술관에 아이를 데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이론이나 배경지식 없이 아이가 아이의 시선으로 그림에 이름을 붙이는 천진한 순간을 사랑했다. 어느 한 군데 얼룩이나 어긋남이 보이지 않는 딱 떨어지게 깨끗하고 고상한 공간에서 예술가의 세계에 몰입해보는 귀한 경험을 선물해줄 수 있다는 것도 뿌듯했다. 심지어 아주 싸고 쉬웠다. 서울은 대중교통으로 닿지 못할 곳이 없었고, 불과 20년 전만해도 발품팔아 미술관에 다니거나 월간지를 구독해야 구할 수 있었던 고급정보들이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넘쳐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갤러리는 관람료를 받지 않았다.
소리의 파동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푸른 작품 앞에서 아이가 입을 뗐다.
“엄마 이건 마치…”
포켓몬 팝업스토어가 한남동 독서당로 이 거리에 있지 않았다면, 예를 들어 창신동 완구거리나 강남 뱅뱅사거리 같은 곳에 있었다면 s는 아무리 아이가 원했어도 굳이 200미터의 줄을 서서 빵셔틀 대기표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s는 대기 시간에 갤러리를 순회할 수 있는 이곳에서 피카츄보다 더 심오하고 그윽한 세계를 아이가 기억해주길 바랐다. 띠부띠부씰 때문에 왔다고는 해도 푸른 안료가 그린 파동의 아름다움에 잠식되길 바랐다. 캐릭터의 구체성에서 추상화의 영속성으로 아이의 세계가 확장되길 바랬다. 더불어 그는 아이와 전시를 보고, 집에 돌아가서 맥주를 한 잔 하며 sns에 한 줄 적고 싶었다. #독서당로 #포켓몬하이브시티 #타데우스로팍 #갤러리바톤 이라고. 그 게시물에서 s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포켓몬빵도 구해줄 수 있는 좋은 엄마가 되는 동시에 양질의 문화경험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있는 엄마가 되어 찬사의 “좋아요”를 이십개 정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포켓몬 같네요.”
아이의 뜬금없는 말 덕분에 s는 고상하게 시작해서 속물적으로 이어지는 잠깐의 꿈에서 깨어나 주의를 돌렸다.
“뭐? 포켓몬?”
“포켓몬 기술 중에 파동이 있거등요? 악의 파동은 오라를 발생시켜서 상대를 풀죽임 상태로 만드는 거에요. 웬만한 녀석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어요. 물의 파동 기술도 있는데 물의 진동으로 공격하는 거에요. 완전 대박인데 위력이 60 정도 되거등요. 최강 특수기 용의 파동도 있는데… 아 그리고 음뱃이라고 귀에서 한 20만 헤르츠 초음파 발생시켜서 상대 죽여버리는 포켓몬도 있어요. 맞다, 나 걔 카드 있는데. 이 그림은 물의 파동 공격기술이랑 쫌 닮았네요. 그런데 엄마 우리 입장 시간 얼마나 남았을까요?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른데.”
* 11시 40분
등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대기번호 200번이 입장하고 있었다. 잠시 자아도취되어있던 s는 방언같은 포켓몬 연설을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타데우스 로팍을 나와 포켓몬빵 구매대기자 398번으로 돌아왔다. 게임 상대를 죽여버리는 일에 대해 그토록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는 아이를 보자니 어쩐지 급속도로 기운이 빠졌다. 정오 즈음의 볕은 더 강렬해졌고, 이제 와서 편의점에서 깔고 앉을 박스를 구할 수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그들은 뒤늦게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평소 옆구리에 맥북을 끼고 오는 조용한 1-2인 고객이 대부분이었던 이곳 스타벅스는 이미 초토화가 되어 초등학교 앞 무지개색 슬러시를 파는 문방구처럼 변해있었다. 먼저 온 아이들이 흘린 빵가루와 띠부띠부씰을 떼어낸 쪼가리들이 카페 바닥에 백사장의 모래처럼 흩어져있었다. s와 아이는 간신히 구한 구석 자리에 의자를 하나 끌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s는 사과주스와 빵가루로 범벅된 테이블을 닦아내고 포켓몬고 게임 좀 하면 안되냐는 아이에게 핸드폰을 던져주었다. 그제서야 아침 나절 다른 건물에 던져두었던 차가, 그리고 주차요금이 걱정되었다.
계산해보니 입장까지 두 시간은 족히 더 기다려야했다. s는 게임하는 아이를 카페에 두고 나와 광주요 건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골목 깊숙히 한남더힐의 전경이 힐끗 보였다. 테라스는 서로의 조망권을 해치지 않도록 어긋나있었고, 공동주택같지 않은 독창적인 형태로 우아하게 여러 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s는 갑자기 오늘 들렀던 유수의 갤러리들이 문을 활짝 열어둔 것은 실은 매매가 100억을 호가하는 한남더힐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갤러리보다 더 갤러리같은 거실 공간에 그들은 좋은 안목으로 고른 수천-수억 짜리 그림을 걸어둘 것이다. s가 남의 건물 앞에 되는대로 주차해놓은, 남편의 형한테 공짜로 물려받아 20년이 다 되가는 구형 그랜저를 팔아치워도 아마 그가 오늘 본 그림들의 단 한 귀퉁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은 붉어졌지만 s는 뭐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물질적 성공에 삶의 전부가 걸려있다고 20년 전 졸업한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
띠딕.
멀리서 차키 버튼을 누르자 출근한 발렛파킹업체 직원이 아스팔트 열기에 인상을 찡그리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지금 나가시는 거에요? 여기 몇 시에 주차하셨어요?”
s의 머릿속에서, 학교에선 배운 적 없는 본능적 계산기 두드리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9시 20분에 주차했지만, 직원은 그 때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어 잘은 모르겠는데… 한 10시였던 것 같은데요?”
“제가 9시 반에 출근했는데, 그 때 이 차 있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거 포켓몬 때문에 일찍 오셔서 여기 주차하신거죠? 어쨌든 시간당 5천원씩이니까 만원만 주세요.”
s는 거짓말이 들킨 것이 3초 정도 부끄러웠지만, 피차일반이라고 생각했다. 직원은 큰 인심쓰듯 만원”만” 이라고 했지만, 사흘 전만 해도 이곳 발렛파킹비는 시간 당 4천원이었다. 포켓몬 스토어에 줄서는 사람들을 특수로 사흘 새 천원씩을 올려받는 일이 s의 거짓말에 비해 크게 떳떳한 일 같지 않았다. 스타벅스 건물에 다시 차를 대고 아이에게로 갔더니, 게임에 열중해있던 아이는 엄마가 온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3시 30분
드디어 대기번호 397번이 들어갔다. 대기표가 한 장이기 때문에 s는 매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에게 신용카드를 쥐어주며 포켓몬빵과 사고 싶은 작은 인형 꼭 한 개만 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진도 많이 찍어오고 구경을 잘 하고 돌아오면 엄마와는 1층 도넛 가게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대기번호 398번 고객님!”
아이는 신용카드가 든 크로스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콘서트 무대로 나가는 독주자처럼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계단을 올라 포켓볼이 잔뜩 그려진 빨간 문을 밀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소소한 감정의 부침이 있었으나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독서당로를 산책한 초여름의 토요일이 나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진 않았다. s는 늘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주차비는 금세 잊었다. 아이도 그렇게 좋아하던 포켓몬 매장에 왔으니 실컷 구경하고 만져보고 엄마 최고에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내려오겠지. 상상하니 흐뭇했다. 그는 다시 좋은 기분으로 1층 도넛 가게에 들어가 아이를 기다리며 피카츄와 파이리 모양 도넛 네 개를 골라 포장했다. 그 때 아이에게 쥐어준 신용카드 결제문자가 도착했다.
하나카드 7*5* 45,000원 일시불
05/28 13:33 배스킨라빈스 하이브시티
4천5백원을 잘못 봤겠지, 아무리 보아도 4만5천원이었다. 그는 궁금함을 지나쳐 화가 났다. 애초에 열 살 짜리 아이에게 제한없이 신용카드를 쥐어준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이렇게 비싼 굿즈를 덜컥 살 수 있다고? 스타벅스 커피값과 도넛 네 개의 값과 주차비를 더하니 10만원이 채워졌다. 바로 옆 경사진 골목에 있는 고급 아이스크림집 아이스크림 소사이어티에서 훌륭한 재료로 만든 온갖 맛의 아이스크림을 사먹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s가 5분 정도 더 혼자 내적 분노를 삭히고 있을 때, 뜻밖에도 아이가 내려왔다.
“아니 네 시간을 기다려서 들어갔는데 왜 벌써 나와? 너 들어간지 10분밖에 안됐어.”
“엄마.. 자판기에서 포켓몬 빵 하나 뽑고, 인형 하나 샀더니 더 볼게 없던데요?”
아이의 손에는 작은 인형이 한 개 들려있었다.
“그 인형이 얼마야?”
“4만5천원이요…”
s는 오전에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마음 속에서 가짜 나무가 쿠궁쿠궁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포켓몬스터가 그려진 삼립빵 한 개와 얼토당토않은 가격의 인형 하나를 얻으려고 긴 줄을 서서 소중한 토요일과 십만원을 써버린 것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기분을 만회해야했다. 머릿속에서 자꾸 쿠궁쿠궁 소리가 났다. 가짜 풍경들이 겹겹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한남동에서 동쪽으로 틀어 집으로 돌아오는 강변북로 위에서 그는 뒷자석의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낡은 차의 엔진소리를 이기려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d야, 들려? 엄마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우리 오늘 간 가게가 베스킨라빈스 매장이잖아. 배스킨라빈스랑 파리바게뜨랑 던킨도너츠는 사실 다 한 개의 그룹에서 운영하는 회사야. 그룹 이름은 SPC야. 그런데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대. 빵만드는 사람들은 필요한 휴가도 잘 쓸 수가 없고, 화장실도 못가고,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왔나봐. 그래서 한 직원분이 회사에 요구를 했대. 기본적인 권리를 챙기며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회사가 들어주지 않았더니,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단식 선언을 했대. 그리고 아무 것도 먹지 않은지 50일이 지나서 그 사람의 건강에 큰 위협이 올 때까지도 회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대.”
s는 말하면서도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계속 화가 났다. 그는 SPC와 임종린 회장의 대치상황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에도 SPC 제빵사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제 스스로 토요일 반나절을 그 회사의 빵을 사느라 바쳐놓고는, 반나절의 바가지를 톡톡히 쓴 다음에야 화풀이삼아 아이에게 이 사실을 늘어놓고 있었다. s는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이 장면을 통해 등장인물 중 가장 저열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느꼈다. 알면서 외면한 죄, 다른 이유로 면피하려는 죄, 작은 아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죄, 외면하던 사실을 이제와 끌어들여 쉽게 정의로운 척하려는 죄. 스스로가 저열하다고 느낄수록 말은 더 길어졌다.
“엄마는 네가 너무나 포켓몬을 좋아하니까 한 번은 와서 구경시켜주고 싶었어. 그런데 이제 네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아. 엄마는 빵 만드는 분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은 걸 알면서도 SPC 빵이랑 아이스크림을 우리가 계속 사먹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물론 너에게 강요하진 않을게. 네 판단에 맡길게. 네가 포켓몬빵을 계속 구하고 싶다면 그건 네 결정이지.”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s는 계속 늘어놓았다. 그는 저열하게 정신승리를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흣, 한남더힐에 사는 사람들 중에 SPC 불매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아이와 함께 이 이야기를 해볼 사람은? 바가지 쓴 비싼 인형 때문에라도 갑자기 정의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엄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당연히 안사야죠. 아주 나쁜 사람들이네. ……이제 띠부띠부씰 안살래요. 그런데… 오늘 산 도넛까진 먹어도 되죠?”
에어컨을 아주 세게 틀었지만 달궈진 차의 온도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고, 상자 속 피카츄 도넛의 노란 초콜렛 코팅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두무개길 아치 옆으로 초여름 한낮의 새파란 하늘이 깜빡깜빡하며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s의 마음에서 아주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소리가 울렸고, 푸른 코팅이 된 백미러를 흘끔 쳐다보자 넓게 벗겨진 이마 위로 파란 안료가 요란하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