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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그림책 여행]유붕자원방래

아이와 함께 한 특별한 일본살이

by 연화향

누군가에게 엽서를 받아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낯설고 벅찬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림부터 보고 글자를 읽겠지만, 난 글자부터 읽은 다음 그림을 보는 편이다. 또 어떤 이는 엽서부터 보고 다른 일들을 하겠지만, 난 할 일을 마치고 주변을 정리한 후에 차분히 앉아서 본다. 많아야 250자(실재 세어 봄) 정도로 쓰여 진 글씨를 한 자라도 놓칠까봐서. 또 행간의 의미나 여백이 주는 느낌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런 다음 그림을 보며 왜 이 엽서를 골랐는지, 고를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마지막으로 애써 손으로 글씨를 쓰고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넣었을 그 누군가의 발자취를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답장을 쓸때는 엽서를 보낸 이가 했던 것처럼 마음에서 할 말을 고르고, ‘이거야!’ 라고 느껴지는 엽서에 얹어 받는 이의 표정을 상상하며 보낸다. 그때의 기쁨이란!

이렇게 엽서의 행복을 알려준 이가 바로 알모책방4을 11년째 지켜오고 있는 알모다. 그녀가 나와 해인에게 각각 보내왔던 엽서들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크나 큰 위로가 되었다. 답장을 쓸때, 해인과 나 사이엔 별난 이야기꽃이 핀다. 해인은 그동안 사 모은 엽서들을 펼쳐 놓고 보낼 사람과 가장 닮은 하나를 고르곤 했다.


1월의 끝자락에 알모가 도쿄에 왔다. 한국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들린 책방에서 알모는 해인에게 도쿄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그림책 작가 미로코 마치코(みろこまちこ, 1981~) 원화와 다시마 세이조(田島征三, 1940~)의 작품을 보기 위해 왔다. 알모는 그림책 작가이자 번역가인 엄혜숙1씨와 그림책 번역가인 이지원2씨와 동행했다. 알모를 만나는 것도 기쁜데 평소 좋아하던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니 지금도 꿈만 갔다. 난 도쿄에서 친구가 된 그림책테라피스트 김보나3씨와 일정을 같이 하고 싶었고, 그렇게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행팀이 꾸려졌다.


첫 날은 알모와 셋이서 미로코 마치코 원화를 보기 위해 세타가야문학관(世田谷文学館)에 갔다. 문학관은 한적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지는 주거지역에 위치했다. 문학관의 첫 인상은 넓고 밝고 따듯했다. 우리는 관내 까페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음식은 정갈하고 깔끔했으며 커피는 기분을 북돋아 주었다. 미로코 마치코는 일본에서 처음 알게 된 그림책 작가인데 강렬하고 거침없는 화풍과 풍부하고 과감한 색감이 인상 깊었었다. 화가이기도 한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들은 생각보다 컸다. 전시공간의 한 벽을 채울 만큼 큰 것도 여럿 있었다. 그림책에서 보았던 인물이며 동물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그 압도적인 에너지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들을 대하는 해인의 표정과 몸짓도 보통 미술관에서와 달랐다. 연신 내 손을 끌고 다니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조잘거렸다. 그림책 작가가 이렇게 크고 많은 원화를 그려 낼 수 있도록 뒷받침이 되는 배경과 문화가 부러웠다. 그림책 작가의 작품들을 규모 있고 비중 있게 전시할 수 있는 환경과 수준도. 전시를 보고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책이 궁금했던 우리는 관내에 마련된 도서관에서 맘껏 보았다. 그때 알모가 특히 좋아했던 그림책은 2018년 엄혜숙씨가 번역을 하여 <내 고양이는 말이야>로 출판되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타가야문학관과 감흥이 남달랐던 그림들을 뒤로하고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 1931~) 전시를 보러 오페라시티로 갔다. 그의 그림책 원화를 기대했는데, 작품 전반을 다룬 전시다 보니 일본어를 모르는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려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픈 다리를 쉴 겸 우연히 들른 베이커리 까페, 르 팽 쿼티디엥(Le Pain Quotidien)은 다시 찾고 싶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입이 즐거운 가운데 알모가 풀어 놓은 이야기보따리엔 위로도 응원도 희망도 있었다.


이틀째 일정은 도쿄 치히로미술관(ちひろ美術館・東京)에서였다.

그림책을 통해 알았고 평소 좋아하던 작가를 강단에서가 아니라 타국에서 여행자로 만난다는 설렘은 해인보다 내가 더 컸다.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순간,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음만큼 벅차고 긴장되었다. 결국 나와는 달리 덤덤한 해인을 작가들 앞에 세우고 억지로 인사를 시켰다.

이지원씨 덕분에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직접 전시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그림책 100년의 흐름’이란 기획 전시였다. 처음엔 잘 따라오던 해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림 하나를 왜 그렇게 오래보는 거야? 지켜워! 난 뭘 좀 먹을래!” 왜 아니겠는가! 해인은 까페에서 다과를 즐겼고 덕분에 나도 잊었던 모닝커피를 마셨다. 이곳 미술관은 이미 한 차례 왔던 곳이어서 해인과 나에겐 여유가 있었다.


다음 일정은 다시마 세이조의 작품이 전시된 21_21디자인사이트(DESIGN SIGHT)다. 이 전시관은 도심 속 녹지를 이루고 있는 미드타운 가든 안에 자리했다. 설계를 맡은 안도 타타오(安藤忠雄, 1941~)는 뒤쪽으로 늘어선 키 큰 삼나무를 배경으로 최대한 자연 경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바닥 면적의 80%를 지하에 매설했다고 한다. 지상으로 보여 진 정도로만 생각했다가 지하에 마련된 갤러리 규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시마 세이조의 작품은 ‘야생전(野生展, Wild : Untamed Mind)’이란 주제로 전시되었다. ‘짐승의 울음 소리(獣の遠吠え)’라는 제목의 그의 작품은 목련열매에 일일이 아교를 붙여 만든 것이었다. 작품의 규모가 큰 것에 놀라고, 그 정교함에 한 번 더 놀라고 역동성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림책 작가로만 알고 있던 다시마 세이조를 다시 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길들여 지지 않은 마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이 날것이 너무나도 생경해서 차마 마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창조란 우리 안의 살아있는 야생성을 한껏 끌어 올리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전시 보기를 참 잘했다.


어느 덧 해가 지고 있었다. 처음의 설렘과 긴장은 아쉬움으로 바뀌었고 곧바로 추억으로 넘어갔다. 그림책을 쓰고, 번역하는 작가와 그림책을 파는 책방지기와, 그림책테라피스트와 그림책을 좋아하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한 이틀간의 그림책 여행. 그 끝은 유쾌하고 풍요로웠다. 그림책을 넘어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던 작가의 순수함과 열정 그리고 진실함은 내안의 그것들을 일으켜 세울 만큼 울림이 컸다. 내가 꾸는 꿈을 이루게 하는 힘이 되었다.



<함께 찾아가기 좋을만한 곳>


*세타가야문학관(世田谷文学館): 오전 10시 ~ 오후 6시 (입장은 오후 5시 30 분까지, 월요일 휴무)

주소: 〒157-0062 東京都世田谷区南烏山1-10-10


*21_21디자인 사이트(21_21DESIGN SIGHT): 오전 10시~오후 7시(화요일 휴무)

미드타운의 디자인 사이트에서 롯본기 국립신미술관, 롯본기힐즈의 모리 미술관이 도보로 각 10분과 20분 거리에 있다. 원하는 전시를 선택해서 관람하면 되는데, 마지막 일정으로 모리미술관을 선택한다면 모리전망대에서의 야경까지 즐길 수 있다.

주소: 〒107-6290 Tokyo, Minato City, Akasaka, 9 Chome−7−6 도쿄 미드타운 가든 내


*국립신미술관(国立新美術館): 오전 10시~오후 5시 30분(화요일 휴무)

미술관 규모가 크고 실내에 뒤집어진 원뿔 모양의 구조물이 특별하다. 상설전시는 없고 특별전시만 있다.

주소: 〒106-8558 Tokyo, Minato City, Roppongi, 7 Chome-22-2


*롯본기힐스 모리미술관(森美術館): 연중무휴, 오전 10시~오후 10시(화요일만 5시까지)

일본과 아시아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이 되는 것이 미션이다. 미술관과 전망대 티켓을 함께 구입하면 전시는 물론 도쿄의 시티 뷰도 볼 수 있어 추천한다. 모리 미술관이 하늘과 가까운 미술관이라면 하늘과 가까운 도서관이 49층에 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도서관은 18세 이상만 출입이 가능하다. 회원이 아닌 경우는 일일티켓을 사서 이용할 수 있다. 도쿄 전망을 앞에 두고 책을 보며 차를 즐길 수 있다.

주소: 〒106-6108 Tokyo, Minato City, Roppongi, 6 Chome−10−1롯본기빌딩모리타워 53층


*Le Pain Quotidien 도쿄 오페라 시티점: 연중무휴, 오전 8시~오후 9시

‘일상의 빵’이란 뜻을 가진 베이커리 까페로 사발에 주는 커피가 양도 맛도 만족스러웠다. 빵맛도 고급스러워서 오페라시티를 간다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163-1401 東京都新宿区西新宿3-20-2 東京オペラシティタワー1F


<참고>

엄혜숙1: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으며, 지금은 어린이책에 글을 쓰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어요. <혼자 집을 보았어요>, <세탁소 아저씨의 꿈>, <단 방귀 사려!>, <나의 즐거운 그림책 읽기>,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 등을 썼고, <토마스는 어디에 있을까>외에 수많은 그림책들을 우리말로 옮겼어요.(발췌: 그림책 <나의 초록 스웨터>)


이지원2: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를 졸업하고 폴란드에서 미술사와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고 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어린이책 기획과 연구에 힘쓰며 좋은 어린이책을 소개합니다.(발췌: 그림책 <백조왕자>)


김보나3: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산 지 10년이 더 지났습니다. 동일본대지진을 겪고 그림책으로 치유받은 경험을 계기로 일본의 그림책테라피스트 협회에서 인증받은 한국인 1호 그림책테라피스트가 되었습니다. 저자이자 스승인 오카다 다쓰노부와 함께 이 책을 구성하면서 글의 일부를 쓰고 번역도 하면서 작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발췌: 도서 <그림책테라피가 뭐길래>)


알모책방4(AlmoBook, 어린이청소년전문서점):오전 10시~오후 6시 30분(일요일 휴무)

올해로 10년이 넘은 알모책방은 해인이 여섯 살 때부터 찾은 곳이다. 좋은 그림책을 추천 받으며 육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 해인도 나도 좋은 벗들을 만난 곳이다. 알모책방은 책을 파는 것 뿐 아니라 작가와의 만남을 비롯해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책을 바탕으로 한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주소: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로 196번길 7-7


세타가야문학관 입구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풍경.
미로코 마치코 전시장 입구에서 알모와 해인.
미로코 마치코의 라이브 페인팅으로 완성된 그림. 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영상으로 볼수 있었는데 이를 따라하는 해인.
문학관 내 도서관. 안쪽으로는 그림책과 아동문학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별도로 마련된 공간이 있었다.
치히로 미술관 특별전 관람 중. '왜 이렇게 한 그림을 오래 보는 거야?' 하는 해인 표정.
미술관 내 까페에서 지루함을 달래며 팬케익을 먹는 해인.
치히로 미술관 뮤지엄숍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엄혜숙 작가. 내가 쓴 글을 보고 출판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그녀 덕분에 난 포기하지 않고 꿈 꿀수 있었다.
치히로 미술관에 갈 때마다 꼭 들리는 가게. 사탕부터 젤리까지 온갖 군것질 거리를 판다. 허리가 90도로 굽어진 할아버지가 주인이다. 해인과 알모.
오른쪽 뒤로 디자인 사이트가 보인다.
디자인 사이트 가는 길에 미드타운 가든에서 재미있는 뭔가를 발견한 해인.
다시마 세이조 작품. '짐승의 울음소리'
다시마 세이조 원화와 설치 미술품 관람 후에 그림을 그리는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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