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한 특별한 일본살이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사랑한 가마쿠라는 도시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 할 만큼 곳곳에 명소들이 많다. 덕분에 네 차례나 방문을 했음에도 여전히 갈 곳이 남아 있었다. 특히 그림책 작가의 미술관과 그림책방이 보고 싶어 이번 여행은 기타가마쿠라역(北鎌倉駅)에서부터 시작했다.
가마쿠라의 여행은 기타가마쿠라에서 시작하라는 말이 있다. 왜일까?
기타가마쿠라역에 도착하자 관광객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승객이 내렸다. 그들을 따라 커지는 기대감을 안고 나와 해인도 플랫폼에 내려 개찰구를 향했다. 내가 타고 온 기차가 우리 곁을 지나 멀어져 갈 때 쯤, 뒤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예스러우면서도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는데, 내가 늘 그리워하던 먼 기억 속 어딘가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설레었다. 이 때문일까? 역을 나와 기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사찰을 안내하는 간판이 보인다. 가마쿠라시대 말기, 선종(禪宗)사찰에 대한 등급제도에 따라 1 위인 "겐초지(建長寺)"를 비롯하여, 2 위인 "엔카쿠지(円覚寺)", 4 위인 “조치지(浄智寺)”가 이곳 기타가마쿠라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선종을 대표하는 사찰들을 품고 약 800년을 이어 오면서 형성된 전통과 문화가 지금의 기타가마쿠라의 모습을 만들었으리라. 가마쿠라 여행의 시작점이 왜 이곳인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그림책 작가 *요 쇼메이(葉祥明)의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니 어떤 모습일 지 몹시 궁금했다.
기타가마쿠라역에서 1분 거리인 엔카쿠지는 가을 단풍이 고울 때, “교텐자젠카이(暁天坐禅会)”라고 하는 명상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리라 마음먹고 ‘요쇼메이미술관(葉祥明美術館)’부터 찾았다. 가는 길에 만나는 특색 있는 가가호호는 미술관을 찾는 여정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어디선가 어눌하면서도 무척이나 사랑스런 재잘거림이 있어 돌아보았다. 색이 고운 유카타를 입은 꼬마 여자 아이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에게 얘기하는 듯 했다. 차분하게 들어주는 엄마와 딸의 모습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중세 일본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해인과 함께 넋을 잃고 보다가 아쉽게도 카메라에 담는 것을 잊었다. 조금 헤매다 역에서 7분 거리인 요쇼메이미술관에 도착했다.
‘요 쇼메이(Yoh Shomei, 1946년~)’는 환경과 평화, 인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 혹은 체험하면서 깨달은 바를 그림책에 담아내는 작가이다. 1990년 <바람과 표범>으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그래픽 상을 수상했으며, 1996년 '난민을 도와주는 모임'의 세계 지뢰철거 캠페인에 참가한 후, 그림책 <서니의 소원 - 지뢰가 아닌 꽃을 주세요>를 출판하였다. 나에게는 밀렵 군에게 엄마를 잃은 아기코끼리 ‘엘리너’를 비롯하여 야생동물보호소에서 아기코끼리들을 돌보는 ‘다프네’의 실화를 담은 <아프리카의 기적>이란 그림책이 있는데 감동이 컸던 책이었다. 내가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마침 요 쇼메이 그림책 원화전이 열리고 있어서 그의 그림을 맘껏 볼 수 있었다.
1층 갤러리에 전시된 요 쇼메이의 그림들은 그만의 특유한 화풍을 최대한 느껴볼 수 있는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득한 색감과 부드러운 질감, 자연과 사람을 최소로 간결하게 그림으로써 많은 여백을 남기는 그의 그림에선 느림의 미학이 느껴졌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그림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연은 원래 이런 모습이었고 이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동화 작가인 **야마세 타카시(やなせたかし)는 쇼메이의 그림을 보고 “공기를 그린다.”라고 표현했는데 이해가 되었다. 그림 속에 부는 바람이 내 옷자락을 흔드는 것 같았다. 차분하게 명상에 든다. 버려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들,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그리움, 점점 또렷해지는 내 존재감,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의 내 삶과 시간...
이런 그림 위에 울림이 깊은 글을 올리고 마지막에 “너는 어떠하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쇼메이의 그림책들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 독자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갤러리 책상에 놓인 그의 그림책들을 한 권 한 권 해인에게 읽어 주었다. 그중에 해인이 선택한 건 <별이 된 시로>다.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 실험의 대상이 된 시로는 척추 신경이 많이 잘려 나갔다. 이로 인해 아픈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개의 이야기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가슴이 참으로 먹먹했지만 한편 마음을 깊이 울리는 감동과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아래 서평, '공감이 자라는 그림책'에서 자세히)
쇼메이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미술관에 대해 “미술관은 그 자체가 한 권의 그림책입니다. (중략)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집처럼 쉴 수 있습니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의 바램대로 미술관은 편안하게 그림과 책을 즐기며, 몸도 마음도 한 템포 쉬어 갈 수 있는 내 집 혹은 내 방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 요 쇼메이(葉祥明, 1946~)
1946년 일본 구마모또 시에서 태어났다. 1972년 처음으로 창작 그림책 <나의 벤치에 하얀 새>가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에서 발간되었으며, 1990년 <바람과 표범>으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그래픽 상을 수상하였으며, 1996년 '난민을 도와주는 모임'의 세계 지뢰철거 캠페인에 참가하여 그림책 <서니의 소원 - 지뢰가 아닌 꽃을 주세요>를 출판하였다. 그밖에 1991년 기타가마쿠라에 요 쇼메이 미술관을 개관했으며, 1992년 우정성(郵政省)의 기념우표의 오리지널 캐릭터에 'JAKE'가 채택되었고, 1999년 창작 그림책 <숲이 바다를 만든다>로 비바가라스 상을 수상했다.
** 야마세 타카시(やなせたかし, 1919~2013)
애니메이션 호빵맨(アンパンマン) 작가. 요 쇼메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동화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엔카쿠지(円覚寺)
가마쿠라 막부 1282년에 원나라와의 전쟁으로 희생된 전사자를 애도하고 선종을 전파하기 위해 창건된 절로서 '좌선(座禅)'을 기본적인 수행 형태로 삼는 임제종(臨済宗)의 절이다. 석가 여래 좌상이 불전에 안치되어 있고, 국보로 지정된 '사리전(舎利殿)'과 '홍종(洪鐘)', 에도 초기의 그림을 바탕으로 2000년에 정원과 혼합된 형태로 복원된 연못 등이 볼거리다. 경내가 크고 수목이 울창하여 산책하기 좋은 절로 알려져 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이루어지는 ‘교텐자젠카이(暁天坐禅会)’ 즉, 새벽녘 좌선회는 추천 할만하다.
주 소: 〒247-0062 鎌倉市山ノ内409
영업시간:(3월〜11월) 오전 8:00〜오후 4:30 (12월〜2월) 오전 8:00〜오후 4:00
웹사이트: http://www.engakuji.or.jp/top.html
* 요 쇼메이미술관(葉祥明美術館)
주 소: 〒247-0062 神奈川県鎌倉市山ノ内318-4
개관시간: 10 : 00 ~ 17 : 00(연중 무휴)
웹사이트: http://www.yohshomei.com/
* 찻집 하날레이(Kita Kamakura Hanalei, 北鎌倉 茶房花鈴)
기타가마쿠라역에서 가까와 더위를 피해 들어간 곳. 깨끗하면서도 깔끔하며 작은 정원을 가진 찻집이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고즈넉한 시골 풍경과 마주한다.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도 보이고, 한 번씩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정겨웠다. 찻집에서 직접 구워 나오는 떡구이는 쫀득하고 달콤했고, 금가루가 토핑된 일본식 팬케익은 단팥과 잘게 썬 채소 샐러드가 곁들여 졌는데, 음식의 구성이 새로웠고 맛의 궁합도 좋았다.
주 소: 〒247-0062 神奈川県鎌倉市山ノ内395
* 겐쵸지(建長寺)
일본 최초의 선종(禅宗) 전문 사원으로 최고 전성기에는 1,000명을 넘는 수도승이 있었다. 앉은 높이가 약 2.3m로 받침대를 포함하면 5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인 '지장보살 좌상(地蔵菩薩坐像)'과 법당 천정에 그려진 천정화 운류즈(雲竜図), 호조 정원(方丈庭園) 등이 볼거리다.
주 소: 〒247-8525 神奈川県鎌倉市山ノ内8
영업시간: 연중 무휴 8:30-16:30
웹사이트: http://www.kenchoji.com/
* 에노시마(江の島)
에노시마는 그 역사가 552년부터 전해 내려오는 에노시마 신사(江島神社)를 비롯하여 에노시마 이와야(岩屋) 동굴, 씨캔들전망대와 에노시마 수족관, 고양이 등으로 유명하다. 먼저 에노시마역에서 섬으로 가기 위한 거리에는 식당과 까페들이 늘어져 있다. 라면 맛집 하레루야(晴れる屋)를 비롯해 직접 커피 콩을 볶는 커피전문점, 이탈리안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 골동품점, 오래된 양갱전문점과 한국식당까지. 개성있는 식당과 까페들이 볼거리를 준다. 다리를 건너 에노섬에 들어서면 지역 명물인 잔멸치, 시라스(しらす)가 들어간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씨캔들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이 일품이며, 날이 좋은 날엔 붉게 물든 태평양 바다 위에 우뚝 선 후지산도 볼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