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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믕됴 Jul 16. 2023

선물 주기 제일 어려운 사람 1

버릇 단단히 망쳐놓기



나는 무슨 물건이든 살지 말지 결정하는 건 시원시원하게 하는 편이다. 오래 고민하는 것도 시간과 에너지라는 비용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쉽사리 결정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분야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게 선물이다.


내가 상황과 사람에 적당한 선물을 고르는 걸 어려워하는 원인은, 당장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를만큼 심각한 취향과 안목의 부재에 있다. 절약이 몸에 밴 생활을 하다보니 나에게 주는 선물도 제대로 골라본 적이 없다. 내 선호와 취향은 항상 가장 후순위의 기준이었다. 최우선 순위는 예산이었고.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데 남이 원화는 걸 예측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100일을 앞둔지 얼마 안 됐을 때, 영화를 보러 예랑이와 백화점에 갔다. 영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영화관은 높은 층에 있었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도, 북적거리는 것도 싫어해서 엘리베이터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한 층 씩 올라가다 문득 예랑이가 말했다. 지갑 보고 갈까?


기념일이 얼마 안 남았고 나도 선물을 찾아보던 중이었기 때문에 제안의 의도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런데 나는 쇼핑이 싫다. 정확히는 내가 물건을 고를 때 누군가 지켜보는 것이 불편하다. 내가 바보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도, 그 과정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싫다고 할 적당한 이유를 대지 못해서, 내가 못난 모습을 보여주기 제일 싫은 사람과 함께 반짝거리는 지갑들을 구경하게 됐다.


무슨 브랜드에 어떤 지갑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예랑이 손을 잡고 층을 한 바퀴 돌았다. 성의 없이 훑어보긴 했지만 역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뭐가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입으로는 계속 뭔가 맘에 드는 것처럼 말하긴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봐서 머리가 아프다면서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은 영화나 보러 가자며 예랑이 손을 잡아 끌었다.


영화관이 있는 층까지 와서 팝콘을 하나씩 주워먹으며 한숨 돌렸다. 무사히 넘겼나보다 하고 안심하고 있는데 예랑이가 자기 핸드폰으로 지갑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밝은 베이지색의 깔끔한 단지갑이었다. 적당히 고급스러워서 너무 애같지도,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반듯한 디자인과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내 반응을 보고 예랑이도 만족스러워했다. 예랑이는 항상 내 반응을 보면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예랑이가 선물한 지갑은 실물이 더 예뻤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내가 가진 물건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다. 선물 자체보다도 더 나를 기쁘게 한 건, 나도 몰랐던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든든함이었다. 선물은 그 증거일 뿐이었다.


나는 선물 주기를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선물로 기쁘게 하기도 어려운 사람이다. 나 자신조차도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랑이에게도 그걸 알아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백화점 한 바퀴를 돌면서 반응을 살폈을 거고, 그러고도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결국 골라놨던 지갑 사진을 보여주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런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울고 불고 속상해했던 건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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