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는 아낌 없이
우리 커플은 결혼준비를 시작한 올해 3월 이래로 싸움은 커녕 토라짐 한 번 없이 모든 절차를 순조롭게 진행하는 중이다. 얼른 제대로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결혼준비를 하다 보면 정말 질리도록 싸우고, 실망감과 걱정에 눈물 마를 날 없이 우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우리의 유일한 근심은 언제쯤이면 한 번 싸워보겠느냐하는 것 뿐이다.
결혼준비를 하다보면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정작 '결혼'준비에 들일 시간과 에너지를 남겨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식을 통과의례나 허례허식일 뿐이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내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뽐내고 요란하게 드러내도 괜찮은 날이라니, ENFP 인간에게는 오히려 인생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날이다. 다만 식이 지나가고 나면 평생의 결혼생활이 남아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년 넘는 우리의 결혼준비 과정에서 '결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항목은 두 가지 뿐이라고 생각한다. 신혼집과 혼수.
예랑이와 나는 신혼집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나는 집 주변의 생활 제반 시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선한 식재료를 자주 할인판매하는 큰 마트부터 공원, 다양한 생필품을 사기 좋은 잡화점,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뿐 아니라 각종 병의원이 모두 도보 10분 거리 이내에 있는 아파트야말로 내게 100점 짜리였다. 반면 집이 조금 낡거나 외관상 신축아파트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것은 그다지 흠이 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세련된 신도시의 '임대'딱지 붙은 텅 빈 상가들이야말로 내 기준에 하자 중에서도 대형 하자다.
예랑이는 출퇴근 시간과 집 자체의 편의성을 더 우선했다. 한 뼘이라도 지하철이 가깝고 지옥철에서 보낼 시간을 단 5분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집은 아침잠과 정신건강에 큰 힘이 된다. 요즘 신축아파트는 버튼 하나로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미리 불러둘 수 있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와 식기세척기, 광파오븐이 싱크대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등 소소한 듯 안 소소한 메리트를 잔뜩 갖고 있는데다 세련되고 예쁘기까지 하다.
사실 처음에, 나는 예랑이의 주장에 99% 공감했다. 예전에 딱 한 번, 출퇴근 시간에 강남에서 경기도쪽으로 가는 지하철에 탔다가 역 두 개도 못 버티고 내린 적이 있었다. 지옥이었다. 그 전까지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생판 남과의 거리가 가깝다 못해 몸이 완전히 서로 닿은 채로 꼼짝도 못한다니, 불쾌함을 넘어 공포심마저 들었다. 나를 배려해서 내 직장이 있는 지역에 신혼집을 찾는데, 예랑이가 출퇴근 시간에 당하는 고문을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예랑이가 원하는 단지의 아파트로 하자고 쿨하게 잠정 합의를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1%가 고개를 들었다. 도보 거리에 마트도 없는데 밥은 어떻게 해? 아프면 집 가까이 병원이 있어야 하지 않나? 유지비 때문에 차는 애 생기면 사기로 했는데. 나는 정말로 쿨한 예비신부가 되고 싶었는데, 어떤 1%는 새빨간 색깔이라 도저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그냥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예랑이가 고생하는게 싫은 마음에 그만 제대로 고민도 대화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패스를 외쳤다는 걸. 그걸 인정하지 못해서 쿨한 척 하려고 '어... 저기, 그런데...'를 하지 않으면. 주에 2-3번은 마켓컬리 종이 박스를 분리수거하며 마음속으로 지구에게 사과하고, 급할 때마다 배달 음식을 시켜서 가계부에 크게 빵꾸가 날 게 뻔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어... 저기, 그런데...'를 했다. 이미 땅땅땅 친 합의안에 토를 달아봤다. 예랑이는 다시 양쪽 집을 다 보고 결정하는 데 동의했다. 신축 아파트에서도 도보 거리에 커다란 할인마트가 있다는 중개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자기의 의견에 보태지 않고, 정말 가까운게 맞는지 직접 걸어가보자는 내 부탁에 응해주었다. 그리고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해버린 잠정 합의를 하루만에 엎은 누구누구랑은 다르게, 한치도 아낌 없이 양보를 했다.
예랑이가 그러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싸우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예랑이는 내가 자기 의견에 동의해놓고 뜬금 없이 말을 바꾸는데도 그걸 모두 끝까지 들어줬다. 그러고는 신혼집이라는 중요한 선택에서 양보하면서도, 이건 양보할테니 대신 이건 이랬으면 좋겠다, 저건 저랬으면 좋겠다 하며 토 하나 달지 않았다. 신중하고, 완전하게 양보했다. 덕분에 내게는 부채감 대신 고마운 마음만 오롯이 남았다.
예랑이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기왕이면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나는 예랑이와 있으면 행복하고, 안전하고, 평화롭고, 여유롭다고 느낀다. 그리고 예랑이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양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