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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믕됴 Nov 26. 2023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일기장을 선물하세요.


 나의 회피형 성향의 정체는 강력한 트라우마가 켜켜이 쌓인자리에 곰팡이처럼 피어난 인간불신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선의 가득한 미소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의심한다. 그리고, 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의심을 놓치지 않는 정도의 경계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강아지를 귀여워하더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물릴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내가 타고나기로 낙천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미로 타고났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에게서든 장점을 먼저 찾고, 가장 평판이 나쁜 사람에게서도 참작할 사정을 상상해본다. 타고나기로 나쁜 사람은 없다고, 지치고 병든 사람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낯선 사람과 금방 친해지고 초면인 사람과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애매한 거리를 두는 사람이 됐다. 타인이나 다름 없는 사람의 실수는 쉽게 넘어가지만, 신뢰하는 사람의 실수는 마음에 거스러미로 남겨두기도 한다. 별로 아프지도, 불편하지도 않지만 어쩌다 시선에 닿으면 뜯어내버리고 싶어진다.


 인간관계를 깊고 긴밀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감정에도 방화벽이 생겼다. '보안'에 별 위협이 되지 않는 모든 상호작용은 아주 원활한데, 조금이라도 중심으로 들어오려는 것들은 처리하는 데 한참이 걸린다. 너무 오래 걸려서, 가끔은 기억조차 못한 채로 감정이 먼저 꺼져버리기도 한다.


 나와 나의 성향에 대한 이런 모든 사실들을 알아차리게 된 건, 나 자신에게 일기장을 선물하면서부터였다. 

 지인 소개로 낯선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서, 그 사람과 나의 말과 행동과 그 순간마다 일어났던 감정을 일기장에 적었다.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던 그 모든 트라우마를 뒤로하고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던 순간, 그 모든 불안과 압박감. 강렬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을 정도였다. 몇 년 간을 무시하고 방치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무서웠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현재를 붙잡고 매달렸다. 당장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이 어떤지를 일기장에 적었다.


 일기를 쓰다보니 나름대로의 규칙이 하나씩 생겨갔다. 예를들면, '모르겠다'는 쓰지 않기. 내 감정을 내가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다. 거기에 붙일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고해서 그 정체를 깜깜히 모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형언할 수 없는 건 문장력과 어휘력의 부족이고, 어차피 나만 보는 글인데도 거짓말을 쓰고 싶어지는 괴상스런 나의 심리일 뿐이지, 내가 내 감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쓰고, 쓰다가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면 문장을 쓰는 와중에 중단하고 일기장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거짓말을 안 하려고 했다.


 억지로라도 솔직하게 일기를 쓰다보니 점점 '모르겠다'고 쓰고 싶은 횟수가 줄어들었다.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에 억지로 포장지를 씌우지 않으니 당연히 얼굴을 알아보기 쉬워졌다. 전에 없이 강력한 감정들 때문에 거절과 배신, 버려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고개를 들면 무조건 억지로 눌러놓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사람에 대한 의심이 심하니까, 일부러 안심하려고 애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예랑이가 좋은 사람이라 다행인 지점이다.


 나의 인간불신은 걷어내고 싶어도 깨끗이 걷어지지 않고, 닦아냈다고 생각해도 뒤돌아보면 어느 새 다시 검게 구석 한 켠을 메우고 있다. 그래서 그걸 곰팡이라 부르고 미워하지만, 그게 나를 지키기 위해 어린시절의 내가 만들어낸 방어기제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일기장은 이제 다 자란 내가 그 애에게 건네준 선물이다. 이걸로 곰팡이를 영영 없앨 수 있을지, 그게 언제쯤일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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