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아주 찐득한 관계가.

by 믕됴

남편과 나는 심한 회피형이다. 둘 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문제를 만났을 때 마치 문제가 거기 없는 것처럼 회피하고 싶어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경향성은 그 문제의 종류가 인간관계-특히 연인-와 관련된 것일 때 특히 강하게 발휘되어 왔다. 이상한 건 각자의 직업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는 이런 회피적 성향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삶의 여러 다른 분야에서는 회피 성향이 인생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암시를 수시로 받아서 결국 다듬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이런 성향이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좀 삐뚤어진 풍선효과처럼 다른 방향의 부정적인 감정 반응으로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면 역으로 직장에서 누군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그 사람을 심하게 비난하고 싶어진다. 그 사람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을 하려면 부러 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한지도 벌써 만으로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내 뱃속에는 작은 생명이 움터서 23주차의 하찮고도 소중한 발길질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기지만 건강하게 지켜내고 반갑게 만나려면 많은 끝없는 관심과 무한한 책임, 무조건적인 애정을 필요로 한다. 회피형인 우리 두 사람에게 어쩌면 가장 두려운 존재일 지도 모른다.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관계,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감당 못할 속도로 커져가는 마음의 무게. 서로에게 헌신을, 서로를 독점할 권리를 약속하고 약속받으며 결혼한 우리의 서약도 신성하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임신 기간이 절반을 지나고 배도 꽤나 둥글게 부푼 지금에 와서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내가 이 아기를 강하게 원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일과 일상을 완전히 흩트려 놓을, 남편과 나의 평생을 소요할 작은 아기를. 도대체 뭐에 씌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기를 원하기 시작한 순간 나는 남편에게도 당신의 평생을 갖다 바칠 존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남편도 그 뭔지 모를 것에 같이 씌었는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사실 원래는 적어도 신혼 1년은 즐기다 아기를 가질 생각이었다. 신혼 1년이면, 아직 6개월은 남은 시점이었다. 남편도 처음 한 번은 내게 기존의 계획을 상기시켰다. "그렇긴 한데, 지금 가져도 열 달 기다려야 하잖아. 둘째도 가져야 하는데." 남편은 내 말에 굳이 열 달이나 열 여섯 달이나 큰 차이가 있냐고 토를 달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해주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 우리의 일은 우리끼리 합의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기가 밤새도록 강성으로 용을 쓰고 울어대며 숨이 넘어갈 듯 얼굴이 벌개지면 아마 나는 패닉에 빠져 같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기가 뱃속에 자리를 잡고 크는 동안 꾼 악몽 중에는 그런 건 없었다. 아기가 잘못되는 꿈, 아기가 사라져버리는 꿈에 화들짝 놀라며 새벽에 깬 적은 있지만. 꿈이라는 걸 깨닫고도 꿈 속의 아기와 내가 불쌍하고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아기가 안심하라는 듯 뱃속에서 태동을 몇 번 하고, 남편이 한참을 달래주고 나서야 눈물이 멈췄다.


나라고 내 안에 내재한 상실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공포가 불안형 인간만큼이나 거대하기에, 잃을지도 모르는 관계의 기쁨을 나중에 아쉽지 않을 만큼의 크기로 의식적으로 줄여버리는 것 뿐이다. 깨어있는 동안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일어날지도 모르는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공부하고 준비하면서 임신과 출산, 육아가 무슨 과업이라도 되는 듯이 대하다가도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진짜 공포를 마주한다는게, 이제는 안정형을 획득했지만 역시 본판은 회피형이 맞는 것 같다.


아기는 건강하게 크고 있다. 좋아하던 커피도 끊고-가끔 디카페인을 찾는 날도 있지만- 일부러라도 몸에 좋은 것을 찾아먹는다. 아기가 뱃속에서 꿈틀거릴 때면 한참을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기가 대답하듯 타이밍 맞춰 꼬물거리면 기뻐하면서.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컴퓨터 2대와 책상을 거실로 옮기고 다시 설치한 다음 그 빈 자리에 아기의 방을 만들어놓고 하루에도 몇 번 씩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다. 남편은 아기와 함께 오래도록 살 집은 어디쯤인게 좋을지 고민하며 부동산을 공부하고, 나는 살림을 더 바짝 조인다. 헌신할 책임과 들여야할 수고가 불러오는 배만큼 늘어난다. 이런 걸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질 줄은, 이런 게 기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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