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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Oct 22. 2023

세 번의 임신과 출산

자연주의 출산

"와아~~ 내가 세 아이 아빠라니! 믿어져?"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애를 셋이나 낳다니... 상상은 했지만, 현실이 될 줄은 몰랐어."


남편과 가끔 농담 삼아 주고받는 말이다. 아이가 셋. 둘만 나아도 다자녀 얘기가 나오는 시대인데, 애가 셋이라니 말이다. 여전히, 가끔은 실감 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 세 아이의 엄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첫 아이가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방랑자처럼 살고 있었다. 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하던 상태였고, 공교육 초등교사였던 남편은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무직 상태였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던 우리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으로 때론 각자, 때론 함께 여행을 다니며 즐기고 있었다. (그땐 그게 삶을 즐기는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 말고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주의 출산을 선택한 이유


2016년 1월, 베트남에 도착하고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비행기 멀미를 하는 건가, 물이 안 맞는 건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임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비교적 생리 주기가 일정한데, 소식이 없는 것이다. 남편에게 말하자 최대한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가자 했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장기간의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온 것인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돌아가는 게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게다가 임신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임신이 맞다고 해도 당장 출산할 게 아니라면 여행을 더 이어가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는데,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몸은 점점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해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곤하고, 졸리고, 눕기만 하면 자게 되고, 무엇보다 베트남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베트남 냄새도 싫었다. 입덧이란 생각은 못하고, 베트남 특유의 향신료 탓만 해댔다. 과일로 연명하며 간신히 버티다 보름 만에 귀국을 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먹은 음식이 순댓국이었던가? 한 그릇 후다닥 먹고 나니 비로소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검사하고, 두 줄을 확인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아이의 첫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의 삶'에 들어설 준비를 하게 되었다.


"축하합니다."


임신 확정 소리에 가장 큰 건 놀라움, 그리고 기쁨, 그리고 또 온갖 걱정과 불안들이 몰려왔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출산'이었다. 출산 후기 몇 개를 찾아서 읽어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글로 보며 상상한 출산은 고통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짬뽕 같은 것이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애 낳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남편한테 말했던 것 같다.


"집에서 애 낳고 싶어."


병원에서 낳는 건 무서웠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 딱딱한 침대에 누워 진통을 견뎌야 하는 것

- 수술을 대비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

- 애 낳을 때 찢어질 것을 대비해 회음부를 미리 찢고, 그것을 잘 봉합하기 위해 제모를 하는 것

- 관장과 내진

- 애가 잘 안 나오면 배 위에 간호사가 올라타서 애를 밀어주기도 한다는 것


개 돼지도 이렇게 새끼를 낳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게 정말 사람이 하는 일 맞는 것인가? 그중 가장 끔찍하게 느껴졌던 것이 내진이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시로 내진을 한다는데 더 경악했던 것 같다.


남편도 내 얘길 듣고, 내 기분을 알아주는 듯했다. 하지만 가정출산은 위험이 따른다며, 대안으로 찾은 것이 조산원이었다. 그 당시 남양주에 유명한 조산원을 찾아 상담을 다녀오기도 했다.


 메리 몽간의 <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이라는 책을 남편한테 선물로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남편은 뭔가에 한 번 꽂히면 관련 분야의 상위권 책은 죄다 구입하는 사람이다. <히프노버딩>은 임신과 출산 관련 분야에 있었을 것이고, 임신 기간 내내 책을 보며 살았던 난 그 책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자연주의 출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주의 출산'


이름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연주의 출산에 대해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출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남편과 함께 아이를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출산인 것이다. '자연주의 출산'에서 말하는 황홀한 출산, 평화로운 출산을 할 수 있다면, 집이 아닌 병원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찾아보지 않고, 책에서 찾은 '메디플라워'에서 첫 아이를 낳았다. 둘째와 셋째도 물론이고!





출산의 순간들


첫 출산은 생각보다 당황스러웠다. 제일 당황스러웠던 건 힘주며 밀어내기 하다가 똥 싼 것! 그리고 새벽에 양수가 터졌는데, 양순지도 모르고 한참을 검색했던 기억이 난다. 진통이 오는 것도 모르고 버티다가 남편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다. 그땐 그냥 첫째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둘째 때는 더 심했다. 배가 아주 살짝, 약한 생리통 정도였다. 근데 간격이 너무 짧아서 남편한테 말했더니 당장 병원에 가자는 것이다. 난 첫째 때랑 똑같은 말을 했다.


"아직 버틸만해. 집에서 진통 좀 더 하다 가자."


남편은 첫째 때 경험을 바탕 삼아 '그때가 바로 가야 할 때'라면서 짐을 챙겼다. 그리고 병원에 수속하고 2~3시간 후에 애를 낳았다. 그것도 1층 카페에서 놀다가 갑자기 진통이 심해져서 들어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통하고 낳았다. 첫째에 비해 진행 속도가 엄청 빨랐고, 애가 작아서(2.91 kg) 그런지 엄청 쉽게 낳았다.


셋째는 더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걸? 이렇게 느긋하게 진행되기도 하는 건가. 책에서 봤던 '출산의 정석 코스'를 아주 천천히 밟는 느낌이었다. 세 아이 낳으면서 '이슬'도 처음, 자연 관장도 처음... 또 뭐가 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출산 징후를 하나하나 보여주며 "나 곧 나가요~"라고 알려주기만 했다. 그러다 매운 떡볶이를 먹은 후, 갑자기 진통이 걸려서 출산으로 이어졌었다. 진통이 오기를 기다렸던 시간에 비해 나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밀어내기를 할 때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를 떠올린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도 이렇게 셋을 낳았구나.'


사실, 셋째는 가정출산을 계획했었다. 아이를 잘 낳는 편이기도 하고, 둘째 진행속도가 워낙 빨라서 셋째는 더 빠를 거라는 예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료 취약 지역(시골)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가정출산은 포기해야 했다. 우리 집 아이들 특성상 100% 심한 황달이 있을 것인데, 심하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케어해 줄 수 있는 의료진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첫째와 둘째를 낳았던 그 병원에서 낳기로 결정했다.


한 번쯤은 가정출산을 해보고 싶었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할 수 없게 되었고, 조금 아쉽긴 하다.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받아들이고,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으니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예상대로 황달이 있긴 했지만, 3.22 kg으로 오빠들보다 크게 태어났다.





출산보다 힘든 산욕기


아이를 낳으면 끝인 줄 알았다. 내 몸은 생각도 안 하고, 육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산후조리원은 생각도 안 하고, 퇴원 후 바로 집으로 왔다.


가장 힘들었던 건 첫째 아이를 낳은 후였다. 회음부가 2~3cm 정도 찢어져서 꿰맸는데, 그게 너무 신경이 쓰였다. 회음부 방석을 쓰지 않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무 힘을 주면 찢어질까 봐 항상 조심했다. 그러다 보니 대소변 보는 일이 힘들어 변비가 생겼고, 한 달 정도 고생을 했던 것 같다. 둘째와 셋째 때는 변비가 생기지 않았다. 첫 출산 때보다 덜 찢어져 회복이 빨랐고, 웬만해선 더 찢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생리 기간보다 더 길게 이어졌던 오로 배출. 열 달 동안 하지 않던 생리를 몰아서 하는 기분이었다. 첫째 때는 이렇게 길게 하는 게 맞나 의심했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모유수유를 했기 때문에 오로 배출이 끝나면 무생리 기간이 1년 넘게 이어졌다. 다행이었다. 아기 기저귀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훗배앓이라는 것도 있는데, 첫째 때는 아픈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둘째 때는 약간 아팠고, 막내 때는 좀 많이 아팠다. 배가 찢어질 것 같은 그 통증은 아이가 나오려고 준비할 때 진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늘어났던 자궁이 줄어들면서 제자리를 잡는데, 첫째 때보다 회복이 더뎌서 그런 거라고 했다. 팽팽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 번 불었을 때와 여러 번 불었을 때의 모습을 말이다. 수유를 하면 자궁이 자극을 받아 배가 더 아팠다. 그래도 열심히 수유를 했다. 수유는 자궁 수축에 도움을 주고, 빨리 회복하면 통증도 사라질 테니까.


또 힘든 건... 아마도 밥 챙겨 먹기, 잠자기, 화장실 가기 같은 생존 본능과 관련된 활동들이었다. 아이의 생존을 위해 내 생존을 잠시 뒤로 미뤄야 하는 것, 특히 신생아 때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내 몸을 돌봐야 하는 시기에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건 정말 큰 일이다. 그래서 산후도우미가 있고, 산후조리원이 성행하는 게 아닐까.





임신과 출산이란


세 번의 임신과 세 번의 출산으로 내 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린다. 원래도 근육이 별로 없었는데, 애 낳고 나니 조금 있던 근육마저 다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임신하면서 늘어난 몸무게는 출산 후 한 달 이내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8-9kg 늘었다가 그중 절반은 출산 직후에 빠짐) 모유수유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그때의 몸무게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 중이다. 임신 후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살이 오른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임신이 체질인가 봐."


그런가 보다. 피부는 호르몬 덕분인지 윤기가 돌기도 했고 말이다. 가슴 모양도 예쁘게 팽팽해지고, 입덧도 거의 없고, 생리도 몇 달 동안 안 하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가 조금 부담스럽긴 해도 임신한 몸이 오히려 더 예뻐 보이기도 했다. 또 임신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 정도로 임신은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출산은 또 어떤가.


난 평생을 도망치며 살아왔다. 힘든 일이 생기면 포기하고, 도망치고, 핑계 찾기에 바빴다. 하지만 출산은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잠깐씩 정신이 들 때마다 더 강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그런 과정을 몇 번 거치자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고통을 대신해 깊은 환희가 몰려왔다. 가장 힘든 순간, 더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경험. 내 삶에 전무후무한 일이었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세 번의 출산 모두 마찬가지로 귀하지만, 특히 첫 번째가 더 인상적인 것도 그래서이다. 평생에 처음 겪는 환희와 희열을 그때 느껴봤기 때문이다.


계획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세 아이. '엄마'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채 '엄마'가 되어버린 나. 아이들을 보며 '너희는 왜 나한테 찾아왔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부른 것일까, 아이들이 그냥 찾아온 것일까. 뭐든 중요하진 않다. 내게 찾아와 귀한 경험을 준 아이들에게, 나도 귀한 것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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