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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Oct 11. 2022

게으른 창작자의 루틴

전부 내 탓은 아니었음을  

매우 보수적인 회사에서 반복된 업무를 하며 느끼는 좌절감과 이러다가  존재가 점점 작아져서 소멸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힘입어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첫째. 적어도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쓰고 브런치에 발행하기

둘째. 꾸준히 작곡/작사하기

셋째. 새로운 연구 주제나 사업 아이템 구상하기

이성과 감성이 적당히 어우러진 이 세 가지 활동 정도면 굳어가는 뇌를 말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퇴근 후 TV 시청, 소파에 누워 있기, 친구들 만나기 등 꽤 중요한 일과들에 밀려 하나둘씩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하기 싫은 건 아니었고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는 환경에 있었지만 "시간 날 때 하자"는 안이한 생각으로는 이미 굳어진 일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결방법은 하나였다. 사이드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는 고정된 시간대를 정하는 것.

매주 화요일 목요일 점심에는 헬스장을 가고 일요일 저녁에는 기타를 치는 것처럼, 일주일 중 어느 요일과 시간대를 택해 그 시간만큼은 사이드 프로젝트에 할애하기로 한다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에, 초반 몇 주간의 적응기만 지나면 어느새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노래를 만들고-공부하는 창작활동이 루틴이 된다면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전진할 수 있으리라.


시간은 다른 요일보다 즉흥적인 계획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금요일 저녁을 택했다.

그리고 오늘이 '게으른 창작자의 루틴 만들기' 프로젝트의 첫날이다.

5시에 퇴근을 하고 미리 검색해 놓은 카페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 조용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쓸지 작사를 할지 공부를 할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유튜브를 켰다.

작은 핸드폰 스크린으로 봤던 영상들을 오랜만에 넓은 스크린으로 보니 기분이 좋다.

좋아하는 여행 유튜버의 영상들을 보다가 갑자기 쇼미더머니가 생각나서 예전 공연 영상들을 찾는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카페에 오게 된 본래의 목적이 갑자기 머리를 때린다. 정신을 차리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제 진짜 뭔가를 해봐야지!"


현재 연구 중인 주제인 "탄소흡수원 증진을 위한 목재 제품 유통 및 트래킹 플랫폼" 워드 파일을 더블 클릭한다. 약 1분간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면서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앞으로 어떤 조사가 더 필요한지 살펴본다. 집중을 하려고 자세를 바로 잡는데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거슬린다. 유튜브에 공부할 때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해서 내 취향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엄선한다. 열심히 찾고 또 찾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갔다 온다. 자리에 다시 앉으니 집중의 흐름이 이미 끊겨버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다음에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힘차게 닫는다.

과연 그 "다음"은 오긴 오는 걸까?

나 자신에게 실망한 마음을 가득 안고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지나고 보니 시간과 환경의 제약 탓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고, 반대로, 엄청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환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에 긴 시간을 투자해 발전시킨 적도 있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 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꽤 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그 만 시간을 혼자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음악이든, 글이든, 창업이든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경제적 상황, 건강, 나이 등 현실적인 이유로 감히 도전하지 못하거나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니 혼자 상상하고 꿈꾼 일들이 현실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부 내 탓은 아니었음을.

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선 본인의 힘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필연과 우연의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긴 여정을 지나는 동안 너무 쉽게 나에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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