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찌르는 말
알바하는 곳에서 조용히 있는 나를 보던 동료가 괜찮냐고 물으며 왜 그렇게 말이 없냐고 했다.
자신들의 대화에 나도 참여하기를 원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 좀 하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불안하고 우울했던 내 어린 시절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나는 그날 이후 며칠간 몸이 아팠다.
그 동료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나를 가장 많이 챙겨준 사람이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내가 걱정돼서, 좋은 의도로 건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엔 그 말이 나를 깊숙이 찔렀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끈질기게 나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예측 불가능하다. 어느 날에는 더 직설적이고 무례한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느 날에는 친절한 사람이 건넨 호의의 말이 욕설로 바뀌어 들린다.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려보면, 가장 괴로웠던 기억은 내가 말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치스러운 상황에 몰린 것이었다. 중학생 때 체험활동 같은 것을 끝내고 반에 다시 모여서 가장 존재감이 없었던 사람을 투표했고 자랑스럽게도 내가 1등에 뽑혔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런 투표를 만들고 허락한 사람들을 원망한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긴 말이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괜찮아? 네가 너무 시끄럽길래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상상한다.
말이 없거나 적은 것을 정상적이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시선은 사회적 편향이고 그것이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이미 여러 차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 아마도 이 상처는 영영 지워질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지우고 지워도 되살아난다. 부정적인 생각은 아니다. 되려 희망적인 생각이다.
가장 불행했던 시간 속의 나조차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내 모습도 내 수많은 모습 중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 좋든 싫든 그 모든 것이 나였음을 깨달으니 비로소 조그만 희망이 보였다. 나는 나를 배반할 수 없다. 아프고 찔려도 두 팔을 펼쳐 나를 힘껏 안을 것이다.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