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를 추억하며

by 온유

연차를 쓰고 오랜만에 해외가 아닌 국내 여행을 떠났다. 제주 서귀포 근처에 숙소를 잡고 올레7길을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30도에 육박하는 덥고 습한 날씨에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앞뒤로 아무도 없으니 연신 ”아오 더워 죽겠네“ 중얼거리며 헉헉댔다.


더워서 죽을 것 같아도 계속 걸었다.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서 걸레 빨듯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고온다습한 실외에 비해 실내엔 에어컨이 빵빵 틀어져 있었다. 카페나 식당에 들를 때는 추위에 덜덜 떨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여행 후 일주일간 냉방병 비슷한 감기몸살로 심하게 앓았다.


체력적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4일이었지만 푸른 바다와 소박한 마을 풍경을 느릿느릿 걸으며 온전히 향유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좋은 책과 음악에 빠져들 수 있어서 좋았다. 여행을 떠나며 책은 한 권만 챙겨갔는데 그게 류이치 사카모토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였다. 최근 가입한 트레바리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어서 강제로라도 읽어야 했다. 그는 음악가인 동시에 일본의 탈원전을 강력히 주장했던 환경운동가였다.


Aqua와 제주바다.

Rain과 짙은 안개.

M.A.Y. in the Backyard와 눈부신 여름.

Merry Christmas Mr.Lawrence와 크고 작은 일상의 풍경들


매끈한 전신 슈트를 입고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바다 짠물을 무심히 털어내는 해녀와 작은 동네슈퍼 앞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수다 떠는 할머니들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오르다가도 류이치 사카모토가 암 투병 중 빚어낸 앨범 ‘12’의 수록곡이 랜덤으로 재생될 때면 다시 숨이 느려지고 생각이 많아지는 나날이었다. 그 앨범의 수록곡 ‘20220302‘를 반복해서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폴 칼라니시의 ‘숨결이 바람 될 때’이고 가장 좋아하는 앨범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12’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글과 호흡은 감히 평가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더없는 위로이자 울림이다.


죽음에 빗대어 보면 내가 지금 처한 상황과 그 안에 촘촘히 쌓인 분노와 절망과 증오와 우울은 얼마나 사소한가.


더워도 힘들어도 그냥 계속 걸었던 제주에서의 시간을 더 오래, 더 선명히, 기억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먼지 쌓인 맥북을 열고 스튜디오원 아이콘을 클릭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떤 게 녹음 버튼이었는지도 잊었고 음원 추출을 위한 구간을 설정하는 단축기도 겨우 찾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부담이자 희망이다. 결국 다시,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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