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3장 강독 후기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수업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개연성은 없지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놓고 싶다.
습곡작용은 왜 일어나는가? 습곡작용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구가 맨틀을 떠다니는 수많은 지각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맨틀은 흐름이기에 흔들림은 있지만 높낮이는 없다. 지각판은 맨틀 위에서 수평으로 움직이고, 그 매끄럽지 않은 수평 운동이 지층에 습곡작용을 일으킨다. 지구가 고른 판인 이유는 고정된 하나의 평면이어서가 아니라, 움직이는 다수의 판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시냅스의 모양을 하고 있다. 모든 생성은 움직임에서, 모든 움직임은 틈에서 시작된다.
라캉은 '성감대'를 흐르는 강물에 둑을 막아 물이 불뚝 솟아올라 있는 이미지(발기된 페니스 모양)로 보았다. 여기서 강물은 욕망이고 둑은 금기다. 들뢰즈는 성감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지난 수업을 듣고 라캉이 심어놓은 성감대의 이미지가 바뀌었다. 성감대는 피부에 갇힌 물줄기가 아니라, 피부에 쌓인 지층이다. 나 또는 타자의 손길이 퇴적된 기쁨의 지층. 부모가 금지했기에 반복적으로 만지게 된 곳에는 '해금(解禁)의 쾌락'이 퇴적되고, 사랑하는 이가 반복적으로 만져준 곳에는 '사랑의 기쁨'이 퇴적된다.
라캉의 성감대는 둑을 여는 순간 소멸되는 반면, 들뢰즈의 성감대는 쌓이고 휘어질 뿐이다. 슬픔의 기억이 새겨진 피부 위에도 기쁨의 지층은 쌓일 수 있다. 쌓이고 쌓인 슬픔의 퇴적층도 강력한 습곡작용으로 전복될 수 있다. 들뢰즈의 세상에 소멸은 없다. 오직 반복과 휘어짐만이 있을 뿐. 나의 평평한 피부에도, 더 많은 등고선이 생기길.
라캉에게 '부모'는 자석이고, 들뢰즈에게 '부모'는 바위다. 라캉의 '부모'는 우리의 삶에 볼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자기장을 드리우는 존재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의 욕망은 부모라는 자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들뢰즈가 보는 '부모'는 고른 판 위에 우연찮게 놓여진 거대한 바위와 같다. 우리는 배아, 고른 판, 기관 없는 신체로 생성되지만, 일부의 잠재성이 현실화되어 아주 기초적인 '내용'을 갖게 된 순간부터 타자와 마주치며 끊임없이 '표현'된다. 고른 판 위에 우연히 떨어진 바위는 그 위에 쌓일 지층의 모양을 좌우한다. 하지만 바위는 자석과 달리 그 위에 쌓이는 가루들의 모양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다시 한번 들뢰즈의 세계관에 소멸은 없다. 부모를 죽이라는 말은 바위를 깨부수라는 말이 아니다. 지층 최하단에 놓인 바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 뿐더러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부모는 오직 퇴적과 습곡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아니, 모든 탈주는 퇴적과 습곡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퇴적은 반복이고 습곡은 차이로 인한 변이다. 바위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바위가 아닌 곳에 흙이 쌓여야 한다.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일단 '부모가 아닌 곳'에서 반복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층의 모양을 변이시킬 습곡작용을 기다려야 한다. 습곡작용이 일어난 순간, 부모의 모양대로 퇴적되었던 나의 지층은 완벽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이될 수 있다. 그 휘어지고 구부러진 지층 사이에도 부모라는 바위는 여전히 박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위는 더 이상 지층의 모양을 좌우하는 인자가 아니다. 그 바위는 지층 어딘가에 커다랗게 남아있는 무늬다. 언젠가 내 삶의 지층을 잘랐을 때 나의 부모도 그런 무늬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들뢰즈의 '지층'에서 '시간' 이미지가 떠올랐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관측자는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것으로 측정한다(마뚜라나의 '관찰자주의'와도 연결된다). 나도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지층의 퇴적과 습곡에서 상대성 이론에 따른 시간의 흐름과 뒤틀림이 떠올랐다. 시간은 고르게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느리게 가기도, 빠르게 가기도, 멈추기도, 뒤로 가기도 한다. 시간은 나의 속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그래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다녀오자 딸이 노인이 되어 있던 것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 서재에 책을 밀어내며 "STAY(시간 여행을 떠나지말고 머물라)"라는 신호를 보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후회와 시간의 상관관계를 이미지화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후회를 하면 시간이 멈춘다. 실제로 인터스텔라 주인공은 그 서재로 만들어진 4차원에 공간에 무한한 시간동안 갇혀 있는다. 후회는 시간을 과거의 한 시점에 고정시킨다. 후회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시간의 습곡. 시간의 수축이 일어나면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되기도 한다. 먼저 쌓인 지층이 위로, 나중에 쌓인 지층이 아래로 전복되는 것처럼. 실제로 우주에서는 시간이 뒤틀려 있다. 상대성이론과 들뢰즈가 만나는 지점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나의 속도(관찰자)에 따라 시공간이 다르게 흐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속도다. 속도를 늦추면 시간도 느리게 흐른다. 속도를 멈추면 시간도 정지한다. 시간의 멈춘 곳에는 퇴적작용도, 습곡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곳에는 계절의 변화도, 판의 움직임도 없다. 시간이 멈춘 곳에는 죽음 같은 욕창만이 있다. 멈추면 좆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내일은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