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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4. 2022

2. 말더듬이의 춤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4장 강독 후기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단장 김보람 씨가 춤을 만드는 과정을 보고 들뢰즈가 말한 '말더듬기'가 연상되었다.


김보람씨는 음악을 듣고 비트와 멜로디의 강약을 점(혹은 선의 높낮이)로 이미지화한 뒤, 그 점들 사이를 움직임으로 이어나간다. 그가 동작을 만드는 방식은 쌤이 설명해주었던, 고다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닮아 있다. 그는 첫번째 비트(점)을 표현하는 움직임을 한 뒤, 그 움직임이 끝난 지점에 가만히 멈추어서 다음 움직임을 생각한다. "다음 동작을 짤 때는 여기(현재 동작이 멈춘지점)서 고민을 하셔야 해요. 여기서(전 동작) 고민하면 안되고. 여기(현재 동작)까지 선택을 했으니까."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자유롭게 몸이 가는 대로 동작을 짜지 않는다. 그는 다음 동작을 짤 때, 주로 "내가 한번도 안 해본 쪽 아니면 내가 잘 안되는 쪽"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게 그에게는 좀 더 재밌다고. 그는 전 동작이 끝난 지점에서 여러가지 움직임을 해보며 어색한 움직임을 골라나간다. 그렇게 그는 주어진 8개의 점을 어색해서 매혹적인 선으로 이어나간다. 그의 춤은 '말더듬기'다.


그의 춤에서 점과 선을 보았다. 점은 외부에서 오고 선은 내부에서 온다. 그의 춤은 자유롭지만, 그가 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자유롭지 않다. 그는 음악에 맞춰 몸이 가는대로 춤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몸이 이미 훈육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인위적이지 않은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 그는 주어진 점에서 고민하고 고민한다. 그의 고민은 하나다. 지금 서 있는 점에서 어떤 선을 그릴 것인가. 그 고민을 하는 데 있어서, 이전의 선과 다다음의 선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의 머리 속에는 플롯, 통일성, 조화, 전체 그림, 설계도 등의 개념은 없다. 그는 오로지 지금의 점과 그 점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선에만 관심이 있다. 그 흥미로운 선들을 이어 하나의 춤이 창조된다. 그렇게 창조된 춤은 기묘하면서 조화로우며, 어색하면서 어색하지 않다.


나는 춤을 왜 동경했는가. 자유로워 보여서다. 나도 음악에 맞춰 몸이 가는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욕망 또한 강박증자 애새끼의 '하늘의 날고 싶은' 욕망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자유란 하늘을 나는 게 아니다. 자유란 몸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자유란 이전 움직임이 멈춘 지점에서 다음 움직임을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다음 움직임에 대한 선택 또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순간 이동을 할 수 없기에 이전 움직임이 멈춘 지점에서 가능한 움직임은 제한적이며, 다음 움직임을 선택할 때 외부 환경(비트)와의 어울림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지층과 현재 외부 환경이라는 두 가지 제약 속에서 단 하나인 매혹적인 탈주선이 그어진다. 곡선과 곡선 사이에 딱 하나의 첩점이 존재하듯, 주어진 제약 속에서 흥미로운 선은 딱 하나다. 그 하나하나의 선이 이어져 하나의 긴 선이 된다. 춤도 삶도 선이다. 심장박동 같은 선. 영원회귀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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