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4장 강독 후기
요즘 내 생각들이 구더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뇌에서 작고 하얀 수백마리의 구더기들이 꿈뜰꿈뜰대고 있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못 쓰겠다. 나는 이제 막 비이성과 비체계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글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생각이 산발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친구가 자기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한글 파일에 기록을 해놨다가 그걸 한꺼번에 글로 올린다고 했다. 그때는 그 친구가 왜 그렇게 글을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침에 어떤 글을 쓰고 싶으면 하루종일 그 글 이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일1생각, 1일1글의 느낌이었다. 근데 이제야 그 친구가 왜 한글파일에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된다. 내가 요즘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순간순간 문장이 두세개씩 떠오르다가 사라진다. 글을 쓰고 싶으니까 일단 그 문장이라도 써볼까 싶다가도, 떠오른 게 그게 다라서 글을 쓸 수 없다. 내 머릿속에는 "글"은 응당 이런 형식, 즉, 어느 정도의 체계와 분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틀이 있나보다. 그러니까 문장 두세개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리좀적 글쓰기다. 문장과 문단의 뭉텅이들. 무의식이 간접화법이고 언어가 직접화법이라면, 언어는 무의식에 빛이 비추어진 한 부분일 뿐이다. 애초에 체계가 있는 글이란, 아니, 체계가 있는 사고란 부자연스러운 거다. 무의식은 리좀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논리의 힘으로 무의식을 정돈해왔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들이 밝혀지고 혼란한 생각들이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이 예전 나의 글의 정서는 카타르시스 혹은 지적 쾌감이 전부였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글쓰기를 오징어잡이에 자주 비유하곤 했다. 껌껌한 무의식에 바다에 낚시줄을 던지면 오징어들이 줄줄이 딸려 나오는 이미지. 나는 글을 쓸때 항상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 문장만 쓰면 다음 문장들이 쉴새 없이 엮어져 나왔다. 논리는 직선이기에 시작점만 잡으면 계속 엮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토하는 것 같은 글들을 졸라 많이 썼다. 그 논리적인 글들은 분명 나를 구원했다.
나는 철학을 논리로 뚫고 왔다. 스승이 뭘 가르쳐주면 나는 늘 반론부터 생각했다. 스승에게 개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철학을 믿고 싶어서 그랬다. 나의 아비투스에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믿을'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나에겐 철학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라는 확신이 필요햇다. 지금 생각해보면 믿음이 먼저였는지 논리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아니, 믿음이 먼저였다. 애초에 나는 스승이 좋았으니까 스승을 믿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스승이 보여주는 세상이 이질적이니까 거기서 느껴지는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가 필요했고, 나는 논리적 정합성에서 안정감을 느끼니까 그걸 스승에게 요구했던 것 뿐이다. 물론 스승도 나의 그런 성향을 아니까 나의 수많은 반론들을 논리로 반박해주었던 것이고. 그 경험들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철학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던 것 같다. 그랬더니 갑자기 철학이 제일 맞는 말 같아진 거다. 믿음 체계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거다.
생각해보니 나는 가장 근대적인 사다리를 타고 탈근대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요즘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사고의 틀 자체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내가 내 자신이 낯설어서 미치겠다. 뭐가 나인지 모르겠다. 물론 들뢰즈가 모든 게 가면이고 시뮬라르크라고 했지만, 내 자신이 분열되고 조각나는 느낌이 유쾌하지가 않다. 예전에 낑겨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느낌이다. 이런 혜원, 저런 혜원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데 이 혜원과 저 혜원이 너무 다른 혜원이라 어지럽다. 수백개의 거울이 붙어있는 방에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내 자신을 이중보기, 삼중보기하게 되는데, 그 보기의 보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는 느낌이다.
나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고 그 빈 공간에 구더기들이 우글우글 들끓고 있는 것 같다. 구더기를 박멸해오던 나는 구더기들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지금 나는 자기확신의 절벽에서 자기불신의 늪에 빠져버렸다. 감정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데 그 진폭이 예전처럼 크지가 않다. 조증도 울증도 아닌 어느 중간 지점에서 파동처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한다. 물론 고원처럼 잔잔한 기쁨은 아니다. 오히려 땅 밑처럼 어둡고 습하다.
여전히 나는 내가 우주의 소립자라는 사실을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차이를 통해 다른 존재로 생성되는 과정을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이를 마주치면 불편해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아마 습곡으로 뒤집어진 지금의 나를 온전히 긍정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세상에 쓸리고 부딪치며 살지 않았던 나의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툭하면 모두가 없는 밀실에 혼자 처박히고 싶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타자는 나에게 불편한 존재인데 결은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 타자는 나에게 '없는 존재' 아니면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이제는 내 나르시즘이 줄어든 자리만큼 타자라는 존재가 들어오긴 한다. 누구든 완전히 무화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불편해졌나 보다. 예전에는 불편하면 "쟤는 왜 저래! 미친 거 아냐?"하면서 자동소총을 쏴버리면 됐는데, 함부로 쐈다가 나중에 좋은 사람인 걸 확인한 경험이 반복되어, 이제는 왠만하면 자동소총을 들기가 좀 거시기 하다. 들뢰즈는 세상은 차이로 우글거린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강박증자나 히스테리나 세상(=차이)을 부정하는 방식이 다를 뿐(강박증자는 '대상'을 없애고, 히스테리는 '자신'을 없앤다),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같다. 아무튼 나야말로 신의 세상에서 내려와 조금씩 인간이 되어가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