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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27. 2021

나와 아버지와 이데아

플라톤에서 들뢰즈까지

중학교 사회 시간에 플라톤에 대해 배웠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현실 세상을 어떤 절대적인 세상(이데아)의 그림자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이를 ‘동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동굴에 모닥불이 피어 있다. 우리는 오직 동굴의 한 벽만을 볼 수 있도록 몸과 얼굴이 고정되어 있다. 그 상태로 우리 등 뒤에 어떤 물체가 움직인다. 우리는 등을 돌려 그 물체가 무엇인지 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뿐이다. 플라톤에게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만지는 모든 것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진짜 ‘물체’는 따로 있다. 그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진짜 물체가 바로 이데아다.


중학교 때 그 모닥불 비유를 보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그림자’라고 하고 눈에 안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진짜’라고 하는 거지? 차라리 그 반대가 더 말이 되는 것 아닌가? 나에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다면 이데아를 신의 세계, 천국, 내세 등으로 치환해서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무신론자에 철저한 유물론자인 부모 밑에서 교육받은 나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는 공상으로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사실 그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넘어 철학자들은 참 쓸데없이 현학적인 개념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이상한 반감마저 들었다.




“혜원 씨는 종교적인 사람이에요.”

“네? 저는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는데요?”


언젠가 나의 철학 스승이 나를 보고 한 말이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종교를 믿어본 적도 없고, 스스로를 오래도록 무신론자나 합리론자라고 규정해온 탓에 스승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적지 않은 마음의 부침과 소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스승의 말을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음의 싹이 텄다. “아, 내가 바로 플라톤주의자구나!”


내가 중학교 때 착각했던 것처럼 플라톤의 ‘이데아’는 철학자의 현학적인 공상이 아니었다. ‘이데아’는 지금 이 세상에, 나의 삶에 뿌리처럼 살아 숨 쉬는 개념이었다. 나는 무신론자에 유물론자지만 스승이 말한 대로 ‘종교적인’ 사람이 맞았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을 뿐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신은 아버지였다. 하느님이 ‘이상적인 인간’의 이데아를 제시했듯, 나의 아버지 또한 막연하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이미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밝고 똘똘하고 창의적이며, 당당하고 도전정신이 강하고 위기에 능하며, 자기 관리를 잘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나의 ‘이데아’로 삼았다. 그리고 그 ‘이데아’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다. 나의 삶은 ‘이데아’라는 종착지에 다다르기 위한 행군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행군길에서 참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서 나의 ‘아버지’ 자리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순간은 내가 스타트업을 할 때다. 당시 우리 회사에 투자했던 투자회사의 대표는 연달아 사업체 두 개를 상장시키고 은퇴 후 후배 양성에 온 힘을 쓰는 ‘벤처사업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투자를 받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를 나의 아버지 자리에 놓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내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의 ‘이데아’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사업을 하는 내내 그의 말과 글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페이스북에 사업가의 자질에 대한 글이라도 쓰면 성경의 한 구절처럼 하루 종일 그 내용을 되 뇌였다. 그가 말하는 사업가의 ‘이데아’에 내가 부합하면 기뻐하고 부합하지 않으면 우울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는 사업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키워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대표가 말하는 사업가의 이데아를 탐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 같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서 외국의 성공한 사업가들의 책을 읽으며 더 많은 사업의 이데아에 대해 공부했다. 당시 그 대표가 나를 보면 항상 답답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나는 위축되고 우울했다. 당신의 말을 들으며 누구보다 사업가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대체 왜 나를 답답해하나 묻고 싶었다. 그 대표가 한번은 ‘사업에는 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대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업을 스스로 해 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만의 스타일이 구축된다는 말이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는 왜 내 스타일이 없을까’ 자책하거나 ‘나의 스타일은 무엇일까’ 공상하기 일쑤였다. 그 대표가 종종 사업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누구보다 애를 쓰고 마음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내가 5년 동안 한 것은 사업이 아니라 사업가 망상이었다.




내가 스타트업을 하는 동안, 내 아버지 자리에는 그 대표가 있었고, 나의 이데아는 그 대표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업가의 이미지였다. 그렇게 5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나는 한 철학자를 만나며 인생의 방향이 180도 전환되었다. 그런데 삶의 방향은 전환되었지만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는 내 아버지 자리에 그 철학자를 놓았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나의 이데아로 삼았다.


그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는 그 철학자를 정신적인 아버지로 여겼다. 그런데 그 정신적인 아버지가 임제 스님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여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철학자가 들뢰즈를 통해 말하는 삶을 내 삶의 이데아로 삼았다. 그런데 들뢰즈가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데아는 없다. 모든 것은 허상(시뮬라르크)의 전치이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라’는 사람을 아버지로 삼고 ‘이데아는 없다’는 말을 이데아 삼아 철학을 배워나갔다. 그래서 사업을 할 때 내가 사업가의 이데아에 부합하는지 늘 확인했던 것처럼, 철학을 하면서도 내가 철학자(들뢰즈나 내 철학 스승)가 말하는 삶의 이데아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늘 확인했다. 나는 철학을 기독교처럼 믿었다. 들뢰즈는 나의 신이었다.


그런 삶의 태도에는 양가적인 면이 있다. 나는 이데아에 가닿고 싶다는 욕망이 큰 사람이기에 철학을 믿고 나서부터는 철학적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또한 큰 편이었다. 항상 지금의 나와 이데아의 나와의 간극을 비교해오던 습관 탓에, 철학적 잣대를 비추어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성찰도 꽤 잘 해온 편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나를 늘 결핍 덩어리로 보았다. 투자회사 대표가 ‘좋은 사업가는 중요한 일에만 집중한다’고 말하는 순간 ‘디테일에 집착하는 나’를 자책했던 것처럼, 들뢰즈가 ‘감각적인 삶’을 강조하면 ‘감각적이지 않은 나’를 자책했다. 어느 지점까지는 그런 자책이 성찰로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막혀버렸다. 들뢰즈가 직관과 감각에 대해 강조할 때마다 나는 직관과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채워야하는지조차 가늠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대한 믿음의 크기만큼 내가 작아보였다. 내가 결핍된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들뢰즈는 세상에는 오직 ‘유(생성)’만 있을 뿐, ‘무(결핍)’은 없다고 말한다. 그 사유들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하루는 내 철학 스승이 ‘넌 들뢰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왜 들뢰즈적으로 살지 않니’라는 일침을 놓기도 했다. 들뢰즈가 말한 대로 살고 싶은데 살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스승이 이데아에 대해 쓴 글을 보고 깨달음이 왔다. 들뢰즈를 이데아로 놓은 나 또한 플라톤주의자구나! 들뢰즈가 틈만 나면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로 그 플라톤! 방향만 바뀌었을 뿐, 나는 스타트업할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업 할 때도 그게 문제였다. 그 대표는 자기가 스스로 사업을 해나가며 깨우친 것을 바탕으로 사업가의 자질에 대해 말을 했다. 이데아가 먼저고 사업이 나중이 아니었다. 사업이 먼저고 이데아가 나중이었다. 그가 사업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깨달은 사업가의 ‘이데아’는 그의 단독적인 앎이었을 테다. 그래서 그가 사업에는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업가의 자질과 다른 대표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업가의 자질은 통하는 구석은 있을지언정 다른 모습일 테니까. ‘단독적인 이데아’는 모순적인 표현이다. 이데아는 하나의 완전무결한 절대적인 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독적인 이데아’가 결국 포스트모던의 세계에서 말하는 ‘다수의 진리성’과 같은 맥락의 말일 테다. 그가 말하는 사업의 단독적 진리. 그것은 그가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낸 사업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은 의미는 사전에 주어진다고 말한다(이데아는 우리의 삶 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들뢰즈는 의미는 사후에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한 후에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이데아만 보고 있던 나는 온몸이 묶인 채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내가 감각과 직관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나는 내 발과 손으로 온 세상을 만지고 느끼며 살지 않았으니까. 나는 온몸이 묶여 눈이 빠져라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쳐다보기 바빴으니까. 내가 다른 감각보다 시각이 발달한 이유도 세상을 마치 티비를 보는 것처럼 지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의 타자를 온몸으로 감각한 적이 없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고 냄새를 풍기고 소리를 내고 따뜻한 감촉을 지닌,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나의 이데아에 비춘 그림자로 보았다. 그렇게 타자를 이데아에 비추어 보면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핍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데아는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의 결핍을 먼저 생각했다. 그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고치려 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니면 실망하거나 고치려 했다. 그렇게 사람을 결핍으로, 허상으로, 그림자로 보아왔기에, 나는 매 순간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는 아름다운 한 사람을 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감각과 직관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것은 단지 내가 감각과 직관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신의 명령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날카로운 직관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온몸이 묶인 채로 세상을 이데아에 비친 그림자로 보아온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섬세한 감각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이제 이데아의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이데아의 세계는 무색무취의 세계다. 그곳은 완벽할지언정 죽어있는 세계다. 나는 살면서 죽어있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회색의 아우라를 알고 있다. 나는 무기력하고 우울한 사람이다. 철학을 공부하며 활기를 많이 회복했지만, 여전히 나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불 꺼진 방에서 티비만 켜놓고 사는 사람의 방을 메우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내 몸에서 나는 죽음의 냄새를 혐오했다. 너무나도 쉽게 무기력해지는 내 자신이 싫었다. 냄새를 지우고 무기력을 뿌리뽑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백날 다짐해서 바뀌는 게 아니었다. 시작은 시선을 이데아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리는 것이다. 온몸을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을 끊고 천천히 일어나 찌뿌둥한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을 느껴보는 것이다. 발에 닿는 흙의 감촉을 느끼고 코에 들어오는 공기의 냄새를 느끼보는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삶을 살아내고 싶다. 더 이상 아버지, 신, 이데아의 돔 안에서 무색무취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 삶이 기쁨으로 가득하진 않을 것이다. 맨발로 땅을 밟는 삶은 보드라운 흙을 만끽하는 순간보단 뾰족한 돌멩이에 찔리는 순간이 더 많을 테니까. 어쩌면 감각이란 고통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통스럽고 싶지 않았기에 죽어있는 삶을 살았나 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에는 고통도 없지만 삶도 없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철학을 배워서 다행이다. 나는 철학을 배우며 내가 흔들리고 상처받는 시간을 몇 번 겪어봤고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미약하게나마 배웠다. 그리고 그 고통이 지나고 난 뒤 그 시간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던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곤 했다. 나는 이제 행군이 아닌 산책의 삶을 살고 싶다. 일단은 꽃내음이 나는 쪽으로 한걸음 내딛어야겠다.




가끔 스승은 우스갯소리로 나를 '방배 들뢰즈'라고 부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들뢰즈적인 삶을 아직 살지 못하기에, '방배 들뢰즈'라는 별명이 가당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별명을 조금은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승이 나에게 '방배 들뢰즈'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유는 내가 들뢰즈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들뢰즈의 정반대에 있는 '플라톤'에서 '들뢰즈'로 가는 차이의 횡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플라톤'이지만 '들뢰즈'가 좋다. 나와 들뢰즈가 '차이'나기에 좋다. '차이'에 매혹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그것이 나를 동굴의 세상에서 나오게 한 힘이니 말이다. 이제 '방배 들뢰즈'라는 별명을 들으면 조금 더 여유롭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플라톤에서 들뢰즈로, '들뢰즈-되기'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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