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과 찬물 사이

by 김혜원
“저에게 오토바이는 자유에요.”
“그것도 거대한 환상은 아닐까?”
“저는 남자친구를 사랑해요.”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는 아직 제가 필요해요.”
“그냥 네가 혼자 있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있는 철학공동체에서 자주 오가는 대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감상에 빠져 어떤 말을 하면 스승이 찬물을 확 끼얹는 답변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스승의 답변은 대부분 옳다. 시간이 좀만 지나도 스승의 말이 옳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저 상황에 빠져 있으면 마음이 마음 같지가 않다. 내가 어떤 말을 했는데 스승이 찬물을 끼얹는 답을 하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불쾌해진다. 화가 날 때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어휴, 증말 좀만 내버려두지.’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승의 말을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무의식적 차원에서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불쾌감이 정체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불안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과몰입해 있는데,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어떤 타자가 그 상황을 나와 다른 식으로 해석할 때 불안이 찾아온다. 그 타자의 해석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더 이상 그전처럼 과몰입을 할 수 없게 된다. 똑같은 오토바이를 타도 ‘이게 자유로운 느낌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따라붙어서 어제처럼 즐겁지 않고, 똑같은 남자친구를 만나도 ‘난 얘가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몸 좋은 남자가 좋은 건가?’라는 의문이 따라붙어서 혼란스러워진다. 이별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를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치 내가 배려심 넘치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쟤가 필요한 거 아냐?’라는 의문이 따라붙으면 더 이상 아름다운 사람 코스프레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승의 찬물 끼얹는 말을 들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 과몰입할 수 없게 되니까.


그렇다면 애초에 왜 과몰입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게 끝(정답)이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A는 왜 오토바이에 과몰입했을까? 오토바이가 자유의 끝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건 거대한 환상 아닐까?’라는 스승의 말에 불안했던 것이다. 만일 오토바이가 끝이 아니라면, 그 너머의 자유는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하고, 더 큰 자유를 향한 거친 시도들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B는 왜 남자친구에게 과몰입했을까? 지금의 연애가 사랑의 끝이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만일 지금의 연애가 끝이 아니라면, 더 밀도 높은 사랑이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하고, 더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고통들(이별의 상처, 혼자의 삶, 새로운 타자와의 마찰)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C는 왜 스스로에게 과몰입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정답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배려 있는 게 아니라 혼자 있을 수 없어서 헤어지지 못하는 거다.’라는 스승의 말에 불쾌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정답이 아니라면, 내가 헤어지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고민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혼자 설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고된 여정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자유를 향한 한 걸음, 더 밀도 높은 사랑을 향한 한 걸음, 더 강건한 어른을 향한 한 걸음. 그 모든 한걸음이 두려워 보일 때, 그냥 지금이 끝(정답)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지금 상황에 대한 미화와 극화, 그리고 과몰입이 일어난다. 스승의 찬물 끼얹는 말은 그 견고한 자기정당화에 균열을 내기에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미화와 극화, 과몰입을 걷어내면, 한 걸음이 무서워 주저앉아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은 용기의 문제일까? 첫 번째 한 걸음은 용기의 문제다. 하지만 두 번째 한걸음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과정’을 바라보는 감성(과정 그 자체를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의 문제다. 사실 A, B, C는 용기 있게 첫 번째 한 걸음을 걸은 이들이다. 모범생이었던 A는 자기의 금기를 깨고 용기 있게 오토바이에 도전했다. 안전한 연애만 하던 B는 자기의 금기를 깨고 용기 있게 위험해 보이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해오던 C는 용기 있게 그 관계가 더 이상 사랑이 아님을 직면했다. 첫 번째 한 걸음은 처음이기에 비장하기 그지없다. 덜덜 떨면서 걸은 한 걸음이기에 이왕이면 거기서 쇼부를 보고 싶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서 발생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과몰입 때문에 현재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이게 정답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굉장한 충격과 함께 깨닫게 된다. 아마도 스승의 찬물을 끼얹은 말들은 그 때늦은 현실자각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에어백 같은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스승은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 대해 과몰입과 찬물의 측면 모두를 스스로 볼 수 있길 바랐을 것이다. 그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니까. 어떤 것에 과몰입을 했다가 현실의 찬물을 직격타로 맞으면 더 이상 아무것에도 과몰입을 하기 싫어진다. 오토바이가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A는 무엇이 하고 싶어질 때마다 ‘이것도 거대한 환상이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친구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B는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겨도 ‘나 또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부분에 끌리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스스로의 모습을 미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C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든 또 자기기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과몰입이 ‘이게 정답이야!’라고 믿고 싶은 과열의 시기라면, 찬물은 ‘내가 뭘 하든 다 틀리겠지.’라고 믿는 냉각의 시기다. 이 찬물의 시기에 빠지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또 긴 시간을 주저앉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 한 걸음은 어떻게 걷는 것일까? 과몰입과 찬물을 몇 번 오가고 깨달은 것이 있다. 과몰입과 찬물의 사이를 가야한다는 것. ‘이게 정답이야!’라는 과몰입도 아니고, ‘다 틀리겠지.’라는 찬물도 아닌, '지금의 나는 정답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야.’라고 (정신승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알게 될 때, 두 번째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다. 오토바이는 거대한 환상이지만, 지금 오토바이를 욕망하는 내가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것.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오토바이는 1의 자유도 0의 자유도 아닌 0.23의 자유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진정으로 알게 되면 오토바이를 타는 나를 긍정하면서도 0.45의 자유를 향한 두 번째 한걸음을 걸을 수 있다. 몸 좋은 남자와의 연애는 부분 사랑이지만, 그 부분 사랑을 욕망하는 내가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것. 그 모순을 이해할 때, 그 연애는 1의 사랑도 0의 사랑도 아닌, 0.34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진정으로 알게 되면 그 연애를 긍정하면서도 0.56의 사랑을 향한 두 번째 한걸음을 걸을 수 있다. 지금 내 모습은 정답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것. 그걸 진정으로 알게 되면, 지금의 내 모자란 모습을 긍정하면서도 더 나은 나를 향한 두 번째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다. 그것이 자기만족이다.




자기만족이란 무엇인가? '내가 0이 아닌 0.23이라는 것(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1이 아닌 0.23이라는 것(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그것은 내가 0도 아니고 1도 아닌 0.23이라, 즉 내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다. 0.23이 아닌 0만 보는 것, 0.23이 아닌 1만 보는 것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보는 마음이다. 이제야 알겠다. 삶은 정답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라는 말은, 0.23, 0.34, 0.45의 나의 모습·나의 욕망·나의 사랑을 모두 긍정하는 일이라는 걸. 그 모두를 긍정해온 사람만이 0.23, 0.34, 0.45의 너의 모습·너의 욕망·너의 사랑을 사랑해줄 수 있다는 걸.


삶은 0.23의 기쁨을 잘 받아 안아서, 그것을 딛고 0.34, 0.45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를 0.5라고 미화해서도, 0.1이라고 비하해서도 안 된다. 내가 딛을 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그곳에 발을 딛고 다음 한 걸음을 걸을 수 있으니까.


나는 1이 아니고, 0도 아닌, 0.23이다. 그러니 이제 0.34을 향한 두 번째 한 걸음을 내딛어야겠다. 이번엔 비장한 마음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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