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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r 03. 2022

과몰입과 찬물 사이

“저에게 오토바이는 자유에요.”
“그것도 거대한 환상은 아닐까?”
“저는 남자친구를 사랑해요.”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는 아직 제가 필요해요.”
“그냥 네가 혼자 있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있는 철학공동체에서 자주 오가는 대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감상에 빠져 어떤 말을 하면 스승이 찬물을 확 끼얹는 답변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스승의 답변은 대부분 옳다. 시간이 좀만 지나도 스승의 말이 옳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저 상황에 빠져 있으면 마음이 마음 같지가 않다. 내가 어떤 말을 했는데 스승이 찬물을 끼얹는 답을 하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불쾌해진다. 화가 날 때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어휴, 증말 좀만 내버려두지.’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승의 말을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무의식적 차원에서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불쾌감이 정체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불안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과몰입해 있는데,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어떤 타자가 그 상황을 나와 다른 식으로 해석할 때 불안이 찾아온다. 그 타자의 해석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더 이상 그전처럼 과몰입을 할 수 없게 된다. 똑같은 오토바이를 타도 ‘이게 자유로운 느낌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따라붙어서 어제처럼 즐겁지 않고, 똑같은 남자친구를 만나도 ‘난 얘가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몸 좋은 남자가 좋은 건가?’라는 의문이 따라붙어서 혼란스러워진다. 이별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를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치 내가 배려심 넘치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쟤가 필요한 거 아냐?’라는 의문이 따라붙으면 더 이상 아름다운 사람 코스프레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승의 찬물 끼얹는 말을 들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 과몰입할 수 없게 되니까.


그렇다면 애초에 왜 과몰입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게 끝(정답)이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A는 왜 오토바이에 과몰입했을까? 오토바이가 자유의 끝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건 거대한 환상 아닐까?’라는 스승의 말에 불안했던 것이다. 만일 오토바이가 끝이 아니라면, 그 너머의 자유는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하고, 더 큰 자유를 향한 거친 시도들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B는 왜 남자친구에게 과몰입했을까? 지금의 연애가 사랑의 끝이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만일 지금의 연애가 끝이 아니라면, 더 밀도 높은 사랑이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하고, 더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고통들(이별의 상처, 혼자의 삶, 새로운 타자와의 마찰)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C는 왜 스스로에게 과몰입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정답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배려 있는 게 아니라 혼자 있을 수 없어서 헤어지지 못하는 거다.’라는 스승의 말에 불쾌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정답이 아니라면, 내가 헤어지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고민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혼자 설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고된 여정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자유를 향한 한 걸음, 더 밀도 높은 사랑을 향한 한 걸음, 더 강건한 어른을 향한 한 걸음. 그 모든 한걸음이 두려워 보일 때, 그냥 지금이 끝(정답)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지금 상황에 대한 미화와 극화, 그리고 과몰입이 일어난다. 스승의 찬물 끼얹는 말은 그 견고한 자기정당화에 균열을 내기에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미화와 극화, 과몰입을 걷어내면, 한 걸음이 무서워 주저앉아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은 용기의 문제일까? 첫 번째 한 걸음은 용기의 문제다. 하지만 두 번째 한걸음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과정’을 바라보는 감성(과정 그 자체를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의 문제다. 사실 A, B, C는 용기 있게 첫 번째 한 걸음을 걸은 이들이다. 모범생이었던 A는 자기의 금기를 깨고 용기 있게 오토바이에 도전했다. 안전한 연애만 하던 B는 자기의 금기를 깨고 용기 있게 위험해 보이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한 사람과 관계를 지속해오던 C는 용기 있게 그 관계가 더 이상 사랑이 아님을 직면했다. 첫 번째 한 걸음은 처음이기에 비장하기 그지없다. 덜덜 떨면서 걸은 한 걸음이기에 이왕이면 거기서 쇼부를 보고 싶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서 발생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과몰입 때문에 현재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이게 정답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굉장한 충격과 함께 깨닫게 된다. 아마도 스승의 찬물을 끼얹은 말들은 그 때늦은 현실자각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에어백 같은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스승은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 대해 과몰입과 찬물의 측면 모두를 스스로 볼 수 있길 바랐을 것이다. 그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니까. 어떤 것에 과몰입을 했다가 현실의 찬물을 직격타로 맞으면 더 이상 아무것에도 과몰입을 하기 싫어진다. 오토바이가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A는 무엇이 하고 싶어질 때마다 ‘이것도 거대한 환상이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친구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B는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겨도 ‘나 또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부분에 끌리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스스로의 모습을 미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C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든 또 자기기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과몰입이 ‘이게 정답이야!’라고 믿고 싶은 과열의 시기라면, 찬물은 ‘내가 뭘 하든 다 틀리겠지.’라고 믿는 냉각의 시기다. 이 찬물의 시기에 빠지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또 긴 시간을 주저앉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번째  걸음은 어떻게 걷는 것일까? 과몰입과 찬물을   오가고 깨달은 것이 있다. 과몰입과 찬물의 사이를 가야한다는 . ‘이게 정답이야!’라는 과몰입도 아니고, ‘ 틀리겠지.’라는 찬물도 아닌, '지금의 나는 정답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야.’라고 (정신승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알게  ,  번째  걸음을 걸을  있다. 오토바이는 거대한 환상이지만, 지금 오토바이를 욕망하는 내가 틀린 것도 아니라는 .  모순을 이해할 , 오토바이는 1 자유도 0 자유도 아닌 0.23 자유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진정으로 알게 되면 오토바이를 타는 나를 긍정하면서도 0.45 자유를 향한  번째 한걸음을 걸을  있다. 몸 좋은 남자와의 연애는 부분 사랑이지만,  부분 사랑을 욕망하는 내가 틀린 것도 아니라는 .  모순을 이해할 ,  연애는 1 사랑도 0 사랑도 아닌, 0.34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진정으로 알게 되면  연애를 긍정하면서도 0.56 사랑을 향한  번째 한걸음을 걸을  있다. 지금  모습은 정답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라는 . 그걸 진정으로 알게 되면, 지금의  모자란 모습을 긍정하면서도  나은 나를 향한  번째  걸음을 걸을  있다. 그것이 자기만족이다.




자기만족이란 무엇인가? '내가 0이 아닌 0.23이라는 것(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1이 아닌 0.23이라는 것(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그것은 내가 0도 아니고 1도 아닌 0.23이라, 즉 내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다. 0.23이 아닌 0만 보는 것, 0.23이 아닌 1만 보는 것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보는 마음이다. 이제야 알겠다. 삶은 정답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라는 말은, 0.23, 0.34, 0.45의 나의 모습·나의 욕망·나의 사랑을 모두 긍정하는 일이라는 걸. 그 모두를 긍정해온 사람만이 0.23, 0.34, 0.45의 너의 모습·너의 욕망·너의 사랑을 사랑해줄 수 있다는 걸.


삶은 0.23의 기쁨을 잘 받아 안아서, 그것을 딛고 0.34, 0.45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를 0.5라고 미화해서도, 0.1이라고 비하해서도 안 된다. 내가 딛을 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그곳에 발을 딛고 다음 한 걸음을 걸을 수 있으니까.


나는 1이 아니고, 0도 아닌, 0.23이다. 그러니 이제 0.34을 향한 두 번째 한 걸음을 내딛어야겠다. 이번엔 비장한 마음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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