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Feb 22. 2022

진심과 매력

“언니는 정말 예쁜 사람이야.”


친한 동생이 언젠가 한 말이다. 그 말을 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 알았다. 얘 진심이구나. 그 당시 나는 끝도 없는 자기비하에 빠져 있었다. 온통 내 어둠, 내 고통 밖에 보이질 않았고, 그랬기에 스스로의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 괴물 같은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동생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언니는 예쁜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 언니가 좋다고.


그 말을 듣고 고맙고 미안했다. 그 아이가 정말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고마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와닿지 않아서 미안했다. 그 아이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말을 듣고 ‘그래, 나는 예쁜 사람이었어’라고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자기비하에 빠져 그 아이를 걱정시켰다.


너와 나(2020), 정주현 화백 작


시간이 흘러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말했다.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속상하고 절박한 마음에 터져 나온 말이었다. 진심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긍정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잘은 모르지만, 내 마음은 분명 그에게 전달되었을 테다. 아마도 그 또한 나에게 고맙고 미안했을 테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고마웠을 테고, 그 말이 별로 와닿지 않아서 미안했을 테다. 내가 나를 걱정하던 동생의 진심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진심은 통한다.’ 나는 그 흔한 말을 믿었던 것 같다. 하긴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한 사람의 진심어린 마음은 상대에게 전달되니까. 하지만 진심, 그러니까 상대가 행복하길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을 곧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본다. “넌 예쁜 사람이야.” 내가 만일 그 말을 스승에게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나는 그의 진심이 고맙기만 할 뿐 마음은 제자리였을까? 아닐 것이다. 그 말을 스승이 했다면 나는 자기비하의 늪에서 적어도 한 걸음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었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말을 다른 사람이 한들 고맙기만 할 뿐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설령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말을 해도 나는 자기비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나는 그들에게 그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렇게 내가 지정한 의미 있는 타자. 바로 그 타자의 진심만이 사랑이 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나의 절박한 외침은 왜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까? 그건 내가 그에게 의미 있는 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나를 의미 있는 타자로 지정했다면, 즉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만이 의미가 있어.’라고 생각했다면, 내가 어떤 개떡 같은 논리와 투박한 감수성으로 전달을 해도, 내 진심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화살은 나를 향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인가?




라캉 수업에서 대타자 개념을 배웠다. 대타자는 마치 신과 같은 절대적인 타자다. 아이에게 부모는 대타자다. 아이는 부모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니까.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아무리 옆집 아줌마가, 학교 선생님이 잘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가족주의 사회에서 아이는 옆집 아줌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부모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로 자라게 된다.


사랑은 무엇인가? 철학을 배우면서 사랑에 관한 많은 정의를 배웠다.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정의가 있다. “진정한 사랑은 네가 나의 엄마가 되어주고, 내가 너의 아빠가 되어 주는 일이다.” 사랑은 원래의 부모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를 새로운 부모로 맞이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어려울까? 아이들의 세상도 아니고   어른들의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의 아빠가 되어주는 ,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주는 일은 드럽게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준다는 것은, 내가  성인 남성의 엄마 역할을 해줄  있을 정도로 성숙해야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의 아빠가 되어준다는 것은, 내가  성인 남성을 아빠로 받아들 있을 만큼 그를 절대적으로 믿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 잣대로 냉정하게 돌아보니 내가 왜 사랑을 못하는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건 바로 내가 매력이 없어서다. 일단 나부터가 내 삶을 감당 못해서 처울고 징징대고 무기력하기 일쑤인데, 대체 누가 나를 엄마로 삼고 싶겠나. 일단 나부터가 남 눈치나 보고 욕먹기 무서워하고 세상 앞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데, 대체 누가 나를 보고 "네가 날 인정해주는 게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어.”라고 생각하겠나. 내가 밀도 낮은 사랑을 하는 이유는 내가 밀도 낮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식으로 표현하자면 ‘정체성(고름)’이 낮은 사람이라서 그렇다. ‘정체성’이 낮은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탈영토화)할 힘이 없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진심’에 연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진심’이기만 하면, 나는 마치 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진심은 사랑의 전제조건일 뿐,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역량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기쁜 삶을 살 수 있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 그렇다면 사랑의 역량은 예술적 역량 아닐까. 기쁨의 예술을 할 수 있는 역량.




나는 매력이 없구나. 나는 성숙하지 않구나. 나는 소중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힘이 없구나. 나는 사랑의 역량이 없구나.


이 모든 걸 인정하는 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또 걸렸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았으니까. 내가 사랑의 역량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 순간이 절망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만족으로 느껴져서 다행이다.


사랑은 공명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매력적인 리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 내가 한 사람을 보듬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 성숙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야지. 그렇게 사랑에 한 걸음 더 다가가야지. 나는 이제 정말 사랑하며 살고 싶으니까.

무제(2022), 정주현 화백 作


작가의 이전글 진실해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