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그런데 호감이 뭐야?”
좋아하는 동생이 있다. 그 동생과 동고동락 하며 가까이 지낸지 거의 4년. 그 동생은 이제 나에게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사이가 되었다. 그 동생은 사람들과 관계를 많이 안 맺어본 탓에 사람들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그래서 그 궁금한 것들을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나에게 자주 물어본다. 기분 전환이나 하자고 둘이서 강화도 바닷가에 놀러갔던 그 날. 그 날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생이 물었다. 언니, 호감이라는 감정이 뭐냐고.
맥락은 이랬다. 우리는 남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동생은 남자들이 호감은 있는데 고백은 못하는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 동생은 좀 예외적일 정도로 ‘남자친구’라는 배타적 관계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남자친구 혹은 남자친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관계에만 관심을 갖고, 그렇지 않은 관계, 그러니까 호감 정도만 표시하는 관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아이가 ‘호감’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그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했을까. 그 아이에게 남자친구가 될 가능성이 없거나 적은 관계도 충분히 너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릴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감정이 요동쳐버렸기 때문이다. 조곤조곤 ‘호감’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다가 막판에는 열폭해서 외쳐버렸다. “야! 너는 남자들이 항상 너를 호감으로 대하니까 호감이 뭔지 모르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포효다. 하지만 창피해도 언젠가 이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피해의식에 대해 말하지 못하면, 다른 이의 피해의식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피해의식이 우리 모두를 슬픔으로 몰아넣는 가장 강력한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슬프기 때문에 너로 슬펐으면 하는 마음. 나는 그 마음이 싫다. 나는 이제 그 마음을 넘고 싶다.
나는 왜 그 아이에게 열폭했을까. 그 아이는 얼굴이 예쁘고, 나는 외모에 피해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왜 생기는 걸까? 철학자 황진규는 피해의식은 일부 계층이 쾌락을 독점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한다. 인간은 쾌락의 존재라 누구나 쾌락을 누리고 싶은데, 일부 계층이 그 쾌락을 독점하는 바람에 나는 쾌락을 누리지 못해(피해를 받아) 피해의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왜 외모에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을까? 예쁜 아이들이 쾌락을 독점해서 내가 피해 받았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참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큰 아이였다. 그래서 사랑받기 위해 늘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예쁜 아이들이 너무 쉽게 쾌락을 독점해버리는 바람에 내가 피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몇몇 순간들이 생각난다. 나와 친하던 남자사람친구가 뒤에서 낄낄대며 나의 외모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는 것을 들었던 순간. 내가 정말 좋아했던 남자친구가 학교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와 바람난 걸 알았던 순간. 성형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고 화장도 떡칠해서 나도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로션만 발라도 빛이 나는 여자애 앞에서 화장한 내 자신이 초라했던 순간. 원래부터 예쁜 애들이 심지어 마음도 덜 꼬였다는 걸 알아버렸던 순간. 어느 순간부터 정말 매력적인 남자에게는 ‘쟤가 왜 나를 좋아하겠어’라는 생각에 관심조차 생기지 않았던 순간. 지하철에서 고등학교 남학생이 내 외모 조롱을 하는 걸 듣고 “너 이 새끼 신고한다!”하며 씩씩대며 고딩이랑 진심으로 싸웠던 순간. 이렇게 쓰고 나니, 피해의식은 참 사람을 작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꽤 오랜 시간 그 동생에게 종종 열폭을 했다. 나는 그 아이가 예뻐서 쾌락을 독점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기가 쾌락을 독점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아이는 자기비하가 심한 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네가 쾌락을 독점하는 면이 있다고 말을 해도 들릴 리가 있겠나. 그래서 갈 곳 잃은 열등감이 오랜 시간 마음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알겠다. 내 세계에서는 그 아이가 쾌락을 독점한 게 맞고, 그 아이의 세계에서는 쾌락을 독점은커녕 누린 적도 없는 게 맞다. 그 이중의 진실을 이제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겠다.
내 세계에서 그녀는 쾌락을 독점한 것이 맞다. 사실 나는 예쁜 아이와 정말 가깝게 지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예쁜 여자가 어떤 삶을 사는지 짐작만 할 뿐, 삶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예쁜 아이와 생활을 공유할 정도로 친해지면서 진짜 체감하게 되었다. ‘일부 계층이 쾌락을 독점하는 것’은 맞다는 사실을. 그 아이와 생활을 해보니 그 아이는 호감을 모를 만 하다. 어딜 가나 가만히 있어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녀에게 그냥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데 남자가 나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일은 내 인생에서는 이벤트급 사건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인생에서는 그 상태가 기본값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호감에 대한 레이더가 극도로 발달하고, 그 아이는 별로 발달하지 않을 수밖에.
반대로 그 아이의 세계에서 보면, 그 아이는 쾌락을 누린 적이 없는 게 맞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이런저런 남자들이 보내는 호감을 ‘쾌락’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쾌락은 자기 남자친구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것을 가졌다고 해서 쾌락을 느끼지는 않는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가졌을 때 쾌락을 느끼는 경우는, 본인이 그게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뿐이다. 그러니 나는 남자들의 호감을 쾌락이라 생각하고 그 아이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과거 어느 지점에 남자들의 호감이 결핍된 경험이 있었고 그 아이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남자들의 호감을 욕망하는 걸까? 오늘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시 찬찬히 생각해봤다. 지금까지 그 동생에게 호감을 표했던 남자들을 떠올려봤다. 나는 그들을 욕망하나? 사실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간 나는 왜 열폭을 했던 거지? 여성으로서 그 동생의 삶이 편해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제 정말 욕망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냥 상처받을 각오로 다가갈 것 같다. 무엇을 했을 때의 상처보다 무엇을 하지 않았을 때의 후회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그 상처가 지나치게 커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적어보이는 사람, 내 경우에는 예쁜 사람들이 막연하게 부러웠던 것이다. 예전과 지금의 차이는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느냐다. 예전의 나는 온통 시선이 상처에 가 있었다. 그러니까 욕망보다 상처가 더 커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간 욕망을 향한 여러 번의 헛발질을 해보면서, 나는 점점 시선이 상처에서 욕망 쪽으로 옮겨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상처가 더 작아보이게 된 것 아닐까.
그리고 예쁜 아이랑 친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삶은 한편으로는 참 불공평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공평하다는 것. 나는 외모란 학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학벌이 좋으면 아무 회사나 들어가기 쉽다. 그래서 거절의 상처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학벌이 좋다고 회사생활을 잘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회사생활은 다양한 타자들과 부딪혀야 하는 실전 중의 실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외모가 출중하면 누구와도 연애를 시작하기 쉽다. 그래서 거절의 상처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외모가 출중하다고 해서 좋은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연애는 두 사람의 실존이 가장 강력하게 부딪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벌이 좋으면 주변 사람들이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그 기대를 의식하다가 헛발질을 하기 쉽고, 외모가 출중하면 상대방이 환상을 가지기 쉽기 때문에 자기 진짜 모습을 보이기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러니 결핍이 꼭 나쁜 것도 아니고, 결핍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이런 애매한 결론에 화가 났겠지. 하지만 이게 내가 4년 동안 나의 결핍과 너의 결핍을 비춰보며 다다른 삶의 진실이다.
“언니는 이제 피해의식이 없어졌어?”
"음, 없어지진 않았는데 옅어졌어."
피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제 그 동생이 물었다. 짧게 대답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글로 다시 답을 하고 싶어졌다. 나는 종종 그 아이에게 또 열폭을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아이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착하기도 하고, 나에게는 부족한 예술적인 면마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언젠가 스승이 한 제자에게 써주었던 글을 읽었다. 스승이 제자에게 야박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다음 날 생각해보니 그게 사실은 ‘너’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너’에게 질투가 나서 했던 조언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스승은 그 제자에게 순간적이지만 질투를 느껴 미안하다고 공개적인 글로 사과를 했다. 나는 그때 스승이 정말 근사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스승은 예술가는 누구보다 감정과 욕망에 섬세하게 반응하기에, 주변에 반짝이는 감정과 욕망이 보이면 쉽게 질투하고 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크고 작은 질투를 그 동생에게 종종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나도 보고 배운 것이 있다. 나는 스스로 작아지고 싶지 않다. 나 또한 내 스승처럼 소중한 사람의 반짝거림을 질투하고 시기하기보다는 찾아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 나름대로 피해의식을 극복해보고, 앞으로 계속 이런 부끄러운 고백의 글을 써나가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나도 반짝거림을 잃지 않도록 늘 애를 쓰며 살고 싶다.
상처받기 무서울 때 게걸스러운 욕망이 생긴다. 게걸스러움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그건 약한 사람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상처를 받든 뭘 하든, 그냥 한다. 그는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다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다. 지금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