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Sep 01. 2022

'피해자'와 '가해자' 너머

나는 학창시절에 왕따 주동자였던 적이 있다. 당시 꽤 친했던 친구를 날 배신했다는 이유로 따돌렸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영악하고 비겁했다. 그 친구에게 화가 났으면 일대일로 해결하면 될 일을, 당시 반에서 권력이 꽤 있었다는 이유로 둘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가고 나서 그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원래 꽤 밝은 친구였는데 그 왕따 사건 이후 친구들을 사귀는 게 무서워져 소심하고 어두운 성격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 한 구석에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몇 번 시도하다가 말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서른이 넘어 나는 한 인문 공동체에 들어왔다. 거기서 학창시절 왕따를 당했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또래 집단에서 소외당한 경험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절절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학창시절 내가 왕따를 시켰던 그 친구가 떠올랐다. 미안했다. 그 친구도 나 때문에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버렸을 테니까. 나는 왕따를 당한 경험은 없지만, 한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이후 그 사람의 삶을 얼마나 한계지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때였다. 멋도 모르고 사귄 남자친구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에게 헌신했고 그는 나를 함부로 대했다. 당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이었다. 그가 아무리 나를 함부로 대해도 버림받는 게 두려워서 가만히 있었다. 남자친구 없이 혼자 외로운 유학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나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주고 떠났다. 내가 홀로 수술실에 있을 때 그는 나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와 사귀던 당시 다른 여자도 있었다고 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남자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 생겼다. 남자를 사귀는 것이 무서워졌다. 또 그 만큼의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싶어서.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도 피해의식이 생겼다. 나는 내가 불쌍하고 가여워졌다. 피해의식은 나를 ‘절대적인 피해자’ 위치에 놓게 만든다. 그에게 헌신했던 나는 ‘절대적인 피해자’고, 나에게 상처준 그는 ‘절대적인 가해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돌이 떨어져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천하의 쓰레기 같은 놈이 내 마음에 치명상을 입혔다고 생각했다. 억울했다. 한 동안 그런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살았다. 나는 남자들을 싸잡아 혐오했고, 그 후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만 골라서 사귀었다. 그렇게 내 상처는 내 삶을 한계 지었다.



나중에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야 겨우  상처에서 벗어날  있었다. 나는 ‘절대적인 피해자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헌신했지만, 그건 단지 내가 그에게 버림받아 혼자가  것이 두려워서 그리  것이었을 , 그를 위한 마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내가 잘해주었어도 그는 그걸 사랑으로 느낄  없었던 것이다. 헌신은 나를 위한 마음이지, 너를 위한 마음은 아니니까. 그는 나와 사귀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종종  마음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질투나 자기연민에 휩싸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첫사랑의 그녀가 나보다 그를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그러니 자꾸만 그녀가 생각났던  아니었을까. 그와의 연애를 되짚어보면서 내가 그를 사랑해주지 않았던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고, 겉보기엔 잘해주었지만 오로지  방식으로만 잘해주었으며, 그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걸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내가 혼자 되지 않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나를 사랑할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는 나를 떠난 것이다. 물론 그가   성숙했더라면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이별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를 ‘절대적인 가해자 치부하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또한, 그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고 싶지 나의 ‘나밖에 모르는 마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상처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  사람을 증오하게 되어 있으니까. 증오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다.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순간,  이상 그를 증오할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친구가 있다. 몇 년 전 나는 그 친구에게 큰 상처를 줬다. 그 친구는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나는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좀 더 정직히 말하자면 그 친구와 관계를 끝낼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 친구와 헤어질 수 없었기에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죄책감에 깔려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 친구에게 잘해주려고 애를 썼다. 꽤 오랜 시간 그랬다.  


그 친구는 나에게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겼다. 나를 원망했다. 내가 없었다면 평탄했을 삶인데, 나 때문에 자기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내가 준 마음의 상처는 분명 그 친구의 삶을 어느 정도 한계 지었다. 그는 그때 이후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걸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미안했다. 분명 나는 그에게 미안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피해의식은 그의 삶을 파고 들었고 우리의 관계 또한 잠식해 들어갔다. 그 친구 앞에서 나는 항상 ‘죄인’이었는데, 대체 언제 이 ‘속죄’가 끝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나를 끊임없이 원망했고 나는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비위맞추기 바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어딘가 모르게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예전에 치고받고 싸울 때가 덜 공허했다. 언젠가부터 묘하게 둘 다 역할 놀이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나를 원망하고 탓하는 ‘피해자’ 역할, 나는 그에게 눈치 보며 절절매는 ‘가해자’ 역할. 그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데 아픈 척 하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 그의 관계는 기묘하게 뒤틀려갔다.


그러던 중 나에게 내 삶을 돌아볼 기회가 다시 한 번 생겼다. 그때 그와의 관계를 다시 되짚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나 순전히 내 이기심 때문에 그에게 상처를 준 건 맞지만, 이제 더 이상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지는 않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게 계속 미안한 척을 하면서 비위를 맞춰줬던 것은, 단지 내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에게 또 한 번 비겁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으면, 그 사람에게 정말로 미안한 마음만큼 갚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 그다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안한 척, 도리를 다하는 척 속죄의 연기를 한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에 계속 짜증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안 미안한데 미안한 척을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적어도 그에게는 그러면 안 되었다. 사실은 내가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무서웠던 것이면서, 마치 너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척 기만을 떨면 안 되는 거였다. 사실은 ‘나’를 위하는 마음이면서 ‘너’를 위하는 척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정직해야 했다. 적어도 그 친구에게는.


“나 너한테 상처준 거 맞아. 근데 나 더 이상 너한테 안 미안해.”


어느 날 그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한 동안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얼마동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만 느끼는 것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나와 그의 관계에 어떤 무거운 짐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어딘가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후로도 그는 여전히 나에게 툴툴댔지만 그 툴툴거림의 느낌이 묘하게 바뀌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 이후 처음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것이 아닐까 싶다.




피해자는 언제 피해자에서 벗어나고, 가해자는 언제 가해자에서 벗어나는가. 그건 내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오간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다.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피해자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 또한 내가 피해자 같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사실은 내가 보이지 않는 ‘가해’를 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내가 가해자 같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사실은 내가 보이지 않는 ‘피해’를 받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어떤 상황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사실 살아가는 데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다. 정말로 아무 잘못 없이, 길을 가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질 수 있다. 사고는 내가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아무 맥락 없이 그냥 들이닥치기도 하는 것이니까. 진정으로 중요한 건, 사고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건, 들이닥친 사고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걸 그냥 하는 것이다. 내가 가해자인 상황은 줄여가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입힌 상처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한계 지을 수 있는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문제는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다. 그때 나 또한 피해의식에 잠식되지 않기를.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더 나아가 아무 이유 없이 길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도, 잘잘못을 따지며 억울해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냥 해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그렇게 피해자-가해자의 논리 너머, 어떤 상황에서도 내 삶을 의연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작가의 이전글 헤어지거나 사랑하거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