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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25. 2022

헤어지거나 사랑하거나

사랑은 감정의 동조 현상이다.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엄마와 같이 살 때의 일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항상 온 집안의 불이 다 꺼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티비의 파란 불빛만 어른거렸다. 소파에는 엄마가 누워 있었다. 멍한 눈으로 티비 화면을 보면서.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티비에서는 연예인들의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실에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못볼 걸 본 사람처럼 쌩하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가 꼴보기 싫었다. 집안을 가득 메운 우울과 무기력의 기운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방이 유일한 숨쉴 공간처럼 느껴졌다. 방에는 적어도 불빛은 있었으니까. 나는 집이 싫었다. 어둡고 음습한 집이 싫었다. 나는 엄마가 싫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싫어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라고 나를 들들 볶아대던 엄마가 싫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나의 감정에 무관심 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게 했던 엄마가 싫었다. 나를 기묘한 방식으로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엄마가 싫었다. 엄마가 싫어서 오랜 시간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어떻게 하면 엄마가 상처받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동안 엄마에게 상처가 되는 잔인한 말만 골라서 했다. 내 가시돋힌 말에 엄마가 상처를 받으면 마음 한 구석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엄마의 슬픔이 나의 기쁨이었다. 나는 엄마를 증오했으니까.


단 한 번도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엄마는 나에게 늘 증오의 대상이었다. 철이 들고나서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엄마와 따로 살게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엄마를 붙들고 감정싸움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졌다. 안 만나면 그만이었다. 가끔 만나면 잠시 사회적 가면을 쓰고 듣는 둥 마는 둥 연기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점점 엄마를 봐도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이 잦아들었다. 나는 엄마가 애초에 내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증오했지만 이제 증오할 이유는 없어졌고, 애초에 엄마는 나를 그다지 사랑해주지 않았으니 나에게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어른이 된 척 한 것이다.


"너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나 사실은 엄마를 좋아했다고 뒤늦게 후회하지 마라."


나에게 엄마는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허풍을 떨고 있을 때 스승이 일침을 놨다. 나는 엄마를 좋아하는데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 때문에 증오하는 감정이 동시에 올라오니까, 그 애증의 혼란을 견디지 못해 급기야 무관심한 척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스승은 내가 엄마를 증오하는 마음만큼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승의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내가 엄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와닿지가 않았다. 한 번도 내가 엄마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엄마는 나에게 그저 의무의 대상처럼만 느껴졌다.





사랑은 무엇일까? 아니 사랑까지는 너무 거창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스승은 사랑을 감정의 동조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쉽게 말해, 사랑하면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된다는 의미다. 그저 사랑을 달콤하고 기쁜 것으로만 알던 철없던 나는 나이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사랑이 감정의 동조 현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우울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싫어했고 그 만큼 세상을 두려워했다. 감정표현에 서툴렀던 그는 자기 힘든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온몸에서 느껴졌다. 엄마집 거실을 가득 메우던 그 어둡고 우울한 기운이. 그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이상하게 마음이 우울해졌다.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답답해 한숨이 터져나오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기쁨인데 그를 만나면 자꾸 슬퍼지니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자꾸만 마음에 슬픔이 쌓였던 나는 그 슬픔을 감당하질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왜 슬픈지도 모른 채 슬퍼진 것이니까. 그 가득 쌓인 슬픔은 한계치를 넘으면 눈물이 되어 터져나왔다. 그 친구 앞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는 날이 잦아졌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는 채 울었다. 사랑이 감정의 동조현상인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눈물이 되어 표현된 슬픔은 다시 그에게 전이되었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었고, 나의 슬픔이 또 너의 슬픔이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슬픔이 어디서부터 시작된지도 모른채 뒤엉켜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 되었다. 그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한참 시간이 지나 이제야 알겠다. 내가 무지했던 부분이 어디였는지. 그건 사랑이 감정의 동조 현상이라는 말을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네가 슬프면 나도 슬퍼."와 같은, 연인들의 사랑의 속삭임 정도로 생각한 것이었다. 사랑이 감정의 동조 현상이라는 말은 그렇게 아름다운 말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에 빠진 것은 그를 만나면 그의 우울이 나에게 동조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를 피해 황급히 방으로 도망친 것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보면 엄마의 우울이 나에게 동조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를 좋아했으니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감정은 동조되지 않는다.


나의 오만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나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내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내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스승이 나에게 더 늦기 전에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을 직시하라고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일 테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슬픔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슬프고 싶은 인간은 없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간은 기쁨을 쫒는 존재이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과 슬픔의 동조 현상이 일어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도망을 택하거나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공황에 빠졌다. 엄마의 슬픔 앞에서는 도망을 택했다. 나는 사실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짓된 방어기제로 엄마를 외면했다. 좋아했던 친구의 슬픔 앞에서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졌다. 그가 나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헤어지지 못했고 그가 나에게 슬픔을 주었기에 함께 슬픔에 빠져 허우적댔다.




죽거나 사랑하거나. 죽지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만 삶을 표류하며 산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그랬다. 헤어지지도 사랑하지도 못해 관계 안에서 표류했다. 그 끼어있는 상태에서 쌓여버린 슬픔에 잠식되거나 그 쌓인 슬픔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렇게 헤어지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관계를 지속했다. 죽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처럼.


헤어지거나 사랑하거나. 헤어질 수 없으면 사랑해야 했다. 사랑할 수 없으면 헤어져야 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를 좋아했지만 엄마를 사랑할 역량이 없었다. 사랑의 역량이 무엇일까? 악착같이 기뻐질 수 있는 역량이다. 내가 사랑의 역량이 있었다면 엄마와 슬픔의 동조가 일어났을 때 내가 악착같이 기뻐져 슬픔을 덜고 기쁨을 늘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엄마도 슬픔이 줄고 기쁨이 늘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사랑의 역량이 없었다. 엄마의 슬픔을 껴안기는커녕 내 인생의 작은 슬픔에도 잠식 당하기 일쑤였으니까. 엄마를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면 하루빨리 헤어졌어야 한다. 엄마에게 미안해도 그렇게 했어야 한다. 나는 사랑하지 못했으면서 헤어지지도 못했다. 사랑하지도 헤어지지도 못해 불어날대로 불어난 슬픔의 늪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가장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가장 잔인한 상처를 주고 받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기쁨의 동조가 일어났다면 행운이다. 서로 계속해서 충만해지는 기쁨의 나선을 타면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슬픔의 동조가 일어났다면 악착같이 기뻐져야 한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될 때,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사랑은 감정의 동조이지, 기쁨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될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미성숙한 일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자가 다다르는 곳은 언제나 늪과 같은 공황이다. 공황 속에서 슬픔은 불어나고 결국 그 엉켜버린 슬픔은 관계를 잠식하게 된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둘 뿐이다. 헤어지거나 사랑하거나. 헤어질 수 없으면 사랑해야 한다. 악착같이 기뻐져서 사랑할 역량을 키워야 한다. 해야할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루틴을 지키고, 정리할 수 있는 슬픔을 하루빨리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 사랑할 수 없으면 헤어져야 한다. 어쩌면 후회없는 이별은 악착같이 사랑하려 애를 쓴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끝은 더 이상 너의 기쁨이 기쁘지 않고, 너의 슬픔이 슬프지 않을 때다. 죽거나 사랑하거나. 헤어지거나 사랑하거나. 언제나 삶의 진실은 이토록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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