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現量, 비량比量, 비량非量, 그리고 방편方便
4년 전 일이다. 스승이 암스테르담을 가고 싶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은 스피노자가 파문을 당하고 철학을 했던 곳이다. 스승은 스피노자를 좋아한다. 그 당시 철없던 나는 스승의 바램을 잘 읽어내지 못했다. ‘쌤이 가고 싶은 곳이니까 언젠가 가요.’ 이런 마음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좋아하면, 그 사람이 살던 곳을 가보고 싶고 그 사람이 걸었던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걸. 그렇게라도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걸. 4년 전 나는 그 마음을 몰랐다. 그래서 언젠가 가자고 생각했다. 모지리는 항상 '언젠가'를 생각한다.
“너 내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 구경가볼래?”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인공위성 지도에서 그 동네를 찾아 보여주면서.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그가 일하고 돌아와 고충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생각했다. ‘일하는 데 따라가볼까?’ 하지만 가지 않았다. 당시에는 가지 못할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났다. 한 동안 그 관계를 복기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잘못한 순간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 제일 후회가 되는 건 그가 살던 동네, 그가 일하는 곳에 가보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나는 가지 못할 이유가 많다고 생각했다. 멀어서, 바빠서, 생소해서, 내 상황이 있어서.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나를 버리고 그의 삶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지키고 싶었던 만큼 나를 지우지 못했고, 지우지 못한 만큼 그의 삶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살던 동네, 그가 일하던 곳에 가볼 수 있었다. 그건 당시에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를 버리고 너에게 다가가려고 걸을 수 있는 한 걸음을 걷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이 후회로 남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머무는 공간에 가보려고 한다. 사실 나를 지우고 한 사람의 삶에 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타인의 삶을 마치 내가 사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껴보겠다는 것이니까. 지금의 내 깜냥, 내 감수성으로는 잘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공간에라도 가보는 것이다.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백번 말로 들어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단박에 느껴질 때가 있다. 그의 과거의 공간에 들어가면 그의 삶의 한 장면이 그 공간에 영화처럼 포개지기도 하고, 그의 현재의 공간에 들어가면 그 공간에서 지금의 생활과 감정이 배어나오기도 한다. 기억이 난다. 집에 누우면 악몽을 꾼다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안쓰러웠던 마음이, 벽 한면이 곰팡이로 가득 찬 그의 집에 갔을 때는 간절함으로 바뀌었던 것을. 물론 공간에 가보는 것도 비겁한 것이다. 거리를 두는 것이다. 거리를 두는 만큼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느끼는 건 그 삶에 섞여 들어갔을 때만 가능하다. 나를 비우고 그의 삶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함께 삶을 섞어나갈 때만 가능하다.
어제 철학 수업에서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에 대해 배웠다. 현량과 비량은 불교 용어다. 현량은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이다. 내 앞에서 불이 타오를 때 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현량이다. 비량은 이미 아는 사실을 토대로 추측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먼 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불이 났다는 것을 유추하는 것이 비량이다.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비교할 비比'가 아닌 '아닐 비非'자를 써서 비량非量이다. 이 비량非量은 잘못된 앎을 뜻한다. 먼 곳에 안개가 낀 것을 보고 불이 났다고 착각하는 것, 아니면 불이 뜨겁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이 이 비량非量에 해당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인 비량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거야!"라는 믿음이다. 이 앎은 돈이 많은 삶을 직접 보고 느낀 사람의 앎이 아니다. 막연하게 돈이 많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량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야." 이게 그 삶을 직접 보고 느낀 사람의 현량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현량과 비량을 배우고 계속 생각이 맴돌았다. 한 사람의 삶이란 현량과 비량比量, 그리고 비량非量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아닐까. 한 사람이 직접 보고 느낀 앎現量. 그 앎을 통한 유추比量. 그리고 직접 보고 느끼지 않은 잘못된 앎非量. 이 현량과 비량比量, 비량非量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의 철학이 만들어진다. 모든 이들에게는 삶의 철학이 있다. 그게 어떤 현량現量, 어떤 비량非量을 토대로 삼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미숙한 두 사람의 사랑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의 철학을 마주함으로써 나의 철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이다. 내가 보고 느낀 것과 네가 보고 느낀 것이 다르다는 것. 내가 보고 느끼지 못한 세상이 있다는 것.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 네가 아는 세상과 내가 아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 그렇게 '나'의 앎이 전부가 아니라 '너'의 앎이 있다는 것을 진짜로 알게 될 때 사랑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람의 사랑의 무엇인가. 지혜로운 자가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혜로운 자의 앎은 현량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가깝다. 지혜로운 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가 아직 보고 느끼지 못한 현량을 비량比量을 통해 알려주고, 그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앎非量들을 바로잡는다. 연기가 나도 불이 나는지 모르는 아이에게 연기가 나면 불이 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불이 빨갛고 예뻐서 손 대려고 하는 아이에게 불은 차가운 게 아니라 뜨거운 거라고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사랑이다. 지혜로운 자는 불을 직접 보고 느낀 적이 많기 때문에 조금만 연기가 나거나 타는 냄새가 나도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다. "너 이렇게 가면 외로워지는 거야!" 삶에 별 다른 문제가 없어보였던 어떤 아이의 삶에 옅게 탄내가 나는 걸 맡고 스승 혼자 너 좀 있으면 불이 날 거라고 소리를 지르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날 나는 마치 불이 난 것처럼 절박해보이는 스승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연기가 나면 불이 나는 지 모르는, 그리고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도 모르는 아이는 그 마음을 보지 못했다. 스승이 자기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에 기분만 나빠했다. 종종 스승이 나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윽박을 지르는 장면을 보곤 한다. 그때 나도 그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한테 화를 내지. 내 삶에 지금 연기가 나는 건 모르고 태평성대하게 서운하다고 투정이나 부렸던 것이다.
윽박을 질러 불이 뜨겁다는 걸 가르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어떤 아이는 윽박을 질러도 불에 손을 갖다 대고, 어떤 아이는 자기에게 윽박을 질렀다고 화를 낸다. 그리고 사실 불이 뜨거우니 절대 손을 대지 못하게 막기만 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가장 좋은 부모는 아이가 손에 화상을 입지 않는 선에서 불이 뜨거우니 위험하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 부모다. 아이가 불에 손을 갖다댈 때 손이 뜨겁기 직전에 알려주는 것이다. "불은 뜨거운 거야!"
불이 뜨거운지 모르는 아이에게 불이 뜨겁다고 가르치는 것. 연기를 본 적 없는 아이에게 연기가 나면 불이 나는 거라고 가르치는 것. 사랑해보지 않은 아이에게 사랑은 이런 거라고 가르치는 것. 진짜로 외로워본 적 없는 아이에게 사랑하지 않으면 외로워지는 것이고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것이라 가르치는 것. 내가 보고 느낀 것을 한번도 보고 느낀 적이 없는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 그 막막함과 지금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고 있는 절박함 사이에서 '방편'은 나온다.
“쌤은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요?”
언젠가 내가 감탄하며 한 말에 스승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가끔 스승이 사업가의 딸로 자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사업'의 언어로 사랑을 가르칠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네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그 마음 때문에 스승은 나를 위한 방편을 고민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이에게 불을 갖다대지 않고 불이 뜨겁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줄까. 그 아이가 알고 있는 현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 나는 사업에 현량이 있다. 사업은 내가 적지 않은 시간 직접 보고 느낀 분야니까. 나의 현량을 시작점으로 삼아 비량比量을 통해 스승의 현량을 전달하는 것. 그게 내가 직접 보고 느끼지 못한 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스승은 늘 내 삶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내가 진짜로 알고 있는 건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그걸 토대로 나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스승은 똑똑한 게 아니라 나를 지우고 너에게 들어가보려고 긴 시간 고민하고 애를 썼던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 아이가 보는 세상을 보려고 거실을 기어다녔다던 스승의 일화가 생각난다. 지혜로운 사랑이란 설 수 있는 사람이 기어보는 것이다. 아이에게 "불이 뜨거우니 만지지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거 아뜨뜨야"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그 사람의 언어로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받았다. 나를 지우고 네가 되어보는 사랑. 그러니 나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다. 먹튀는 금지다. '언젠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