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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08. 2023

'피해자'와 '가해자' 너머 II

일단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는 네가 밉다. 너를 증오한다. 증오가 별 게 아니다. 너의 기쁨이 나의 슬픔이고, 너의 슬픔이 나의 기쁨이면 증오다.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네가 웃으면 화가 날 것 같고, 네가 슬프면 기쁠 것 같다. 억울하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을 잘 풀어보려고 난 꽤 오랜 시간 애를 썼다. 넌 나의 애씀의 시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끝에 내 앞에 던져진 것은 더 이상 손 쓸 수 없이 꼬여버린 실타래다. 이제 나에게는 그 실타래를 칼로 베어버리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그 칼마저 칼 맞은 내가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다. 지치고 힘들다. 그래서 난 당분간 네가 미울 것 같다. 웃는 얼굴로 내 등에 칼을 꽂은, 그리고 내 등에 칼을  꽂는 걸 방관한 너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 또한 안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만은 못한다. 나에게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 틈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너와 관계를 끊는 게 무서워서 만들어낸 억지스러운 거짓 이해가 아니다. 나는 언젠가 ‘너’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이에게 치명상을 입힌 적이 있다. 나의 부주의와 무책임, 그리고 이기심 때문에 그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친구를 잃었다. 그건 그에게 이혼에 버금가는 상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반 정도의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그때 내가 내 자신에게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이의 심장에 내 손으로 칼을 꽂은 나를 도무지 긍정할 수가 없었다. 너도 내가 겪었던 그 긴 어둠의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좋아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사람에게 내 손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 아마 많은 부모들이 자기가 자기 손으로 자식들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일 테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피해자의 고통만큼이나 가해자의 고통도 아프다. 내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외면하면 삶은 늪 같은 죄책감에 잠식되고, 내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직면하면 내가 꽂았던 칼이 고스란히 내 심장에 꽂힌다. 사실은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인 ‘자기비하’가 아니라, 내 자신을 진짜 죽이고 싶을 만큼의 ‘자기혐오’와 후회가 밀려온다. 그건 피해자의 고통만큼이나 고통스럽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고통은 한 사람을 성숙시킨다. 너는 나를 너보다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건 내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횡단해본 경험이 있어서다. 더 정확히는 피해자의 고통도 겪어보았고, 가해자의 고통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고통에 잠식당했던 시간을 지나 그 고통을 거리 두고 볼 수 있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 횡단 끝에 알게 되었다. 나는 상처받는 존재이자, 상처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은 상처받는 존재이자, 상처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마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덜 상처주고, 내 상처는 덜 아파할 수 있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피해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고통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가해자의 고통을 직면해라. 아니 직면하게 될 거다. 넌 나를 좋아하니까. 그 고통스러운 자기혐오의 시간이 끝날 때 너는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그때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 너머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다. 너와 내가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진정한 친구'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괜한 죄의식에 빠지지 않고 악착같이 기뻐져라. 고통을 견디는 유일한 힘은 기쁨이다. 기쁨을 연료로 이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라. 그 시간 속에 네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도 다시 배치될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문제는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다. 그때 나 또한 피해의식에 잠식되지 않기를.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더 나아가 아무 이유 없이 길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도, 잘잘못을 따지며 억울해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냥 해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그렇게 피해자-가해자의 논리 너머, 어떤 상황에서도 내 삶을 의연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작년 가을에 내가 쓴 글이다. 내가 쓴 글에 내가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네가 나를 위해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너 때문에 나에게 새로운 삶으로 갈 문이 열린 것은 사실이다.” 언젠가 스승이 했던 이 말을 나에게 하고 싶다. 근사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나다. 힘든 상황에서도 ‘근사한 척’ 하는 것. 혼을 담아 ‘근사한 척’을 멈추지 않는 것. 그렇게 근사한 사람이 되는 것. 해야할 일을 하자. 견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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