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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pr 15. 2023

2. '완벽한 부부'의 진실

참 순탄했다. 연애도, 결혼도. 왜 그랬을까? 서로 순탄할 만한 사람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별다른 갈등 없이 ‘둘’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혼상대로 꽤나 괜찮은 조건이었다.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둘 다 누구에게든 꽤 괜찮은 결혼상대였다. 경제적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커서 상처받은 경험도 별로 없고,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예정이기에 결혼해서 갈등이 일어날 확률도 적었다. 실제로 연애, 결혼 기간 중 경제적인 이유로 갈등이 일어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환상의 커플이라 남들 다하는 부부싸움조차 안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단지 우리는 경제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상황에 처할 일이 없었던 거다. 사실 처음 연애를 할 때부터 서로 그런 조건을 무의식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나도 남편이 경제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고, 남편도 내가 경제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다. 갈등이 없을 상대를 만났기에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격적으로는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상대를 골랐다. 나는 자기주장 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 남편은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 나는 내 삶의 선택을 잘 내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안 보는 대신, 주위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늘 내 마음대로 하려는 고집스러운 통제 강박이 있다. 그래서 남편의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 좋았다.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하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해도 남편은 별 불만 없이 다 맞춰주었으니까. 반대로 남편은 온화하고 다정해서 사람들과 잘 지내고 배려심 넘치는 대신, 자기 삶에 결정을 스스로 못 내리는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나의 화끈한 성격을 좋아했다. 내 고집을 맞춰주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 걸 참아주는 대신, 자기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가 대신 내려주고 책임져주길 바랐다. 나는 남편의 결핍을 잘 채워줬고, 남편도 내 결핍을 잘 채워줬다. 그렇게 우리 둘은 ‘황홀한 하나’가 되었다.


둘이 ‘황홀한 하나’가 되는 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서로가 채워 ‘완벽한 하나’가 되는 것만큼 사랑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없다. 하지만 실제로 ‘황홀한 하나’가 되어보고 알았다. 그 황홀한 하나는 허상이라는 것을. 사랑은 반쪽을 만나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둘이 만나 마찰하고 갈등하며 나와 타자의 진짜 모양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와 남편은 그러지 않았다. 서로의 결핍을 완벽히 채워주면 좋을 줄 알았는데 허무했다. 나는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다 받아주는 남편을 점점 함부로 대했다. 반면 그의 삶의 결정들을 대신 내려주는 과정에서 기묘한 책임감이 쌓여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편했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거대한 공간에서 나 혼자 팔을 휘두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타자를 통해 나의 테두리를 알게 되는 것. 아무거나 지멋대로 하는 게 행복이 아니라, 타자와의 부딪침 속에서 나의 테두리를 알고 조금씩 나를 확장해나가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남편은 나에게 묻어가는 게 꽤 편했을 것이다. 나에게 남편은 늘 내 뒤에 숨어 있는 이미지였다. 남편은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 대가로 나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맞춰주었다. 지 멋대로 하는 나를 ‘쟤는 진짜 못말리는 애’라는 표정으로 바라봤었다. 남편은 오랜 시간 내가 부러우면서 싫었을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데 자기는 그러지 않으니까. 나의 공허함과 남편의 답답함은 점점 쌓여갔다. ‘황홀한 하나’의 끝은 공허함과 답답함이었다. 나는 우리가 사랑하는데 왜 자꾸 공허해지는지 몰라 점점 남편에게 짜증이 쌓여갔다. 남편도 우리가 사랑하는데 왜 자꾸 답답해지는 몰라 점점 나에게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나는 그 짜증을 남편을 함부로 대하는 것으로 풀었고, 남편은 사람들에게 내 흉을 보는 것으로 풀었다. 그것이 ‘황홀한 하나’의 맨얼굴이었다.





연애 때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하나’가 되었다는 황홀감에 젖었다. 그 황홀감이 연애시절에 느꼈던 달콤함의 정체였다. 얼마간 연애를 하고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쯤 우리는 서로를 연애상대가 아닌 결혼상대의 필터를 끼고 바라봤다. 나와 남편은 연애상대로는 서로의 결핍 지점이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떨어져 좋았다면, 결혼상대로는 서로의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어서 좋았다. 나와 남편은 연애 때는 ‘하나’가 되었고, 결혼이 다가오자 ‘셋’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눈으로 남편을 봤다. 아버지가 남편을 좋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남편은 나를 잘 보듬어줄 것 같은 온화한 성격에, 앞으로 별다른 사고를 칠 것 같지 않은 모범생이었으니까. 그 당시 나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굉장히 강하게 내면화되어 있었기에, 만일 아버지가 내 남편을 싫어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나는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남편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했다. 나와 남편 둘만 있어야 했던 관계는 내가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끌어들임으로서 ‘나-아버지-남편’ 셋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에게는 어머니가 중요했다. 사실 나는 남편의 어머니를 닮은 구석이 많다. 시어머니는 그 당시 어머니들과 다르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꽤 진취적으로 하는 분이셨다. 시아버지는 그런 시어머니의 시원시원함을 좋아했고, 시어머니의 결정을 잘 따랐다. 아마 남편은 그런 부모의 관계를 나에게 투사했던 것 같다.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골랐고, 그래서 나는 시부모님께 꽤 환영받는 며느리였다. 남편 또한 나와 남편의 둘의 관계에 어머니를 끌어들였다. 나는 우리 관계를 ‘나-아버지-남편’ 셋의 관계로 만들었고, 남편은 우리 관계를 ‘나-어머니-남편’의 셋의 관계로 만들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내 욕망이 아니라 부모 욕망을 따랐다고 이제 와서 탓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채 결혼을 선택한 것은 나와 남편의 책임이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 모두 우리 둘의 관계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 말 잘 듣는 딸이었던 나, 엄마 말 잘 듣는 아들이었던 내 남편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알아서 부모님의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을 골라 연애하고 결혼을 했다. 그래서 모든 게 순탄했던 것이다. 연애 때는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을 골랐고, 결혼 때는 완벽한 ‘셋’이 될 수 있는 사람을 골랐으니까. 우리는 완벽한 하나였고, 완벽한 셋이었다. 온전한 둘이었던 적은 없다.



‘완벽한 하나’의 끝은 공허감과 답답함이었다. ‘완벽한 셋’의 끝은 역할과 의무였다. 나와 남편은 부부싸움 한 번 안하는 환상의 커플이었지만 서로를 몰랐다. 나와 남편은 각각 완벽한 사위, 완벽한 며느리,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였지만, 역할과 의무만을 다할 뿐 관심과 애정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마찰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정말이지 방송에 나올 법한 신도시의 젊은 부부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 공허했던 내 삶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결혼생활은 행복이 아니었다. ‘완벽한 부부’의 끝은 공허였다. 그곳엔 애초에 ‘나’도 ‘너’도 없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완벽한 부부’가 되어서 알게 된 삶의 진실이었다.


사랑은 ‘하나’도 ‘셋’도 아닌, 오직 ‘둘’의 경험이다. - 철학자 황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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