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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03. 2023

3. 나의 결혼식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는데, 끝을 생각하니 자꾸 시작점이 떠오른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날 그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결혼 생활의 문제로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철학 수업에서 들뢰즈의 한 문장에 마음에 꽂혔다. 철학은 의미 있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생성하는 일이라는 말. 그 문장을 읽고 지금 내 삶의 유의미한 문제는 내 결혼 문제라는 것을 직면했고, 내가 철학을 배우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공부하고 써야할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내 이혼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연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글을 많이 써왔어도 내 이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무서웠다. 이것은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었다.


프롤로그를 쓰기 전, 한강을 네 시간을 걸었다. 온 마음이 지금 이 글을 써야 한다고 외치는데 차마 쓸 용기는 나지 않고, 뭘 해도 마음은 가라앉지를 않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강에 가서 정처 없이 아무 길이나 걷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론 없이 글을 써본 적이 없구나.’ 지금껏 내가 브런치에 썼던 글들은 어느 정도 결론이 난 이야기들이었다. 결론이 난 이야기를 돌아보고 정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내 결혼 문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 그 문제 속에 있다. 그래서 무서웠던 것이다. 이 글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몰라서.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 글을 쓰다보면 정말로 이혼을 하게 될 거란 직감이 들어서. 나의 이혼 속으로 내 발로 한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사실은 지금도 무섭다. 쓸 글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늘 글을 쓰기 전에 심호흡이 필요하다. 지금도 인트로가 길다. 무섭다는 뜻이다.


한 줌의 흙, 한 걸음.




요즘은 내 결혼식 생각이 많이 난다. 나의 이혼식. 이 연재의 프롤로그를 쓰던 날, 정말 햇살이 좋은 봄날이었다. 책상에 앉아 그 햇살을 보는데, 내 결혼식날 햇살이 저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햇빛이 찬란했던 봄날의 야외 결혼식이었다. 모두가 잘 차려 입고 모두가 웃고 있었다. 그날의 나도 웃고 있었다.


결혼식은 참 웃기다. 누구의 결혼식 사진이건, 결혼식 사진은 다 밝고 아름답다. 다들 웃고 있고 다들 온화하며 다들 예쁘고 멋지다. 그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은 그 누구도 불평불만, 싸우지 않고 한 쌍의 부부의 탄생을 축하한다. 그런데 결혼을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결혼 준비 과정부터 그 후 신혼 생활까지 다 합쳐서, 모두가 웃고 있는 순간은 딱 그 결혼식 때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 나의 결혼식도 그랬다. 마치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같은 그 순간을 위해서 몇 개월을 고생했다. 심지어 그 결혼식 전날,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결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엄마에게 빡쳐서 세 시간을 싸우고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눈이 부은 채로 신부화장을 했다. 그래도 결혼사진에는 나도 엄마도 웃고 있었다. 신부화장 기술의 발전으로 눈이 부은 것도 감쪽같이 커버했다. 사진에는 밝고 예쁜 모습만 찍혀 있다. 하지만 기억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다 남아 있다. 어쩌면 사진에 남은 것은 다 가짜고, 기억에 남은 것만 다 진짜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뿐이랴. 나와 남편은 오래 사귀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결혼이 전제된 사이었다. 그래서 늘 ‘언젠가 우리는 결혼 하겠지’ 모드였기 때문에 딱히 결혼 타이밍이랄 게 없었다. 같이 사업을 했던 탓에, 사업의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고 “이제 슬슬 결혼할까?”라고 운을 띄웠다. 남편은 좀 머뭇대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남편은 결혼한다면 나와 결혼한다고 생각했지만 결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철없던 나는 머뭇대는 남편에게 속상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프로포즈를 받고 싶었다. 누가 봐도 결혼할 게 뻔한 관계였는데, 그 뻔한 관계인게 싫어서 프로포즈를 받고 싶었다. 그냥 얼렁뚱땅 “이제 결혼할까?”라고 내가 운을 띄워 행정처리하듯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은근히 프로포즈에 대한 압박을 넣었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프로포즈도 받았다. 엎드려 절받기였는데, 그렇게 받은 프로포즈에 심지어 눈물이 났다.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받고 싶었고,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까지 하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내 남편보다 제 삼자들이 더 중요했다. 여성성의 욕망이 그렇듯, “연인에게 사랑받는 나”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내가 “연인에게 사랑받는 나”인지 확인하기 위해 남편에게 프로포즈라는 연출을 강요했고, 남편이 그 연출에 따라주자 “연인에게 사랑받는 나”임을 (억지로) 확인받고 스스로 감격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연인에게 사랑받는 나”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함으로써 그들의 관심도 받고 싶었다. 형식적으로는 결혼의 시작라고 할 수 있는 프로포즈부터 내 마음 속에는 제 삼자의 개입이 난무했던 것이다.


결혼식도 그렇다. 지금 돌이켜 보면, 결혼식은 마치 이벤트 좋아하는 남자친구의 이벤트와 비슷한 것 같다. 평소에는 잘 못하다가 아름다운 이벤트나 근사한 선물로 관계의 문제를 무마하려는 남자친구의 이벤트. 마치 인스타 사진들은 다 밝고 아름답지만, 오히려 그 밝고 아름답게 편집된 사진들이 실제 삶은 하나도 밝지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는 사실을 반증하듯이, 결혼식의  아름다움도 실제 결혼 생활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과도하게 밝고 아름다운 것 뒤에는 늘 어둡고 추잡한 것이 숨어 있게 마련이니까. 감추려는 의도가 없다면 그 무엇도 과도하게 밝고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웃고 있는 사진은 과도하게 밝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아름답지만 가짜였던 것이다. 나의 아름다웠던 프로포즈, 아름다웠던 결혼식, 아름다웠던 결혼생활처럼.





나는 만일 이혼하게 되더라도 다시 누군가와 결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결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결혼 생활을 지켜보았던 미혼 동생들이 언니 때문에 결혼이 무서워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때 꼭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사랑한다면 결혼은 하지 말고 동거는 해봐!” 내가 결혼생활을 하며 좋았던 점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보는 것이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결혼 없는 동거를 할 수는 없었기에 결혼을 해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것과 누군가와 동거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한 공간에서 함께 살며 삶을 공유하는 관계는 퇴근 후나 주말에 종종 만나 데이트하는 관계와는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데이트 하는 관계가 부분적으로 삶을 나누는 것이라면, 함께 사는 관계는 온전히 삶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과 한 공간에서 긴 시간 삶을 나누며 알게 된 것은 분명 연애할 때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 함께 먹는 일. 몸과 마음이 아픈 시간을 함께 하는 일. 그것으로 인한 갈등들. 삶의 예측치 못한 문제 앞에 함께 서는 일. 서로의 가족을 만나고 가족사를 알게 되는 일. 아름다운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의 것들이었다 진짜의 것들은 현실의 삶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함께 살아야 한다. 사랑은 기꺼이 너와 가까운 거리에서 삶을 나누겠다는 마음이니까. 하지만 함께 살기 위해 결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랑한다면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긴 결혼 생활 끝에 알게 된 삶의 진실이다. "결혼말고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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