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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03. 2023

4.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결혼은 사랑을 교살하는 거예요.”


내가 철학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스승이 종종 하던 말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해되지 않았다. 스승은 내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의 정반대되는 말을 자주 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아낀다면 섹스하지 말아야 돼.” “결혼은 사랑을 교살하는 거야.”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돼.” 처음에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섹스하고 싶은 거 아냐?” “사랑하니까 너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생겨서 결혼하는 거 아닌가?” “사랑을 하는데 왜 이별을 준비하지?” 그런데 철학을 배우며 내 삶과 사랑(사실 삶과 사랑은 같은 것이다)에 좌충우돌하면서 그 말들을 둘러싸고 있던 물음표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결혼 생활에 좌충우돌하면서 온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결혼은 있는 사랑마저 질식시켜버린다는 것을.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그 질문이 요즘 자주 생각났다. 그 질문이 왜 자주 생각나는지 알고 있다. 내가 이혼의 길을 걸으며 마지막으로 마주한 공포가 그 질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왜 이혼이 무서울까?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 자신이 없어서다. 이번 결혼생활이 안 좋게 끝났다고 다른 남자와 재혼을 희망하는 것은 마치 이 회사가 안 좋다고 다른 회사에 가면 직장생활이 나아질 것이라 희망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도망이지 졸업이 아니다. 진정한 퇴사는 ‘이 회사’에 대한 퇴사가 아닌, ‘회사’에 대한 퇴사다. 진정한 이혼도 마찬가지다. ‘이 결혼’에 대한 이혼이 아닌, ‘결혼’에 대한 이혼이 되었을 때가 정말로 ‘결혼’을 졸업한 게 된다. 그렇게 ‘결혼’ 자체를 졸업해야만, 나중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다시 결혼하게 된다 하더라도 ‘결혼제도’에 마음이 묶이지 않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결혼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결혼이다.


법적으로 가족이 아닌데, 서로 보고 싶어 오래도록 함께하는 관계가 진짜 가족이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다. 나는 ‘이 결혼’이 아닌 ‘결혼’을 졸업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왜 결혼을 했는지 그 처음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단추는 그때 잘못 끼운 것이니까. 삶은 참 얄짤이 없다. 과거에 내가 비겁했던 딱 그만큼이 현재 나의 두려움이 되고, 현재에 내가 두려운 딱 그만큼이 내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이혼이 두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혼에는 참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다.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문제, ‘이혼한 딸’이라는 가족의 시선의 문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과의 시간을 끝내는 것에 대한 회한, 홀로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이혼에 대해 오랜시간 진지하게 고민하며 이 모든 문제들과 씨름해왔다. 그렇게 한 걸음씩 이혼의 길을 걸어가며 거의 문턱까지 와서 마주한 마지막 공포. 그것은 내가 비겁하게 결혼한 바로 그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나 죽을 때까지 결혼이라는 제도에 기대지 않은 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 연애는 몇 번 했고, 연애의 끝은 대부분 안 좋았다. 그 당시 나는 나를 돌아볼 생각은 안했기에, 몇 번의 연애가 남긴 상처에 너무도 쉽게 남자 혐오에, 연애 공포증까지 생겼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 전 남자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웠고, 연애를 하고나서는 마음 열고 잘해줬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신이나 상처밖에 없으니 연애도 무서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내 기준으로 내 마음대로 잘해줬으니, 내가 잘해준 것은 희생이나 집착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연애의 끝이 안 좋았다고 연애 자체가 무서워져 버린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다면 관계의 끝이 좋지 않더라도, 관계 자체가 무서워지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당시 나는 내 사랑에 내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으니 연애의 끝이 안 좋았던 것은 다 상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번의 연애에 상처받고 나를 돌아보기 전에 먼저 남자 혐오와 연애 공포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위축되어 있을 때, 나를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좋아해주던 남자가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나는 그 안정감이 좋았다. 남편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거나 상처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모범생에 감정 기복도 없고 모난 것도 꼬인 것도 없고, 성실하고 착하고, 어른들이 말하길 ‘절대 사고 안 칠 것 같은’ 남자. 나는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안정감을 사랑했다. 이 남자는 절대 나를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 그리고 그 안정감을 나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라 오해했다. 이제야 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남편 또한 안정감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나를 너무 좋아해서가 아니라, 남편이 흔들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생긴 것이었다. 남편도 나와 같았다. 남편은 연애에 상처를 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 나를 만나고 이제껏 연애에서 얻지 못했던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서 남편도 너무도 빨리 나를 결혼상대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둘 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했다. 나는 남편이 나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서, 그리고 더 이상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서 결혼했다. 남편은 아마 나와 결혼하면 세상에 상처받을 일이 적어질 것이라 생각해 결혼했을 것이다. 남편은 나보다는 연애를 더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결혼 앞에서 머뭇댔던 것이다. 그렇게 안정감 때문에 결혼한 나와 남편은 그 안정감에 발목 잡혀 결혼 생활이 끝나게 된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결혼했던 나와 남편은 결국 주변사람들까지 흔드는 대지진을 일으켰고, 서로 상처주지 않을 것 같아 결혼한 나와 남편은 결국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삶은 이렇다. 피하려고 했던 것은 나중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뒤통수를 친다. 삶의 고난이란 내가 오랜 시간 피하려고 했던 것에 정통으로 맞아 주저앉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매순간 비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 비겁함이 나중에 복리처럼 불어나 나를 넉다운 시키니까.




결혼은 왜 사랑을 교살하는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결혼할 필요가 없다. 매일 서로의 사랑이 확증되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계를 의탁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무엇을 해도 즐겁게 돈을 벌고 살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절대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다. 회사에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과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필요가 없다. 결혼을 왜 하는가? 이별을 강제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는 것은 두 사람의 일이지만, 결혼을 하다가 헤어지는 것은 두 사람의 일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가족 앞에서 공표했기에 가족의 일이 되고, 최종적으로는 너와 나의 관계를 법적으로 보장받았기에 법의 허락이 필요하다. ‘이별’을 법과 사회적 관계, 두 절차로 막는 것이 바로 결혼제도다. 그뿐인가. 서로의 경제권을 공유하는 것을 보장받고, 나와 다른 이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처벌하는 것이 결혼제도의 핵심이다. 결혼은 법적으로 보장된 성적·경제적 배타적 공동체이다. 이것이 내가 결혼생활의 끝까지 가서 알게 된 결혼의 민낯이다.



결혼은 시작부터 사랑의 의심에서 시작된다. “결혼은 사랑을 교살한다”는 스승의 말에 내가 갸우뚱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결혼은 사랑의 확신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과 평생 함께할 것이라는 확신. 하지만 정말로 그 확신이 드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는다. 결혼할 필요가 없다. 그 확신이 든다면 그냥 오래도록 함께하면 되지, 굳이 평생 함께할 것을 법으로 보장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평생 함께할 것을 법으로 보장받고 싶다는 것은, 평생 이 사람과 함께할 것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기도 한다. 내가 저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할 것이라는 확신은 내가 저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하겠다는 ‘의지’로 생기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 나는 그 사람과 함께할 의지 없이, 상대방은 도망가지 못하게끔 법으로 묶어버리는 것이 결혼이다. 그렇기에 결혼은 ‘계약’이자 ‘거래’인 것이다.


그렇게 결혼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종종 연애를 프리랜서, 결혼을 공무원에 비유하고는 한다. 프리랜서와 공무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프리랜서는 자기가 자기 일을 오롯이 해내고 그 결과로 평가받는다면, 공무원은 철밥통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태만하면 바로 밥줄에 영향이 가지만 공무원은 그렇지 않다. 연애와 결혼도 마찬가지다. 왜 연애할 때는 안 그랬던 사람이 결혼하면 돌변하는 일이 벌어질까? 결혼은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는 내가 잘못하면 혹시 이별 당할까봐 무서워서라도 잘할라고 애를 쓴다면, 결혼해서는 서로가 이혼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간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터뜨리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함부로 대하게 된다. 그렇게 해도 자기가 혼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결혼은 서로를 이별하지 못하게 만들어 서로가 서로를 더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괜찮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든다. 부부의 폭력, 가족의 폭력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이별이 두려워 결혼을 하고, 이별하지 못하기에 서로 상처내거나 질식시키는 관계가 부부인 것이다. 모든

부부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결혼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과 우정으로 아끼며 사는 부부도 있다. 하지만 서로 상처주고 질식시키는 많은 부부는 결혼 제도 속에서 이별하지 못하기에 그러는 것이다. 사랑은 살얼음을 걷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혹시라도 너에게 상처를 줄까봐, 너를 외롭게 할까봐, 너의 아픔을 알아보지 못해 안아주지 못할까봐 온 신경을 너에게 곤두세우는

것. 혹시라도 내가 걸은 한 걸음 때문에 우리 관계가 더 이상 다시 붙지 않을 만큼 깨져 버릴까봐 나의 행동, 나의 말 하나하나 조심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결혼은 그 살얼음을 걷기 싫어 얼음 바닥에 시멘트를 부어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단단해진 시멘트 바닥을 쿵쾅거리며 걷는 일이다. 그래서 결혼은 참 편하다. 그런데 참 바보 같다. 사랑은 살얼음을 걷는 ‘나’의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그리고 함께 살얼음을 걷는 ‘너’의 조심스러운 마음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사랑에 시멘트를 부어버린 시점에서 사랑은 끝난다. 살얼음이 없으면 사랑을 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결혼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살얼음을 걸을 것인가? 그러고 싶다. 늘 사랑이 어렵고, 늘 사랑이 알고 싶은 소녀로 평생 살고 싶다. 그게 지금 나의 답이다.



사랑은 그 감정이 어떤 속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날 때에만 건강하게 자라난다. 사랑을 의무로 여기는 사고는 사랑을 질식시키기 쉽다. 아무개를 사랑하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랑과 법률적인 서약을 결합시키는 결혼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치는 꼴이 된다. - <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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