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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10. 2023

5. 주마등과 봉와직염

주마등. 죽기 직전에 삶에 강렬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 가본 적이 없어서 주마등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작은 주마등을 경험해본 적은 있다. 누군가와 관계를 끝내던 날.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짧은 영화처럼 떠올랐다. 스타트업을 그만두고 공황에 빠져 있다가, 이제 다시 사업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날도 그랬다. 그날도 사업 하면서 울고 웃고 고군분투하고 애를 썼던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바뀌었던 그 날도 그랬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하나의 관계를 종결한다는 것은 작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일까.


당황스러웠다. 나는 작년 10월부터 남편과 별거를 하고 있다. 더 이상 한 집에서 같이 얼굴 보며 살 수 없겠다고 말을 하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지 벌써 7개월째다. 별거하는 동안 참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 사이에 또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런데도 쉽게 이혼을 결심하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말하는 것도 두려웠고, 지난 글에도 썼듯이 앞으로 결혼 제도에 기대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맞서보려고. 이미 끝나버린 관계, 온갖 것이 무서워서 놓지 못하고 있는 내가 비루해서.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두려움은 분명 가라앉았는데, 이상하게 남편과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좋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지난 글을 쓰고 나서 알았다. 내가 결혼식 사진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지금 남편과의 기억들이 마치 앨범 속 사진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도 삶의 좋은 기억들이 주마등으로 떠오를까? 나는 그렇다. 결혼 생활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이혼의 문 앞에서 마주한 것은 남편과의 행복했던 기억들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건 이혼이 무서워서 정신승리하려는 마음의 작용인가? 그 질문에 답을 못했다.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순간. 행복했던 기억이다.




집을 뛰쳐나오기 전 그랬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남편과 함께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이 마치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었다 급하게 닫아버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닫혀버렸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감정을 끊어버린다. 나의 생존 기제 같은 것이다. 그날 그랬다. 나는 분명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아무런 느낌이 들지가 않았다.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냥 멍했다. 나는 그날 남편과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일상을 보냈다. 그 전날의 상처와 별개로,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강아지 산책도 시켰다. 그 일상이 너무 익숙해서 비현실적일 정도였다. 그렇게 2주를 무감각한 상태로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았다. 봉와직염. 이것이 안으로 곪는 상처구나. 겉으로는 멀쩡했다. 12년의 시간을 함께 살아온 관성은 태풍만큼이나 세다. 늘 그래왔듯 일상을 보내니 정말로 늘 그래왔듯 또 살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라캉의 정신분석에 따르면 강박증자다. 강박증자는 상처를 받으면 감정을 차단해버린다. 나는 상처 받을 만한 상황은 피하고, 상처를 받으면 감정을 차단해버리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간이 되었다. 어렵사리 철학을 배우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 차단된 감정들을 복원했다. 나는 감정이 되살아난 내가 좋았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상처를 받으니 감정이 하나씩 꺼져가는 게 느껴졌다. 마음속에 전등불이 한 개씩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감정이 차단된 냉소적이고 차가운 인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나의 감정은 집을 나오고 나서 터졌다. 집을 나오고 글 쓰는 용도로 잠시 빌린 작은 원룸에서 펑펑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씨발,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상처 받았다. 그런데 그 상처를 직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직면한 순간, 내 삶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소용돌이 속에 빠진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직면하면 나는 더 이상 남편과 살 수가 없었다. 남편과 살 수 없다는 것은, 이혼을 의미했다. 그 당시 나는 이혼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상처 받았다는 사실, 아니 상처 받아 아픈 그 감정을 막아버렸다. 그 아픔을 차단하자 온 감각이 다 닫혀버렸다. “난 괜찮아, 아니 괜찮아야만 해.” 미래를 감당할 수 없어서 현재의 감정을 죽였다.





그때 마음의 작용을 기억하고 있다. 정신승리의 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나는 끊임없이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나름 괜찮은 이유를 찾았다. 그래도 이렇게 죽이 척척 맞는 사람도 없잖아. 일상을 같이 보내다 보면 웃고 떠드는 순간도 있잖아. 죽일 듯이 싫은 건 아니잖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잖아. 결혼 생활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했다. 아마 그대로 쭉 갔다면 내 결혼 생활은 겉으로는 멀쩡해도 안으로는 점점 더 썩어 들어갔을 게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다 차단해놔서 겉으로는 “난 괜찮아” 모드였겠지만, 안으로는 점점 더 곪아터졌을 게다. 그 곪아버린 감정은 짜증이나 분노로 표출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나의 결혼 생활도 더 썩어 들어갔겠지.


그날 집을 나온 것은 잘한 일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얼굴 보며 살았으면, 나는 그 뒤엉키고 뒤엉킨 감정을 남편이나 내 주변 사람들, 아니면 스스로에게 퍼부었을 테니까. 하지만 별거를 하는 초반에는 많이 무서웠다. 별거라는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서다. 결혼도 아니고 이혼도 아닌 상태. 나는 그런 애매한 상황을 잘 견디질 못한다. ‘일단 따로 살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불안이 자기 전마다 급습했다. 밤에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순간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조여오기도 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별거 중에 많은 일을 겪고 나는 이제 이혼에 마음을 굳혔다. 특히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혼과 정면승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한 걸음씩 걷다보면 어느 날 ‘오늘이 이혼할 날이구나’라는 직감이 들 것 같았다. 이혼의 마지막 공포도 마주했다. 그런데 지금 이 타이밍에 남편과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오른다니. 한 동안 ‘나는 또 정신승리하고 싶은 건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이 주마등 같이 떠오르는 기억들이 과거로 돌아가려는 관성인지 정신승리인지 회한인지 뭔지 몰랐다.


나의 감정 친구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며. <감정의 정원> 정주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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