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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pr 15. 2023

1. 나와 남편은 사랑했을까?

“혜원씨와 남편의 사랑은 끝났어요.”


4년 전, 한 철학자에게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내 삶에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기억들을 꺼내 글로 써보며 응어리진 감정들을 잘 정돈해보는 수업이었다. 그 수업의 중반부쯤이었다. 지금 내 스승이기도 한 그 철학자가 나와 남편의 관계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조심스러운 말에 강한 반감을 느꼈다. 삶을 살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원만한 남녀 관계는 다 사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의 관계는 원만했다. 우리는 사이좋은 부부였다. 그래서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며 곧장 반박을 했다. 스승은 지금말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효리’는 ‘이상순’을 사랑할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 양쪽 귀를 손으로 막아버렸다.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효리’는 ‘이상순’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승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왜 멀쩡하게 사는 부부에게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말 따위를 해서 긁어부스럼을 만드냐고.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스승은 나와 남편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남편의 관계가 계속 원만하기 바랐기에 그 말을 한 것이다. 사랑이 뭔지 우정이 뭔지 고민해보지 않으면 내가 하는 것이 당연히 사랑이고 우정이라 생각하기에, 곁에 있는 이를 필연적으로 함부로 대하게 된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면 반드시 상대에게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한번은 스승이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혜원씨는 남편을 애완동물처럼 생각하잖아요.” 애완동물이 무엇인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곁에 붙들어 놓고, 나만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존재 아닌가. 4년 전 나는 분명히 그랬다. 남편이 나만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화한 성품의 남편을 만만하게 여기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며 함부로 대한 적이 많다. 나는 부부로서의 역할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에만 충실했다. 남편도 의무와 역할에 충실했고 둘 다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었기에, 둘 사이에 갈등은 별로 없었다.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역할과 의무. 사람에게는 관심과 애정, 아니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와 남편은 25살에 만났다. 그 전에 둘 다 몇 번의 연애는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거의 첫사랑이었다. 남편은 나를 정말 좋아해줬고, 나도 그런 남편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아직도 나와 남편의 연애 기간은 풋풋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실 나는 살면서 남자에게 사랑 비스무리한 것을 받아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음 받아본 사랑에 얼떨떨했다. 이 남자는 대체 뭐가 좋다고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나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털털한 편이라 늘 어른들에게 칭찬받고 친구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지만 이성 관계에서는 달랐다. 나는 남자 앞에서 늘 위축되어 있었다. 얼굴이 예쁜 편도 아니고, 남자 같은 성격 때문에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면 여자로서 사랑받을 수 없다고 지레 겁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중의 모습으로 살았다. 친구들 앞에서는 세상 쿨하고 멋있는 신여성. 남자들 앞에서는 우렁각시라도 되어줄 기세의 쭈구리. 나는 내가 ‘성공시대’의 주인공은 될 수 있어도, ‘멜로 영화’의 여주인공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떤 남자가 나를 여자로서 사랑해준다는 것. 그게 그렇게 황홀했다. 남편은 나를 정말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예쁘다, 귀엽다, 섹시하다는 말을 쉴 새 없이 했다. 특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숨만 쉬어도 잘 하는 거라는 말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살면서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 나는 꽤나 성취지향적이고 무뚝뚝한 집안에서 자랐다. 내가 뭔가를 잘해야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살가운 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흔한 사랑 표현 한 번 안 하는 꽤나 차가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남편의 폭풍 칭찬과, 특히 ‘넌 아무것도 안 해도 잘 하는 거야’라는 말이 그리도 달콤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은 내가 부모님에게 늘 듣고 싶던 말이었다. 지금은 그 말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내 남편도 꽤나 순탄한 집에서 순탄하게 자라 인생에 고난이나 갈등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니까. 좋을 때는 무슨 말을 못하랴. 하지만 그때 나는  남편의 그 해맑은 모습이 좋았다. 나는 늘 무언가를 성취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어려서부터 마음이 어둡고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남편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과 행동은 무게는 가벼웠을지언정 진심이긴 했다. 그 당시 남편은 분명 나에게 사랑을 주었고 나는 그 사랑 덕분에 낮은 자존감과 애정결핍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추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후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았다고 해서 그때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다. 그때 받은 마음은 영원히 고마움으로 간직하고 싶다.



하지만 처음 사랑을 받아봐서 그랬을까? 소심했던 나는 남편을 보고 이 남자보다 나를 더 사랑해줄 남자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라 단정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도 나보다 괜찮을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 꽤 빨리 마음을 정했다. 연애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와 남편은 결혼을 약속했다. 실제 결혼은 한참 뒤에 했지만, 연애하는 내내 우리는 결코 헤어질 일이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6년을 연애하고 결혼을 했다. 모든 게 참 순탄했다. 결혼할 때도 나와 남편은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 확신했다. 사람은 성급히 확신한 곳에서 반드시 넘어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성급한 확신은 불안한 마음의 뒷면이니까. 나와 남편은 사랑하는 사이라 성급히 확신했던 것도, 사실은 우리 관계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었다.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이 거부. 사랑은 구조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조건들> 알랭 바디우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일들 끝에, 나와 남편의 관계는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 나와 남편은 각각 상처받았고, 우리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아름답게 시작되었고 길게 유지했던 만큼 나는 우리 관계가 이렇게 끝난 것이 한스러웠다. 그때 알랭 바디우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다. 알랭 바디우는 말한다. 사랑은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황홀감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와 남편의 달콤했던 연애, 그리고 순탄했던 결혼 생활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황홀감에 흠뻑 젖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니까.


나의 연애, 나의 사랑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사랑을 아름다운 멜로 영화로 포장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내 사랑을 포장하려는 그 자기기만적 마음 때문에 결국 있던 사랑도 끝이 나게 된다. 그걸 남편과의 관계가 끝이 나고 나서 절절히 느꼈다. 그때 다시 나와 남편의 사랑을 냉정하게 되짚어보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사랑했을까? 우리는 사랑한 적이 있을까?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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