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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22. 2024

나의 믿음, 나의 바이블 너머

<피해의식> 편집 회고

진정한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것은 '나'를 위한 '나'의 선물이어서도, '너'를 위한 '너'의 선물이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선물은 '나'를 위한 '너'의 선물이며, 동시에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이어야 한다.
'나'를 위한 '너'의 선물,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을 보낸다.


어느 날 스승에게 아리송한 편지와 함께 한 원고를 받았다. <피해의식>이라는 원고였다. 당시 나는 이혼을 앞두고 꽤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원고를 받자마자 스승이 그것을 준 의미를 알았다. 스승과 나는 저자와 편집자의 관계이기 이전에 사제 관계이니까. 스승은 그 원고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선물’이 되어줄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 원고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것을 알았다. 실제로 나는 스승의 글을 버팀목 삼아 이런저런 힘든 시기를 헤쳐온 적이 많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 원고가 스승에게 중요한 의미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작업을 마치고 책을 펴내고 싶었다. 그런데 초반에는 하루에 두 꼭지 이상 작업하는 게 힘들었다. 그전의 스승의 책 작업과는 달랐다. 이 원고는 사실 상 내가 편집을 할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그런데도 속도가 붙질 않았다. 원고를 읽는 게 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그 당시 왜 그리 원고를 읽는 게 힘들었는지 이해가 된다. 이 책은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책이다. 상처받은 마음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어떻게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넣으며, 그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바로 그 ‘상처받은 마음’이었다. 별거와 이혼을 거치며, 나는 꽤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다. 심지어 그 원고를 받은 당시에는 상처가 찢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던 시기였다. 내가 ‘상처받은 마음’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상처받은 마음’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피해의식은 어떻게 우리 삶을 파괴하며,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매일매일 읽어야 하니 당연히 마음이 볶일 수밖에.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스승은 살이 찢어져 쓰러져 있는 나에게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꽤 어렵겠지만 그걸 네가 지금 잘 치유하지 않으면 나중에 안으로 곪아서 다리를 잘라야 될 수 있다는 말을 아주 상세하게 해준 것이다. 참 인문주의자의 선물 답다는 생각이 든다.




일이라는 것은 묘한 구석이 있다. 어쩌면 우리 삶을 진정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의무는 기쁨의 의무여야 하겠지만(아직 나에게 의무는 슬픈 기쁨이다). 내가 그 원고를 한숨 푹푹 쉬어 가면서도 매일 두 꼭지씩이라도 빼먹지 않고 작업한 건 순전히 그게 내 일이었기 때문이다. 편집은 생각보다 노가다 작업이다. 1차 편집을 끝내면 2차 편집을 하고, 2차 편집을 하면 3차 편집을 한다. 그렇게 500장에 달하는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열댓 번을 넘게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완독을 되풀이하는 사이 내 마음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갈수록 그 원고를 읽는 게 힘들지 않아졌다. 그 원고가 더 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마음에 와닿았지만 더 이상 마음이 볶이지는 않았다. 매번 읽을 때마다 상처도 건드려졌지만, 더 이상 상처가 따끔거리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상처받은 마음’을 매일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받은 마음’에서 빠져나와버린 느낌이었다. 다리가 찢어져서 너무 아픈데, 옆에 상처를 치료하는 법에 대한 의학 서적이 있어서 매일 읽어보고 내 상처에 적용도 하다보니 어느새 다리가 아물어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나는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글을 읽으며 내 ‘상처받은 마음’에서 빠져나왔다.



그 원고를 받은 순간부터 나는 스승의 편지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왜 진정한 선물은 너를 위한 나의 선물이자 나를 위한 너의 선물이어야 할까? 무언가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간질간질하게 잘 잡히지가 않았다. 작업을 마무리할 때쯤은 그 말을 알 수 있길 기다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1차 편집을 마치고 이 원고를 어떤 책으로 만들어야 할까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나의 ‘바이블’로 만들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스승이 지금까지 써온 책들을 바이블 삼아 살아가고 있다. 연애나 사랑에 대한 고민이 있으면 스승이 쓴 ‘연애 바이블’을 찾아 읽고, 삶에 쫄아서 주춤거릴 때는 스승이 쓴 ‘소심함의 바이블’을 찾아 읽는다. 믿음이 증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롱받는 시대에, ‘신’도 아닌 ‘한 사람’을 그 정도로 믿는 나의 신실함(?)은 늘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과 의심을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런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스승의 원고를 처음 완독했을 때도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이건 앞으로 내가 상처받는 순간마다 찾아볼 바이블이 되겠구나!”


그렇게 나의 ‘바이블’을 만든다는 심정으로 책을 엮어나갔다. 책을 다 만들고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책 소개를 쓰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상처받는 순간마다 이 책을 바이블 삼아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런 바이블이 있을까? 꼭 이 책이 아니라도, 아니 아예 책의 형태가 아니라도 그런 ‘바이블’ 같은 존재가 있을까? 그 순간 머릿속에 내가 만났던 상처받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 작업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마음에 남았다. 스승은 자기가 마주쳤던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원고에 가득 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도 하나씩 떠올랐다. 난 그들에게도 이런 ‘바이블’이 있었으면 했다. 그 마음으로 책 소개 마지막 문단을 썼다.


저자는 그가 만났던 상처받은 ‘너’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내가 상처받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책으로 엮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상처받는 순간마다 이 책을 꺼내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원한다.




이혼은 내가 살면서 겪은 상처 중에 가장 큰 상처였다. 하지만 그 상처는 결코 슬픔만은 아니었다. 나의 상처는 다른 이의 상처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혼의 과정 중에 굉장히 강렬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내 곁에는 좋은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이혼을 하며 받은 마음의 상처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는 예전에 부모의 이혼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앞으로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만에 하나 어떤 사건사고가 터질 수도 있는지를 꽤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마음에 어떤 깨달음이 왔다. 나는 그 친구가 부모의 이혼 때문에 꽤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에 들어왔던 적은 없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에 진짜로 마음이 아팠던 적은 없다. 나는 부모의 이혼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그 친구가 아직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그 상처의 기억을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데 마음이 아파왔다. 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그 친구가 피할 수 없었던 혼란과 외로움이 마음에 와 닿았고, 심지어 그 부모가 이혼 과정 속에서 느꼈을 혼란과 두려움, 그걸 감당하지 못해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다시 한 번 상처받았던 그 친구의 마음까지도 전부 다 느껴졌다. 그 여러가지 마음을 한꺼번에 느끼고 난 다음 날, 나는 그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그전까지 그 친구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혼의 상처를 겪고 있기 때문에 그 친구가 부모의 이혼 때문에 받았던 상처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니까. 나의 상처받은 마음은 너의 상처받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도 그날 알았다. 그리고 너의 상처받은 마음이 느껴지는 만큼 나의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된다는 삶의 진실도.



나는 너의 상처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른 몸을 지니고 다르게 감각하며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몸에 난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느끼고, 네가 내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느끼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몸에 상처가 나서 아파본 사람은 다른 이의 몸에 난 상처를 느낄 수 있다. 온전히 느끼지는 못해도 그 고통을 느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느껴지면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주고 싶을 수밖에 없다. 자기가 뼈가 부러진 고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살이 찢어진 고통도 아프다는 걸 안다. 그게 아프다면, 자기가 살이 찢어져 본 적은 없어도 살이 찢어진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꼬매야 하고 어떤 연고를 발라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나는 스승이 그런 심정으로 이 마음의 의학서적을 썼다고 생각한다.




책을 내고 한 동안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아마도 이 책을 세상에 낸 순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앞으로 나의 상처받은 마음의 ‘바이블’이 될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이 책이 나의 ‘바이블’인 건, 스승이 나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바이블’ 같은 존재가 아닌 이들에게, 나아가 ‘바이블’ 같은 존재가 아예 없는 이들에게 이 책이 ‘바이블’이 되기는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나는 나의 믿음과 세상 사이의 간극에서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바이블은 어떻게 바이블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 아닐까? 스승은 어떻게 나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스승은 자신이 상처받은 적이 있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고 나니 다른 상처받은 ‘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은 뼈가 부러진 상처였고 ‘너’는 살이 찢어진 상처였지만, ‘너’의 상처가 자기 상처마냥 아프게 느껴졌다. 자기 상처마냥 아프기 때문에 살이 찢어진 상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마음의 의학서적은 쓰여진 것일 테다. 그리고 '바이블'은 상처와 고통, 고민과 공부가 더 응축되고 더 응결되었을 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 테다. 이제 왜 불교가 ‘고통의 치유학’이라고 불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종교의 핵심은 '믿음'과 '반복' 아닐까? 믿음과 반복 둘다 드물고 귀하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는 드물고 귀한 것일 테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원한다.”


책 소개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었다. 그 문장을 쓰면서 왠지 모를 찝찝함이 있었다. ‘기원한다’는 단어 때문이다. ‘기원한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하겠지만 일이 알아서 잘 풀리든 하늘이 돕든 해서 어떻게든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빈다는 말 아닌가. 나의 믿음과 세상의 간극을 느끼고 쫄아서 저렇게 썼던 것 같다. ‘기원’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도록 내가 만들어야 한다. 스승의 ‘바이블’이 나 뿐만 아니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의 ‘바이블’이 될 수 있도록. 스승이 나 뿐만 아니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승이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내 소중한 사람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나는 나의 상처로 너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위한 '너'의 선물이자 '너'를 위한 '나'의 선물만이 ‘우리'를 위한 '우리'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서툴고 투박하고 거칠지만, '우리'를 위한 '우리'의 선물입니다. 혹시라도 제 브런치를 보며 저나 제 스승, 혹은 제가 공부하는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끌렸던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아니면 '철학흥신소'로 한번 놀러오세요. 좋은 사람들입니다. 해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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