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운전을 하다가 옆차와 시비가 붙은 장면이다. 장소는 내가 다니던 학원 앞이었고 차에는 엄마와 언니가 타고 있었다. 나는 학원을 마치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기 위해 아버지가 정차해놓은 차에 탔다. 아마도 아버지는 차를 빼다가 옆 차선에서 주행중이었던 차와 시비가 붙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길거리에서 고성을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고, 엄마는 내 친구들이나 친구 부모님들이 그 장면을 볼까봐 안절부절해했다. 아버지는 원색적인 말싸움을 했다. 서로 삿대질을 하며 “너 몇 살이야!”부터 “그래, 나 돈 많다!”(상대방이 아버지의 차종을 보고 한 마디를 해서 나온 말이었다)까지 별의별 말들이 다 오갔다. 서로를 때릴 듯이 위협하는 제스처도 몇 번 나왔다. 결국 싸움은 얼마간 지속되다가 주변 파출소에 가서 마무리되었다. 그날 흥분해서 길거리에서 싸우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마음 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해하던 어린 나의 모습도.
서른 몇 살에 지하철에서 남자 고등학생들과 싸웠다. “못생긴 게 거울 본다고 이뻐지냐.”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원색적인 말싸움을 했다. “너 몇 살이야!”부터 “그래, 나 어른이다!”까지 별의별 말들을 다 뱉었다. 때릴 듯한 제스처는 하지 못해서 치사하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협박을 했다. 내가 봐도 초딩들의 싸움을 방불케 하는 유치뽕짝한 싸움이었다. 그랬는데도 싸움이 끝나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정도로 긴장하고 흥분했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내 모습에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왜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웠던 걸까?
그날 나는 왜 지하철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웠던 걸까?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못생겼다”라는 말을 들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나는 정말 못생긴 사람이 되어버린 채 영영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단전에서 없는 용기를 쥐어짜내 반발했던 것이다. 나 못생긴 사람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 그말 취소하라고. 아버지 역시 그랬던 것 아니었을까? 아버지도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날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시비가 붙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약한 남자’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나 약한 남자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 나 무시하지 말라고 반발했던 것 아니었을까? 새삼스레 그때 서른 몇 살이었을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다. 우리 둘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이구나.
내가 ‘못생긴 여자’라서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처럼, 아버지는 ‘약한 남자’라서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타고난 신체조건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예쁨’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듯, 아버지 역시 타고난 신체조건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강함’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작은 키, 왜소한 몸, 약한 힘, 평범한 운동 신경.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 거칠었을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에게 ‘힘’ 때문에 상처받았던 기억이나 위축되었던 경험이 없었을 리 없다. 나 역시 예쁘지 않은 얼굴로 살아오면서 ‘외모’ 때문에 상처받고 위축되었던 경험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쉽게 말해, 나에게는 외모 콤플렉스가, 아버지에게 힘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이다. 콤플렉스가 무엇인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하철에서 ‘나 못생겨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나 힘이 약해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폭로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흥분해서 반발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그날 나와 아버지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 나한테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말하지마!” 그것은 콤플렉스가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방어였을 테다.
물론 콤플렉스가 없으면 그런 자기방어를 할 필요조차 없다. 예쁜 여자는 못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의아해할 뿐이고, 강한 남자는 시비가 붙어도 가급적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쁜 여자는 자신이 예쁘다고 진정으로 믿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강한 남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강하다고 진정으로 믿는 이는 굳이 싸움에서 이겨서 강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지닌 이들의 사정은 다르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믿고 그것을 긍정하지 못하는(‘난 못생겨서 사랑받지 못할 거야!’) 이는 ‘자신이 못생기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내가 그날 학생들에게 ‘그 말 취소하라’는 말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아버지 역시 그날 주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 애썼던 이유는 ‘자신이 약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어서였을 테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콤플렉스의 동병상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인 나는 ‘내가 힘이 약해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자의 경우 ‘힘이 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랑받는 조건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자의 경우 ‘힘이 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조건에 들어가기까지 한다. 지금은 덜 하지만, 여리여리한 여자에 대한 사회적 선호나 격한 운동을 하는 여자에 대한 사회적 불호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사회에는 힘과 힘이 충돌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충돌에서 밀리면 작게는 불이익이나 불쾌감을, 크게는 신체적 고통이나 생존의 위협까지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남자의 경우 ‘힘이 세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조건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반면 여자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힘이 세지는 것보다는 ‘강한 남자’를 통해 힘과 힘이 충돌하는 상황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경향이 있다(물론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여자들 사이에서 신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강한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는 어린 시절 내가 길거리에서 싸우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심 뿌듯해했던 것과도 직결된다. 그때 나는 왜 뿌듯했던 것일까? 어린 내 눈에 아버지가 ‘강한 남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보호받고 싶었던 어린 아이였으니까.
그것이 내가 아버지의 ‘힘’ 콤플렉스가 안쓰러우면서도 그 콤플렉스로부터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힘’ 콤플렉스의 정체가 ‘내가 약한 남자라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역시 ‘강한 남자’로부터 보호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연인들과의 관계에서 조금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꽤 다양한 계열의 남자들을 만나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아버지 같은 ‘힘’ 콤플렉스를 가진 남자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외모 콤플렉스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여자가 극소수이듯, 힘 콤플레스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남자 역시 극소수인 것 같았다. 내가 좋아했던 남자들 역시 얼마나 잘 숨기냐 못 숨기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갈등이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상대방의 덩치만 보고 으레 위협을 느끼는 남자도 있었고, 내가 길을 가다가 동작이 커지면 혹시라도 지나가는 행인을 쳐서 시비가 붙을까봐 긴장하는 남자도 있었으며, 언제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을지 모르니 늘 싸우는 상황에 대비해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남자도 있었다.
그런 남자들을 보며 난 안쓰러웠다. 그들 모두 ‘힘’ 때문에 상처받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재떨이로 맞은 경험, 학교 친구랑 싸우다가 대걸레로 머리를 짓밟혔던 경험, 군대 선임에게 무방비 상태로 신체적·정서적 괴롭힘을 당했던 경험. 그 모든 경험이 여자인 나에게는 분명 생소한 이야기였다. 여자인 내가 지금까지 당한 신체적 폭력이라고는 기껏해야 회초리를 맞거나 머리 끄댕이를 잡힌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했다. 여자들은 살면서 신체적으로 충돌하는 상황에 놓일 일이 거의 없다. 여자들끼리는 몸으로 싸우지 않고, 혹여 싸운다 하더라도 기세싸움만 할 뿐 서로 물리적 위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남자가 여자와 몸으로 충돌하는 상황 역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신체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잘 느끼지 않는다. ‘신체적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 자체에 놓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자들이 많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다. (물론 여자들을 그만큼 ‘성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여자들이 남자들의 ‘신체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남자들이 여자들의 ’성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본다. 남자들 역시 ‘성적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 자체에 놓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충동적으로 레슬링 체육관에 등록을 했다. 약한 내가 너무 싫어서였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 증오를 품지도 풀지도 못해 그저 위로받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내가 너무 꼴보기 싫어서였다. 어떻게든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와 겨루는 운동을 택했다. 체육관에는 여자 관원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남자 관원들 하고만 스파링을 했다. 체급 차이에, 무엇보다 성별 차이가 있으니 언제나 배려 가득한, 소위 말하는 접대 스파링만 했다. 남자 관원들은 혹시라도 내가 다칠까봐 넘길 때도 살살 넘겨주었고, 내가 기술을 쓰면 일부로 맛있게 넘어가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무 고통 없이 즐겁게 스파링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관장님이 한 중학생 남자아이와 스파링을 하라고 했다. 나보다 체급은 조금 높지만 크게 차이나지 않는 아이였다. 그 남자아이와 스파링을 하면서 2분 동안 열 번 넘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처음 하는 격한 스파링에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그 아이는 성인 남자 관원들과 달리 나를 여자로 보지 않기에 배려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에게는 아직 “여자를 배려해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배려 없는 진짜 싸움이 끝났다. 얼얼한 몸을 이끌고 물 한잔을 마셨다.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강해지고 싶어서 ‘싸움’을 하는데 그 와중에 배려를 바라는 내가 너무 어이없어서. 그때 깨달았다. 배려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약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그리고 배려해주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은 내가 약한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적어도 ‘싸움’을 하려면 배려받고 싶은 마음은 집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잔데 왜 나 배려 안해줘!” 여자로 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배려와 보호를 바라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배려받고 보호받고 싶다는 마음을 집어치우자 순식간에 몸과 몸이 충돌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남자들이 사는 세계가 이런 거라는 사실을 조금은 체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체육관에 여자 관원들이 들어오면 일단 덩치부터 체크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파링을 하다가 압도적인 힘 차이를 느끼면 굉장히 공손해지면서 상대방을 급칭찬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무 이유없이 악수를 청하거나 실없는 미소를 지은 적도 많다. 그 모든 것이 언젠가 내가 남자들에게서 보았던 행동들이었다. 남자들이 자기보다 강한 남자를 만났을 때 자신은 별로 싸울 의지가 없다고 어필하기 위해 하는 대표적인 행동들. 약한 몸으로 몸과 몸이 충돌하는 세계에 들어오니 나 역시 그런 행동들을 금세 따라하게 되었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일상 생활에서도 그런 세계에 살고 있을 남자들이 조금은 짠하게 또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물론 싸움을 배우러 간 것이기에 계속 실실거리며 웃고만 있지는 않았다.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해도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술이나 전략은 나 같은 사람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발전해온 것이었다. 생활체육대회에 나갔다. 여자의 경우 체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맞는 체급이 없었다. 상대 선수와 거의 5키로 정도의 핸디캡을 안고 경기를 하게 되었다. 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기에 당연히 키도 크고 허벅지도 굵었다. 상대방에게 먼저 태클을 들어가면 무게로도 힘으로도 밀릴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몸을 일으켜 공간을 주며 상대방이 정면으로 태클을 들어오도록 유도를 했다. 심판이 방어적인 플레이를 한다고 패널티를 주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은 조급해서 나의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 상대는 가장 누르기 쉬운 정면으로 태클을 들어왔고 나는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상대를 누르다가 잽싸게 한바퀴를 돌아 뒤를 잡았다. 그리고 상대가 당황하는 틈을 타서 쉬지 않고 준비한 연계 공격에 들어갔다. 그렇게 딴 점수로 그 경기를 이겼다. 일반인들의 싸움에서는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하더라도 이길 궁리를 하며 잘 준비하면 왠만큼은 이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 나는 ‘싸움’을 배우고 있는 단계다. 지하철에서 고등학생들과 시비 붙었던 경험부터 생활체육대회에서 레슬링으로 은메달을 딴 경험까지 작은 ‘싸움’의 경험들을 쌓아가고 있다. 지금은 복싱을 배우고 있는데 상대방이 조금만 주먹을 뻗어도 맞을까봐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거나 오버액션을 취하기 일쑤다. 싸움은 늘 처음하는 것처럼 매번 어렵기만 하다. 그래도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보호받고 배려받아야 한다는 마음을 버려버리니 남자들의 마음이 이해될 뿐만 아니라, '싸움'이라는 세상이 새롭게 열린 느낌이다. ‘싸움’의 세상에서 보호받고 배려받는 것은 없다. 나 대신 싸워주는 사람 역시 없다. 그걸 바란다면 애초에 ‘싸움’의 세상에 와서는 안될 것이다. 내 ‘싸움’은 오롯이 내가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밀리면 나는 그만큼 내 영역을 잃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링에서 얻어맞는 것일지, 자긍심에 상처입는 일일지,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을 잃게되는 것일지는 싸움의 종류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싸움의 룰은 근본적으로 같다. 밀리면 잃는다는 것.
어느 여자 정치인이 맨손으로 계엄군의 총부리를 쥐는 장면을 보았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강한 사람은 결국 지켜낸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제 막 시작된 나의 싸움의 여정이, 언젠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수 있는 강함으로 꽃피우기를. 지금부터 싸움을 잘 배워서 언젠가 아들에게 "넌 날 아직 이길 수 없다!"며 싸움을 가르치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나는 강한 남자를 키워내는 강한 여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함께 웃으며 싸우고 싶다.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온갖 종류의 힘에 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