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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09. 2024

[자존감] '나는 못생겼다'는 자기인식에 대하여

“못생긴 게 거울 본다고 이뻐지냐?”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이었다. 걸어가다가 작은 상점 앞에 놓인 전신 거울에 잠시 얼굴을 비추어보고 있었다. 귀를 의심했다. 뒤를 돌아보니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두 명이 내 뒤를 지나갔다. 둘 중 한 명이 뱉은 말이 분명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한 말이 분명해보였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당시 나는 삶의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혼란스럽고 위축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생이 안 풀릴라니까 별 그지 같은 일까지 다 벌어지네.’ 가뜩이나 먹구름 낀 삶에 길 가다 똥물까지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학생이어도 상대는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이었으니까. 그래도 물러서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삶은 똥물을 뒤집어쓴 채 여기서 가라앉아버릴 것 같았다. 단전에서 없는 용기를 끌어내어 외쳤다. “야, 니들 거기 서봐!”


무서웠다. 길거리에서 혼자 사람들과 시비 붙은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너 뭐라고 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줌마가 무슨 상관이야.” 둘 중 더 껄렁거려보이는 아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일단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한 아이가 내 손을 쳐서 폰을 떨어뜨리게 할까 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자 둘은 당황했다. “너네 학교 어디야. 빨리 이름 말해. 어차피 교복 찾아보면 다 나와. 니네 명찰도 다 찍혔어.” 둘 중 더 순해보이는 아이가 사진을 지워달라고 했다. 때마침 지하철이 왔다.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지하철에 타 버렸다. 둘은 부담스러웠는지 타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지하철이 출발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속된 말로 현타가 왔다. 학생들에게 고작 “너 학교 선생님한테 이른다!”라고 협박한 서른 몇 살의 내가 너무 찌질해서. 물론 겁만 주려고 했을 뿐 진짜 연락할 생각은 없었지만, 진짜 연락한다고 한들 뭐라고 말할 건가? “쟤네들이 저 보고 못생겼다고 말했어요!”라고 말할 건가? 역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가 문득 역무원이 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역시 “쟤네들이 저 보고 못생겼다고 말했어요!”라는 말밖에는 할말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못생겼다’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공표할 생각을 하니 너무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겁만 주고 지하철 안으로 도망간 것이었다. 갑자기 억울함이 몰려 들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한거지?’라는 생각부터 ‘아까 나 마스크 쓰고 있었는데 내 얼굴 제대로 보지도 않았잖아!’라는 생각까지, 별의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아니 사랑받을 수 있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좋아하던 사람에게 가던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를 만나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근처 카페에 잠시 들렀다. 커피를 마시고 방금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거 ‘성추행’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가 왜 그걸 명예훼손이나 모욕이 아닌 성추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별 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말 없이 계속 외치고 있었다. 제발 화를 내달라고. “누가 혜원이한테 못생겼다고 했어! 이렇게 이쁜데!” 유치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조금 화를 내다가 달달한 것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네가 맞서 싸운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평소에 그는 그와 비슷한 갈등 상황에서 잘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알고 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집필실에 출근을 해 스승을 만났다. 스승에게도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좋아하던 사람에게는 위로받고 싶었다면, 존경하는 스승에게는 칭찬받고 싶었다. 아무 이유 없이 똥물을 맞았지만 가만히 맞고만 있지 않고 당당하게 항의한 나의 용기를 칭찬받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가만히 있어요?” “학생들이었다며.” “다 큰 고등학생들이었어요. 게다가 한두 번 해본 솜씨도 아니었다고요. 그런 건 응징해줘야죠!” 나는 스승의 반응에 시무룩해졌다. 조금 있다가 함께 일하는 친구가 왔다. 스승이 내 이야기를 하며 너라면 어떻게 반응할 거냐고 물어봤다. 그 친구는 나처럼 외모에 대한 상처가 있거나 위축감이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난 예쁜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요?” “그렇지.” 스승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날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by Sobae Park



내가 그날 두 학생들에게 흥분해서 화를 내고 눈물까지 핑 돌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자기인식,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못생겼으니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불안이 급작스럽게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서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깊은 불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진짜로 내가 못생겼는지 아닌지 그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 말에 동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나를 ‘못생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으니까. 그것은 내가 부정적인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역을 생각해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나는 ‘가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자기인식이 없다. 그것은 내가 운좋게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단 한번도 ‘나는 가난하다’라는 자기인식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나의 겉모습이나 옷차림 등을 보고 “넌 왜 이렇게 없어보이냐.”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도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물론 나를 깎아내리거나 비꼬려는 의도가 느껴지면 그만큼은 기분이 안 좋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어도 그건 나와 다른 의견이라 생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왜 나와 다르게 나를 인식하는지 생각해볼 여유도 있다. 아마도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자기인식이 없는 그 친구가 스승의 질문에 “난 예쁜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요?"라고 답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테다(게다가 그 친구는 평소에 나를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하기에 나에게 감정이입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누군가가 나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면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궁금해질 테니까.


그날 스승이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승은 나를 못생겼다고 인식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못생겼다고 인식하니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눈빛이었을 테다. 게다가 한번 마음에 자리잡은 부정적인 자기인식은 “왜 그렇게 생각해? 너 예뻐!” 같은 가벼운 말로는 결코 변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인식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을 테다. 그날 위로받고 싶었던 것도, 칭찬받고 싶었던 것도 내가 나를 ‘못생겼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설령 “혜원이가 얼마나 이쁜데!”라고 위로받았더라도, 또 “너에 대한 공격에 잘 대처했다!”라고 칭찬받았더라도 잠시 안도했을 뿐 계속 찝찝했을 테다. ‘나는 못생겼다’는 자기인식은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한 동안 그 일은 나의 부정적인 자기인식이 예기치 않게 폭로되었던, 마음 한 구석에 꽁꽁 숨겨놓고 싶은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나를 ‘못생겼다’고 인식한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친구가 스승에게 연애상담을 요청했다. 어떤 남자에게 끌리는데 그 남자가 자기는 예쁜 여자가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나처럼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좋아하는 사람 생겼는데 잘 안 돼서 안타깝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승의 답이 의외였다. “그러면 예쁜 여자도 만나보라 하고 나랑도 만나보자고 해요.” 내 머릿속에는 없던 답이었다. 그런데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보다 매력적인 답도 없을 것 같았다. 남녀를 바꾸어 생각해보았다. 어떤 가난한 남자가 나에게 와서 “돈 많은 남자한테 끌리면 만나봐요. 나랑도 만나 보면서.”라고 고백한다면 나는 그 순간 그에게 홀딱 반해버렸을 테다. 그 말은 상대의 취향과 자유를 온전히 존중해주며 그에 따르는 모든 불안과 번뇌는 자기가 껴안겠다는 선언과도 같으니까. 그것은 ‘내가 너에게 사랑받겠다’라는 결연한 의지와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선언이다. 내가 그간 사랑받는 것에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알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못생겼으니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불안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나는 못생겼다’는 자기인식이고, 하나는 ‘나는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부정적 믿음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소중한 관계들을 맺으며 ‘나는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부정적 믿음은 점점 옅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내 삶에 사랑받은 순간들이 두텁게 쌓여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못생겼다’ 혹은 ‘나는 예쁘지 않다’는 자기인식은 잘 변하지 않았다. ‘못생겼다’ 혹은 ‘예쁘지 않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예쁘게 봐주었다. 그럴수록 나도 내 얼굴이 점점 좋아졌다. 하지만 내가 내 얼굴을 좋아하게 된 것과는 별개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못생겼다’ 혹은 ‘예쁘지 않다’고 인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예쁨’의 기준에 부합하는 요소들을 별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키, 통통한 몸,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 걸걸한 목소리까지. 아무리 후하게 쳐준다 해도 ‘인상이 좋다’ ‘귀엽다’ 이상으로는 어필하기 힘든 외모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알고 있다. 여자에게 ‘인상이 좋다’ ‘귀엽다’는 말은 예쁘지 않을 때 하는 말이라는 걸.



“네가 화웨이면 화웨이의 전략을 펼치면 되는 거야.” 언젠가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풀 죽어 있던 나에게 스승이 해준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빵 터졌다. 스승은 외모라는 영역에서 스스로를 화웨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넌 애플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못생겼다'는 자기인식이 문제가 아니라, '못생기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부정적 믿음이 문제구나. 실제로 그랬다. IT비즈니스에 오랜 시간 몸담았던 나는 세상에는 '애플' 말고도 사랑받는 기업이 많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매력으로, 애플과 정반대의 영역에서 애플만큼 큰 사랑을 받는 기업들이 많다. 그에 대한 예시로 스승이 중국 기업 ‘화웨이’를 말한 것이었을 테다. 그때 진정한 자존감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억지스럽게 '애플'이라 믿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화웨이'라 받아들이되 ‘화웨이’만의 방식으로 '애플'만큼 사랑받겠다는 결연한 의지 아닐까?


또 언젠가 길을 가다가 ‘못생겼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인상과 분위기가 좋아진다고 해도 주어진 신체조건과 이목구비는 바뀌지 않으니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으리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 제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고백을 했다가 “전 예쁜 여자가 좋아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 외모 빼고는 다 상태 좋아요. 만나보면 아실 거예요.” 적어도 이 두 말은 지금 내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니까. 마음에 먹구름이 끼면 다시 내 얼굴이 미워진다는 사실을 안다. 똥물을 쓴 기분으로 살아가면 얼굴 포함 모든 것의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것 역시 안다. 그래서 나는 사랑받는 것에 더욱 적극적이 되려고 한다. 사랑받으면 마음이 펴지고 얼굴도 펴지고 삶도 펴지게 되니까.


삶에 점점 주름살이 늘어난다. 사랑받지 못할 이유들이 계속 발견되고 추가된다. 정숙하지 않아서, 예쁘지 않아서, 나이 많아서, 이혼해서. 나열해보면 내가 봐도 하자 많은 여자다. 하지만 나의 하자들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평온할 때도 있다. 정숙하지 않고, 예쁘지 않고, 나이 많고, 이혼까지 했어도, 나는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쓰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하자를 고칠 수도 감출 수도 없다. 그럴려고 할 때 나는 또 끝도 없는 불안에 빠질 것이다. 대신 나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 하자 많은 여자라서 더욱 아름답게 살고 싶다. 그것이 ‘화웨이’만의 전략일 테다. 작은 키로, 통통한 몸으로,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로, 걸걸한 목소리로,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사랑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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