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엄마가 원하는 것들을 하고 엄마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그리고 ‘미움받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랬다. 당시 엄마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공부 잘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가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어 사랑받길 바랐다. 나 역시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기에 엄마가 바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안도했고, 나 역시 이제 사랑받을 일만 남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가 바랐던 대학에 합격한 날, 묘한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분명 기쁜데 기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왜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는데 사랑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미움받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랐다. 엄마에게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미움받는 여자’였다. 엄마는 내가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어 사랑받길 바랐던 만큼, ‘정숙하지 못한 여자’가 되어 미움받지 않길 바랐다. 엄마가 나에게 정숙한 행동들을 강요하고 정숙하지 못한 행동들을 금지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내가 미움받지 않길 바래서. 그것은 내가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에,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게임과 만화책을 금지했던 것만큼이나 엄마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말한 것이다. 아직 앳된 티도 다 벗지 못했던 스물 몇 살의 내가. “엄마, 나 낙태했어. 그래서 우울증 걸린 거야.” 나에게 그것은 불행의 밑바닥에서 간절히 외친 마지막 구조 요청 같은 것이었지만, 엄마에게는 어린 딸이 영영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테다.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타력에 의해서도 아니고, 본인의 부주의로 인해서.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네가 날 배신해!” 그날 엄마가 나에게 되돌렸던 말을 난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나의 간절한 구조 요청을 엄마가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일은 내 마음에 오랜 상처로 남았다. 그 상흔은 나와 엄마의 관계를 썩어들어가게 했다. 나는 이유없이 엄마에게 짜증내는 일이 많아졌고, 엄마가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뾰족한 말과 행동들을 서슴없이 해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서운함을 터뜨리며 자기연민에 빠지곤 했다. 단 한번도 엄마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사실은 그 말이 너무 아팠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때의 상처가 나와 엄마의 관계를 계속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마음 여린 엄마에게 ‘엄마가 예전에 날 상처주었다’고 말하면, 엄마는 더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자 그날의 기억을 수십 번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내가 “나 낙태했어.”가 아니라 “나 자퇴했어.”라고 말했다면 엄마는 어떤 반응이었을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날 배신해!” 엄마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 같았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가 나를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날 ‘정숙한 여자’로 키우고 싶었던 거라니, 왜 나의 임신중절이 엄마에게 ‘배신’으로 느껴졌을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날 나에게 소리를 지르던 엄마의 얼굴이 처음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은 짠하고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의 믿음 뒤에 있던 엄마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엄마가 나를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또 ‘정숙한 여자’로 키우고 싶어했던 건, 내가 더 사랑받고 덜 상처받길 바랬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조금 더 사랑받고 조금 덜 상처받길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마음을 보지 못했던 건 철없는 나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엄마 역시 놓친 것이 있었다. 엄마의 믿음, 즉 ‘공부 잘하는 사람’이 사랑받고,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믿음은 확증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대학 합격증을 받은 날 느낀 허무함에서, 또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학을 다니며 느낀 혼란스러움에서, 엄마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점점 깨달아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온몸으로 체험한 삶의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까. 공부를 잘한다고 사랑받는 건 아니었고, 공부를 잘해서 (이것저것 재는 바람에) 더 사랑하기 어려워지는 지점마저 있었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믿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믿음도 확증되지 않은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확증하기 어려운 믿음이기도 했다. ‘공부 잘하면 사랑받는다’는 믿음은 공부를 잘 하게 된 순간 바로 확인되는 믿음이지만,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믿음은 정숙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바로 확인되는 믿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반증, 즉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확인을 받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엄마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나 역시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불안은 어떻게 딸에게 전이가 될까? 그날 ‘정숙하지 못한 여자’가 되어버린 나를 보고 터져버린 엄마의 불안은 고스란히 내 마음에 새겨져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 역시 내가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건강검진 차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을 때마다 혹시라도 자궁에 임신중절의 흔적이 남아있을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그걸 눈치챈 의사나 간호사가 나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친구는 나의 임신중절 사실을 친구들에게 이미 말했던 것 같다. 몇몇 남자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이 내가 수술 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때 온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 같아서. 임신중절이 나의 주홍글씨처럼 느껴졌다. 이런 내가 나중에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을지, 나의 미래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엄마처럼 나를 버리진 않을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여자로서 앞으로 내가 사랑받긴 어려울 것이라 속단했다. 그렇게 난 남자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사건’은 불행의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행복의 사건도 있었다. 불행의 사건처럼 행복의 사건 역시 어느 날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삶에 들이닥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다가 한 비즈니스 미팅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 소처럼 맑고 동그란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 남자가 첫 만남에서 나에게 반했다고 했다. 나는 살면서 처음 겪는 일에 당황했다. 나조차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는 내가 좋다며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당시 나에게 남자는 언제 또 상처를 주고 도망갈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직진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마음을 표현하며 다가왔다. 나는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곧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 한구석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임신중절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남자도 결국 날 싫어하겠지?’ 나의 불안의 실체는 그것이었다. 엄마로부터 전이된 불안은 나의 모든 관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이 관계를 끊어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가장 적게 상처받는 길이라 믿었으니까. 엄마도 보듬어주지 못했던 내 주홍글씨를 보듬어줄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사귄 지 두달 쯤 되었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나 사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적이 있었어. 나 대학교 때 낙태했었어.” 그는 소처럼 착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 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방 한쪽 벽을 힘껏 내리쳤다.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나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고 따지고 싶은데 차마 따질 수 없어서 겨우 참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다며 오늘은 이만 집에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자고 했다. 역시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이미 메마른 마음은 차가워지지도 않았다.
밤 늦게 전화가 왔다. 그는 조금 술에 취한 듯한 말투였다. 헤어지자는 말을 할 것 같아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자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에게는 원래 연년생 동생 밑으로 동생 한 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월급쟁이의 벌이로 아이 둘에 할머니까지 부양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두 분은 고심 끝에 임신중절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셋째를 떠나보내고 꽤 오랜 시간 슬픔에 잠겨 있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아버지는 셋째를 위한 작은 천도재를 지내자고 했고, 어머니는 그 천도재를 지내며 셋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겨우 떠나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천도재를 지냈어. 내가 지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거든. 너한테 전화하기 전에 이 벤치에 앉아서 기도를 올렸어. 너의 아이한테 말이야. 뭐라고 기도했냐고? ‘아기야,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혜원이가 어려서 그랬을 거야.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까 너 절대 혜원이 괴롭히면 안돼. 혜원이도 상처 많이 받았거든.‘ 이렇게 기도했어. 그러니까 너 이제 걱정 안해도 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따뜻해서. 그 덩치에 혼자 놀이터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며 기도했을 생각을 하니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사랑은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모양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내가 남자에게 처음 받아본 사랑이었다. 나의 주홍글씨는 눈녹듯이 녹아내렸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도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서 받을 수 있었던 사랑이었다.
그런 일은 한번 더 일어났다. 시간이 흘러 서른 초반에 한 인문학 공동체에 갔다. 그곳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는 글쓰기 수업을 했다. 우울증 때문에 한참 고생하고 있을 때라 어떻게든 나아지고 싶은 마음에 있는 힘껏 나의 상처받은 기억들을 글로 써내려갔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가족이나 연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나의 임신중절 이야기를 꺼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팠던 기억을 조심스레 글로 옮겨 적었다. 어떤 부분을 쓸 땐 눈물이 핑 돌았고 어떤 부분을 쓸 땐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화가 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글을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읽는 공간에 올렸다. 혹시라도 날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다음 날 한 남자가 나에게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내 글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저는 여자를 보고 한 번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혜원 씨는 멋있네요.” 어쩌면 성차별적이라 할 수 있는 그 말이 찡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그의 글을 읽었기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번씩 패야 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하던 매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시골 마을에서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요받으며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여자는 예쁘고 섹시할 수는 있지만, 멋있을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여자’인 나에게, 심지어 ‘정숙하지 못한 여자’인 나에게 ‘멋있다’는 칭찬을 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에게 왜 ‘멋있다’는 감정을 느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있는 힘껏 애를 쓰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그 상처를 있는 힘껏 치유하려는 이들은 반짝거리게 마련이다. 나 역시 그에게서 반짝거림을 느꼈듯, 그 역시 나에게서 반짝거림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가장 혐오할 만한 가부장적인 남자로부터 ‘멋있다’는 말을 들은 일은 나에게 큰 용기를 준 사건이 되었다. 나의 주홍글씨가 나만의 매력적인 무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도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서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 엄마는 평생을 그 불안 속에서 살아왔고 아마 지금도 살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몇번의 반증을 경험했어도, 그 불안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연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가장 먼저 밀려온 감정이 바로 그 불안이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에게, 그리고 작은 공동체 식구들에게 나의 ‘정숙하지 못한’ 삶을 이야기해왔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지우지 않을 글들로 그 삶을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처럼 느껴졌다. 몇 년씩이나 연재를 고민했던 건 여전히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마음이다. 확증은 언제나 내가 한 걸음을 먼저 걸었을 때만 일어났다. 내가 먼저 남자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꺼냈기에 ‘정숙하지 못한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증을 받을 수 있었고, 내가 먼저 공동체에서 내 이야기를 썼기에 ‘정숙하지 못한 나’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확증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기에, 나의 ‘정숙하지 못한’ 삶을 이렇게 펼쳐 놓은 채 그 속에서 반짝거림을 발견해줄 한 사람을 다시 기다리고 싶다. 나의 삶을, 상처받은 것은 상처받은 대로 또 상처준 것은 상처준 대로 고스란히 내보인 채, 다시 벌거벗은 몸으로 사랑을 기다리고 싶다. 엄마의 주홍글씨를 보듬어줄 수 있는 건, 그렇게 한걸음씩 진짜 ‘사랑받은 사람'이 된 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