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드모델 해봐야 하나?”
“왜?”
“자유로워 보여서.”
친구는 술을 마실 때면 누드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한 누드모델을 봤는데, 그 모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당당하게 자기 몸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 친구답다고 생각했다.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평소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 했다. 그래서였을 테다. 그는 자기 자신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잘 끌리곤 했다. 누드모델에 대한 끌림도 그러한 동경의 일환이었을 테다. 그의 이야기를 거리를 둔 채 들었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 믿었으니까. 그 이야기는 술자리의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기억되었다.
몇 년이 지났다. 그 친구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날 그 누드모델에 대한 대화가 떠오르더니 머릿속을 떠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 역시 누드모델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당시 나는 어설프게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레 찾아온 이 충동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몇 가지 원인을 찾았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충동 역시 사그러들 것이라 믿었다. 마치 첫눈에 반한 사람이 사실은 첫사랑을 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그에 대한 마음 역시 사그러들 듯이. 그런데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충동은 세졌다. 불현 듯 나의 스승이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무엇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보다 네가 그 무엇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검색창을 켰다. 판단하지 말고 일단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누드모델 알바’라고 치자 몇 개의 포스팅이 떴다. 한 에이전시에 연락을 했다.
에이전시는 지하에 있었다. 무거운 철문을 열자 생각보다 밝고 따뜻한 공간이 나왔다. 평소 화실로도 쓰인다는 그 공간에는 벽마다 누드 크로키화가 붙어 있었다. 늙은 남자의 몸, 살집 있는 여자의 몸, 소녀처럼 수줍은 몸, 잔뜩 웅크린 몸, 누군가를 기다리는 몸. 종이 안에는 다양한 몸들이 담겨 있었다. 그 몸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원장과 간단한 상담을 했다. 다다음주 토요일에 화가들을 대상으로 한 누드 크로키 시간이 잡혀 있으니 그때와서 일을 한번 해보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하냐고 물었더니 음악을 틀어놓고 3분씩 총 30개의 포즈를 취하면 된다고 답했다. 일에 대한 설명은 그게 다였다. 이 일은 느낌 가는 대로 하는 일이니,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한 뒤 연락처를 주고 일어섰다. 계단을 올라가자 파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한다고 한 거지?’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캘린더 앱을 열었다. 다다음주 토요일에 일정을 표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그날 누드모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후 정말로 누드모델에 대한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내가 상담을 하고 왔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흘렀다. 금요일 밤이 되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 모두 집에 가고 혼자 작업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뭐지? 나 지금 긴장한 건가?’ 당황스러웠다.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데.’ 다시 심장 박동소리를 들어보았다. 벌떡이는 리듬 사이로 잔잔한 기쁨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시험 전날 느끼던 긴장과는 다른 결의 긴장이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 설렘이었다.
“우리는 자기 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저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항상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오랜 시간 정신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살아왔기에, 몸에 방점을 둔 스피노자의 말에 반발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몸’보다 ‘알지 못한다’는 부분이 싫었던 것이다. 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매우 싫어한다. 머리로 추론하여 미리 대비할 수 없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거나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 오랜만에 느껴본 설렘의 박동 속에서 처음으로 ‘불확실성’이 부정이 아닌 긍정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날 내가 설렘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몸이 누드모델 일을 하며 무엇을 느끼고 어떤 반응을 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기에, 삶은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한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이 찾아왔다.
에이전시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원장이 일하는 순서를 알려주었다. ‘시간이 되면 준비한 음악을 틀고 가운을 벗는다, 타이머에 시작 버튼을 누르고 포즈를 취한다, 알람이 울리면 다음 포즈를 취한다, 열 개 포즈를 취하면 십 분 휴식 후 다음 세션을 시작한다, 총 세 개의 세션이 끝나면 타이머를 끄고 가운을 입는다.’ 머릿속으로 순서를 계속 되뇌었다. 어느덧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젤을 펴고 물감을 짜고 연필을 깎으며 가벼운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 공간에서 긴장하고 있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가운을 벗을 수 있을까? 포즈 취하다가 몸이 얼어버리면 어떡하지? 혹시 눈물이 터지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걱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시작하겠습니다.” 원장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한 음악을 틀고 가운을 벗었다. 벽 한 면을 가득 메운 거울에 내 벌거벗은 몸이 비추어졌다. 거울 속의 내 눈과 마주쳤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타이머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포즈를 취했다. 사각사각, 숨죽인 공간에 연필 소리만 들렸다.
생각보다 옷 벗는 건 괜찮았다. 머릿속은 온통 다음 포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느낌 가는 대로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포즈 구상도 해오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 가는 대로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포즈를 취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다음 포즈를 구상했다. 열 개 포즈가 끝나고 첫 번째 쉬는 시간이 왔다. 원장이 나에게 다가와 나른한 포즈만 취하지 말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걸 몸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앉은 포즈, 선 포즈, 누운 포즈처럼, 몸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곧 ‘포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으로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해보라니. 두 번째 세션이 시작되었다.
음악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러자 그 음악을 들었을 때 내가 취하던 자세가 떠올랐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음악을 들을 때 그런 자세를 하고 자주 울었었다. 그 자세를 취하자 갑자기 울컥하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다음엔 내가 삶에서 취했던 자세들을 떠올려보았다. 일어서서 머리를 쥐어 싸매는 모양을 했다. 그 자세를 취하자 절망스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렇게 머리를 쥐어 싸매며 괴로워하곤 했다. 괴로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다음 포즈는 그걸 힘껏 털어내는 자세를 취하고 싶었다. 주먹으로 무언가를 때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포즈는 취할 수 없었다. 갑자기 원장이 상담할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일을 처음 할 때 포즈 취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어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몸으로 해보지 않은 것을 몸으로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온몸이 얼어붙었다. 내가 삶에서 해본 자세가 몇 개나 있을까.
다음 세션 내내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포즈만을 취했다. 바닥에 누워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포즈, 웅크리고 앉아 땅의 한 지점을 바라보는 포즈. 어깨를 떨구고 뒷짐을 지고 서 있는 포즈. 내가 포즈를 취할 때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기운이 그 공간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밝고 역동적인 감정을 표현해보려고 허둥대다가 다음 포즈를 알리는 알람 소리를 놓치는 실수까지 저질러버렸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정말로 몸을 유쾌하고 역동적으로 써본 적이 없다는 자각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그저 내 몸이 기억하는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울하고 무기력한 동작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내 몸에 유쾌한 동작, 역동적인 동작, 사랑의 동작, 기쁨의 동작들이 새겨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켜고 싶었다.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기지개를 켰다. 다 벗은 채로 팔을 펴고 가슴을 내미려니 쑥스러웠다. 그런데 그 자세를 취하니 마음 속에서 무언가 꿈틀하고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뭉클했다. 설레고 두근거렸다. 타이머가 길게 한번 울렸다. 세 번의 세션이 다 끝났다. 탈의실에서 옷을 입었다. 거울에 평소에 입는 츄리닝 차림의 내가 비추어졌다. 그 모습이 새삼스레 반가웠다.
“다시 누드모델 할 거야?” 가끔 친구들이 묻는다. “아니.” 누드모델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경험이 소중하긴 했지만, 그 경험 자체가 진정한 기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친구처럼,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누드모델에 끌렸던 것이 맞다. 사람들에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의 진짜 몸을 스스럼 없이 드러낼 수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누드모델을 하고 깨달은 것은 어쩌면 정반대의 진실이었다. ‘벗은 몸’ 그 자체는 진짜 몸이 아니었다. 그래서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은 진짜 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왜 누드모델을 하고 싶었는지 알았다. 나는 ‘벗은 몸’을 보여준다는 일회적 사건을 통해 빨리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벗은 몸’보다는 ‘포즈를 취하는 몸’이 진짜 몸에 가까웠다. 느낌 가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 것이 뭔지 모르던 몸, 우울하고 무기력한 포즈말고는 할 수 있는 포즈가 없었던 몸, 어떻게든 해보려고 허둥지둥대다가 실수를 연발하던 몸, 그 끈적한 관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쑥스럽게 기지개라도 켜보던 몸. 그 몸들이 진짜 나의 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은 ‘벗은 몸’이 아니라 ‘벗은 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벗은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이 자유라 착각하여 누드모델이라는 사건 속으로 들어가 당황하고 허둥대고 좌충우돌하고 깨달아가던 ‘나’였다. 그러한 ‘나’의 흐름이 ‘벗은 나’, 곧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 역시 (자유를 촉발할 수는 있어도) 자유 그 자체는 아니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벌거벗은 채로 쑥스럽게 기지개를 켰을 때 마음 한 구석에 꿈틀거리던 것의 정체. 그것은 더 유쾌하고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움직임이었다. 이후 누드모델에 대한 생각은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움튼 욕망은 몸과 마음, 그리고 삶 전반으로 뻗어나갔다. 더 이상 무기력하고 우울한 동작만을 취하지 않았다. 걷고 뛰고 들고 때리고 던지고 잡고 안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많은 동작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할 수 없던 동작을 하나씩 하나씩 할 수 있게 되는 삶. 어쩌면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 아닐까.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옷을 벗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오해.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몰랐기에 온통 옷 벗을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었는데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옷을 벗어보았기에 자유란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충동은 그런 것이다. 맞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어디로든 걷게 하는 힘. 나는 또 충동을 따라 걷고 싶다. 시작은 오해였지만, 그 낯선 길을 걸으며 만났던 모든 것들 – 심장의 쿵쾅거림, 스피노자의 문장, 종이 속 타인의 정다운 몸들, 사각대는 연필 소리, 허둥대던 나, 지하철에서 느낀 작은 깨달음 – 은 다 ‘진짜’였기 때문이다. 다시 누드‘모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벗은 나’를 계속 마주하며 살고 싶다. 두렵지만 설레는 사건 속에서 당황하고 허둥대고 좌충우돌하고 깨달으며 살고 싶다. 그렇게 더 많은 움직임을 할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언젠가 ‘벗은 나’로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나의 춤을 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