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온도로 기억된다. 그날 그 모텔 방의 서늘한 기운이 생각난다. 아직 겨울의 쌀쌀함이 채 가시지 않은 초봄의 어느 날이었다. 유학 중이던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귀국했다. 집에 가지 않고 역 주변에 모텔 방 하나를 잡았다. 내일이면 다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짐을 넣어놓고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한 남자아이를 만났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그와 함께 병원에 들어갔다. 간호사가 내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동의서’라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친구는 동의서에 이름과 주민번호를 쓰고 몇 가지 사항에 체크를 했다. “나 마취 깨어날 때까지 좀 걸릴 수도 있어.” “알아, 괜찮아.” 대기실에는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서로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친구에게 겉옷을 건네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스물두 살의 일이었다.
콘돔을 끼면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자친구는 섹스를 할 때 콘돔을 잘 끼지 않았다. 나 역시 그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섹스가 끝나면 걱정과 불안이 따라붙긴 했지만, 질외사정이나 주기법 같은 자연 피임을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더 정직히 말하자면, 미혼인 나에게 ‘임신’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마치 젊은이들이 ‘죽음’을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처럼. 하지만 ‘사건’은 들이닥쳤다. 열흘이 지나도록 생리를 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약국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한줄이었다.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아침 저녁으로 테스트기를 했다. 나흘 째에 희미하게 두 번째 줄이 나타났다. 다음 날 두줄은 또렷해졌다. 나는 변기에 멍하니 앉아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낳지 못할 이유가 수 백개는 되었다.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남자친구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딸이 ‘섹스를 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할 부모에게 ‘임신을 했다’고 말할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아찔해졌다. 스물두 살, 미혼모, 대학 중퇴생.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단어들이 삶 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저런 단어들이 붙은 삶을 살 순 없었다. 물론 학교를 다니며 아이를 기르는 삶도 상상해보았다. 황당하게도 포대기에 아이를 들쳐메고 야학을 다니는 어느 70년대 아낙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당시 내가 생각하는 미혼모의 이미지였다. 그 삶을 감당할 자신도 용기도 의지도 없었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관계를 부여잡고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 임신했어.”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할게.” 그의 침묵에 하염없이 상처받고 싶지 않아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에 그가 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다음 날 통장에는 조금의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혼자 수술을 받으려니 겁이 났다. 암암리에 중절 수술을 한다는 한국의 병원을 찾아 연락을 했다. 의사는 수술을 하려면 ‘아이를 더 키워와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가 말하는 시기에 수술 날짜를 잡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남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여, 동네 친구에게 동의서를 대신 써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다. 수술 후에 자고갈 모텔도 알아보았다. 1박 2일의 동선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제 의사의 말대로 2주 동안 ‘아이만 키우면’ 됐다.
의사는 한국에 오기 전 주변 병원에 가서 임신 확인 진단을 받아오라고 했다. 혹시라도 학교에 소문이 날까 봐 먼 도심에 있는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게 민망하고 어색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자궁 초음파는 생리통 때문에, 그마저도 질이 아닌 복부를 통해서만 해왔었다. 의사가 초음파 스틱을 휘젓자 화면에 지지직 거리는 하얀 무늬가 생겨났다. 그 무늬 한 가운데에 뻥 뚫린 듯한 검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의사는 그게 아기집이라고 했다. 나는 2주 뒤에 사라질 그 검은 동그라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죄책감이 밀려 들었다. 아직도 그 동그라미는 내 마음 속에 있다.
2주 동안 아랫배를 만지는 버릇이 생겼다. 아랫배를 만지며 검은 동그라미에게 말을 걸었다. ‘아기’라는 단어가 입에 붙진 않았지만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아기야, 미안해.” 그것이 미디어에서 보아온 이미지를 모방한 것인지, 아니면 여성에게 정말로 본능에 가까운 ‘모성’이란 게 있는 것인지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2주라는 시간은 작은 유대감이 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만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 맛있은 걸 먹으면 맛있냐고 묻게 되었고, 몸에 붙는 옷을 입으면 불편할까 봐 츄리닝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메추리알만 했던 그 동그라미가 이제는 계란만 해졌을지 궁금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끝이 정해진 관계, 그것도 곧 있으면 내 손으로 잔인하게 지워버릴 존재에게서 난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과 처음 느껴보는 미안함 속에서 2주가 지나갔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마취에서 깨어나자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흐릿하게 보였다. 의사가 수술 내용과 주의 사항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느릿느릿 일어났다. 친구가 모텔까지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친구는 나를 침대에 눕혀 놓고 보일러를 30도까지 올린 뒤 이제 가보겠다고 일어났다. 친구에게 고마웠다. 그 친구가 없었으면 동의서를 받기 위해 남자친구에게 다시 연락을 해야 했을 테다. 마취가 덜 깬 채로 모텔까지 혼자 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마음에 작은 금이라도 가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마음이 시렸다. 마음이 시리다는 게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비행기를 놓쳐선 안 되었다. 내가 낙태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었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이성복 시인의 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되지 않은 불행은 어떻게 될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섹스조차 긍정하지 못했던 내가 어떻게 임신을, 아니 임신중절을 긍정할 수 있었겠는가. 학교에 소문이라도 나면 ‘걸레’로 낙인찍힐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 무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발끈한 일이 있었다. 그거 여자에게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라 따졌던 것 같다. 그중 한 놈이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근데 넌 괜찮은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분위기 같았다. 다음 학기에 도망치듯 교환학생을 신청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니 눌러두었던 슬픔이 터져나왔다. 매일 밤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울었다. 처음 느껴보는 우울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하루종일 ‘무한도전’만 봤다. 웃음소리라도 없으면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불 꺼진 방에, 모니터에서 새어나온 불빛만 파랗게 빛났다. 그 창백한 파란 빛이 그 당시 나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이야기되지 않은 불행은 삶 전체를 불행에 빠뜨린다.
2년이 지났다. 난 정신과를 다녔고 우울증약을 먹었다. 어느 날 엄마와 티비를 보던 중이었다. 한 흑인 소녀가 토크쇼에 나와 임신중절 경험을 고백했다. 사회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사실 나도 낙태했어. 그래서 우울증 걸린 거야.” 아마도 나는 티비 속 사회자의 그 따뜻한 눈빛을 바랬던 것일 테다. 그것이 삶이 얼어버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오프라 윈프리’가 아니었다. 그때는 몰랐다. ‘준비되지 않은 채’ 이야기된 불행은 혼란과 상처만 불러온다는 사실을.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네가 날 배신해!”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에 당황했다. 나의 임신중절이 왜 엄마에 대한 배신인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바닥에 주저 앉아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울었다. 죽어버릴 거라고 했다. 나의 임신중절이 왜 엄마를 죽이는 사건인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엄마가 평생을 지켜온 ‘순결’이라는 세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었단 걸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진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때는 서럽게 우는 엄마의 모습이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 그저 남자친구에게 버림 받았듯, 엄마에게도 또 버림 받았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때 안방에서 뛰쳐나온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조금 더 오랜 시간 차가움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딱 한 마디를 했다. “네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리고 날 안아주었다. 아버지 품에서 펑펑 울었다. 그 사건 이후 처음 느껴본 따뜻함이었다. 얼어붙은 삶이 조금 녹아내린 게 느껴졌다.
검은 동그라미, 모니터의 파란 불빛,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던 엄마, 아버지의 품. 나에게 임신중절은 그런 이미지로 기억된다. 다행히 나는 그 후에도 다른 남자들을 만나 상처를 잘 치유할 수 있었다. 남자에게 상처 받았지만 남자에게 치유 역시 받았다. (이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다룬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임신중절’이라는 사건 자체를 기쁨으로 채색해주진 못했다. 그날 아버지의 품이 그랬듯, 보듬어진 ‘상처’는 분명 ‘사랑’으로 기억되었지만,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슬픔이 자꾸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그것은, 내가 받은 상처는 보듬어졌지만 내가 준 상처는 보듬지 않았기에 주어진 슬픔이었다. 나는 검은 동그라미에게 계속 미안했던 것이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할 때, 의도적으로 ‘임신중절’보다는 ‘낙태’라는 단어를 쓰곤 했다. ‘낙태’란 단어가 태아의 관점, 아니 그보다는 여성에게 죄책감을 심으려는 남성 권력의 관점에서 고안된 단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여성 인권이 향상될수록, 이 이슈는 태아의 생성보다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흘러왔으며, ‘임신중절’이라는 단어 역시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 단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임신중절을 죄악시해왔던 힘 뒤에는 여성의 출산을 통해 생산 인구를 유지하려는 권력의 욕망이나, 다른 수컷과 관계를 맺었던 여성과 섹스하기 두려워하는 남성의 거세 위협이 주된 동력으로 작용해왔다는 사실, ‘생명 존중’은 그 검은 속내를 감추기 위한 그렇듯한 명분으로 사용되어왔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전자에 대한 예시는, 인구가 과밀해졌을 때 중국 정부가 여성들에게 임신중절을 권유했던 것으로, 후자에 대한 예시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기혼 여성의 혼인 내 임신중절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 난 ‘낙태’라는 단어를 일부러라도 쓰고 싶었다. 검은 동그라미에 대한 미안함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력이 심어놓은 기묘한 죄책감과는 전혀 다른, 굉장히 개인적인 미안함이었다.
그것은, 비록 2주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존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나는 왜 검은 동그라미를 지키지 못했을까? ‘스물두 살, 미혼모, 대학 중퇴생’의 삶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물두 살의 나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착각해 내리는 선택보다는, 감당하지 못할 것은 포기하는 선택이 더 작은 불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만일 아이를 낳는 선택을 했다면 나는 그 삶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와 나, 그리고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에 몰아넣었을 것이다. “너 때문에 내 삶이 망가졌다”고 아이를 원망하는 최악의 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 억울함을 보상받으려고 아이를
나의 부모에게 방기하는 무책임한 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와 검은 동그라미, 주변 사람들 모두가 불행해지는 선택이었을 테다.
스물두 살의 나는 차악의 선택을 했다. 지키지 못할 따뜻함을 미리 비벼서 껐다. 그 따뜻함을 지키기 위해 ‘스물두 살, 미혼모, 대학 중퇴생’의 차가움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곧 마흔이 되어가는 나의 선택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나는 작은 따뜻함이 큰 차가움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삶이란 작은 따뜻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뜨거워져 세상의 차가움에 맞서는 여정이라는 걸 안다. 언젠가 검은 동그라미가 찾아온다면, 계란만큼 커져서 아니면 다른 모양의 따뜻함으로 찾아온다 해도,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땐 미안해. 다시 와줘서 고마워. 이젠 널 지킬께.” 나와 검은 동그라미,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질, 최선의 선택을 하는 최선의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