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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04. 2024

[첫 경험] 피 묻은 시트와 ‘빨래’

스무 살에 유학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의 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도 처음, 혼자 사는 것도 처음, 타지 생활도 처음, 외국 생활도 처음이었다. 1학년 오리엔테이션 때 한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마른 몸, 약간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아이였다. 그에게 끌렸다.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다. 키가 작고 통통한 나는 키 크고 마른 남자에게 잘 끌리곤 한다. 그는 중학교 때 이미 유학을 왔지만 한국에 살 때는 나와 길 건너 옆 동네에 살았었다고 했다. 그걸 계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얼마 뒤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나의 첫 남자친구였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기숙사방에서였다. 맥주 몇 캔을 마셨고 노트북으로 ‘무한도전’을 보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 앉아 있다가 점점 눕게 되었다. 그가 내 위에 올라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섹스’라는 것을 하게 될 거란 생각에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두근거림이 들었다. 하복부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몇 번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아랫배가 생리를 할 때처럼 아팠다. 엉덩이 아래 쪽이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연녹색 시트가 선홍빛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내 몸에 나온 피에 당황했다. ‘이게 처녀막이 찢어질 때 나온다는 그 피인가?’ 첫 경험을 하면 피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피가 나오는 것인지는 몰랐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때라 여자 친구들끼리 만나면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처녀막에 대한 이야기는 나왔다. 어떤 친구는 피가 났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처음인데 피가 나오지 않아 당황했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처음이 아니지만 남자친구가 싫어할까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 피가 섞여 나왔다 둘러댔다고 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는 어쨌든 피가 나왔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했다. 하지만 그 피가 그가 누워있는 자리에까지 번진 것을 보자 왠지 모르게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날 나는 그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으면 좋았을 법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약속이 있었는지 나를 내 방에 돌려 보냈다. 우산을 들고 혼자 방에 돌아가는 길, 살면서 처음 느끼는 기분에 휩싸였다.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게 엄마에게 미안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에게 미안했다. 새삼스레 나는 더 이상 ‘순결’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자각이 들었다. 한번도 가지지 못했던 것을 영원히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한 동안 그 피 묻은 시트를 빨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저거 안 빨 거야? 내가 빨까?”라고 물어봐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훗날 남자인 다른 친구에게 그의 심리를 물어본 적이 있다. “글세, 정복감의 과시 같은 건가?” 그가 정말로 정복(?)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빨래가 귀찮았던(꺼려졌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그 핏자국을 볼 때마다 우산 속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내가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내 몸에서 나온 피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고, 혹여나 그 방에 놀러온 다른 친구들이 그 핏자국을 보게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한 열흘이 지난 뒤 시트를 빨았다. 나의 첫 경험은 아랫배의 통증과 선홍색 피, 검붉은 핏자국으로 기억된다.




한국의 평균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집에서 자랐다. 엄마는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 세 살에, 첫 남자친구인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사춘기 무렵, 엄마가 성에 대해 보수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는 내가 ‘성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부정하고 싶어 했다. 나의 여름 교복 상의에는 언제나 여러 개의 똑닥이 단추들이 달려 있었다. 혹시라도 단추 사이로 메리야스가 보일까봐 엄마가 늘 신경썼기 때문이다. 어디에 앉을 때는 항상 다리를 오므리라는 말을 들었다. 속옷은 비칠 수 있으니 늘 무늬 없는 베이지색으로만 입으라고 했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나를 항상 타인의 시선, 특히 남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의에 똑닥이 단추를 달고 베이지색 속옷을 입고 늘 다리를 오므려야 하는 이유는 모두 ‘남자들이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엄마는 내가 남자들에게 ‘성적 존재’로 보여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리고 내가 ‘성적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사춘기가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성적 존재’가 되었다. 내가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에 성적 변화가 왔고 성적 호기심이 생겼으며 성적 쾌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성적 존재’가 무엇인가? 좁게 정의하면 ‘이성과 섹스하고 싶고 이성이 섹스하고 싶어 하는’ 존재, 넓게 정의하면 ‘이성을 만지고 싶고 이성에게 만져지고 싶은’ 존재다.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 때 또래 남자아이들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은 섹스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키스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고 그 상상에 좋아하는 남자애를 대입해보며 꺅꺅거리곤 했다. 나는 또래 여자아이들에 비해서는 조금 조숙한 편이었다. 부모님 몰래 인터넷에서 야한 이야기도 찾아 읽고 남자아이들이 올리는 야한 사진도 보았다. 이성교제도 했다. 엄마는 나의 이성교제를 막기 위해 매일 하교길에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달렸다. 무슨 일이 생길까봐 수학여행도 가지 못하게 했고 급기야 나를 그 아이와 떼어놓으려고 다른 학교에 전학까지 보내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정말 ‘성적 존재’가 되어버릴까봐 많이 불안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엄마가 그때 느꼈을 불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엄마는 그러한 억압이 훗날 나의 성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고 왜곡시키게 될 거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유학을 가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예쁜 속옷 가게에 가서 검정색 망사 속옷 세트를 산 일이었다. 그 속옷을 입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베이지색 속옷이 지긋지긋하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않았을, 금기를 깰 때의 쾌감이었다. 나의 이십대는 내가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마음과 (그에 대한 반발로) 마구 드러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늘 방황하던 시간이었다.



처음 미국에 유학을 가서도 가장 놀라웠던 점이 내 또래 아이들이 섹스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무도 자신이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성을 쉬쉬하고 금지하는 문화가 애초에 없기에 나처럼 그것에 반발심을 느끼는 아이들 역시 없었다. 미국에서는 보통 사춘기가 오고 몸에 성적인 변화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첫 경험을 시작한다고 했다. 평균적으로 중고등학생 때 대부분 첫 경험을 하며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섹스를 하는 아이들도 흔하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그들에겐 섹스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 기숙사에선 남녀가 같은 층에 살았고, 원한다면 같은 방에 사는 것도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샤워장도 공유해서 남자든 여자든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일도 많았다. 그 장면을 보고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건 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성’이 그가 살아왔던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온전히 긍정하지 못한 채 나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성적 존재’라는 사실 역시 온전히 긍정해주지 못했던 것일 테다. 그것은 엄마의 유별남만은 아니었을 테다. 한국이라는 환경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라면, 자신의 ‘성’을 온전히 긍정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나 역시 어른이 되고나서 알게 되었으니까. 내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남성들은 많은 경우 여성이 ‘성적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여성이 ‘섹스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섹스의 주체’라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려 했다. 달리 말해, 여성이 자신과 섹스하는 상대일 뿐만 아니라, 자신만큼이나 섹스를 욕망하고 섹스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며 더 큰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섹스를 추구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바뀐 걸로 알지만 내가 이십대 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꽤 보편적이었다. 그러니 엄마가 살던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여성이 ‘성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당연히 즐겁고 유쾌한 일보다는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에 가까웠을 테다. 자신이 ‘능동적 성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성적 대상’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섹스는 위험하거나 부담스러운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내가 ‘능동적 성적 주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첫 경험을 되돌아본다. 내가 우산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우선은 죄책감과 수치심이었다. 첫 경험은 자신이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순간 중 하나다.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섹스에 대한 욕망이 현실화되는 첫 번째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오랜 시간 부모와 사회에 의해서 ‘성’을 부정·금지당해왔다. 그래서 내가 ‘성적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고 내가 섹스를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러한 감정은 비단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테다. 여성이라도 성을 부정·금지당하지 않았다면 미국 아이들처럼 섹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남성이라도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성을 오래 부정·금지당했다면, 섹스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몸에 이차 성징이 오는 게 자연스럽다면, 정신이 섹스를 욕망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때는 그 자연스러운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내가 첫 경험에서 느낀 감정이 죄책감과 수치심뿐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죄책감과 수치심은 부수적인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첫 경험에서 느낀 가장 큰 감정은 ‘사랑받지 못했다’는 슬픔이었다. 그 슬픔을 ‘여자의 몸’으로서 처음 느껴보았기에 영문도 모른 채 우산 속에서 눈물만 흘렸던 것이다. 분명 엄마의 말처럼, 섹스는 ‘위험’을 품고 있었다. 나는 섹스에 폭력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섹스는 너무나 내밀한 행위이기에 남녀 모두에게 신체적, 정서적 상처를 입힐 가능성을 품고 있다. 특히 ‘여성의 몸’의 관점에서 볼 때, 섹스는 ‘나의 몸에 너의 몸이 침범하는’ 사건이다. 그러니 섹스에서 폭력의 가능성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여성 쪽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내 첫 경험이 아랫배의 통증과 시트의 핏자국으로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그때 처음 섹스에서 ‘상처’를 입어봤다. 적어도 몸의 관점에서만 보면 나는 ‘상처’를 입은 게 맞다. 통증을 느꼈고 피를 흘렸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상처’ 그 자체가 ‘슬픔’은 아니란 것을. 스무 해 전 나의 첫 경험이 어땠으면 좋았을까 고민해보았다. 아마도 핏자국의 기억에, 남자친구와 웃으며 함께 빨래하는 기억이 더해졌다면, 난 더 이상 ‘상처’를 ‘상처’로 기억하지 않았을 테다. 함께 어루만진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 ‘사랑’으로 기억되니까. 그날 내가 슬펐던 것은, 나의 핏자국을 보듬어준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이후 나의 핏자국을 어루만져준 사람들을 만났다. 첫 경험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그 사람들과는 함께 웃으며 몸과 마음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힘껏 빨았다. 그것이 첫 경험의 상처든 다른 상처든, 함께 핏자국을 빨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상처받은 몸은 결국 다른 몸을 통해 치유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스무 해 전 미처 빨지 못했던 그 첫 핏자국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산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눈물만 흘렸던 그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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