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 이야기를 왜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오랜 시간 여자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자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자의 몸으로 살아가기에 슬펐던 이야기와 여자의 몸으로 살아가기에 기뻤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할 수가 없었다. 계속 머뭇대는 나에게 어떤 친구가 물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너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기 때문이야?” 또 어떤 친구는 나를 응원해주었다. “네 이야기는 분명 어떤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거야.” 나 역시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는 '나만 이런 일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니까. 그때 어떤 사람이 ‘나 역시 그런 일을 겪었다’고 말해주면 분명 위로가 되니까. 하지만 그건 원인과 결과를 뒤짚어놓은 이야기 같았다. 정직하게 돌아보았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아니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순 있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나는 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소위 ‘관종’의 기질을 지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석연치 않았다. 내가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 인정, 존중을 받기보다는 비난, 오해, 경멸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계속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아름다운 이야기이길 바랬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에게 주어진 이야기이길 바랬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건 나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하고 유예하고 도망가려 해도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끈질기게 나를 되찾아왔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그래서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걸.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로서 살아갈 방법은 없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무색무취의 남자가 무색무취의 여자를 만드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에서는 무색무취의 남자가 무색무취의 여자를 만드는 폭력만을 다루지만, 그 무색무취의 남자 또한 언젠가 같은 남성 권력에 의해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 폭력의 피해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에 대항하는 길은 나의 색을 찾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사회가 나에게 덕지덕지 붙여놓은 그 회색의 막을 벗겨내고, 사실 나는 빨간색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나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곧 나로서 살아가는 첫 걸음이자, 동시에 나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모든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겠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의 투쟁의 시작이며, 나의 자유의 시작이다. 그것이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유였다.
이제부터 광장에서 외쳐보려고 한다. “나는 빨간색이다.” 나의 외침이 다른 빨간색의 너에게, 또 파란색의,
주황색의 너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가닿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 없다. 회색의 경찰 무리가 몰려와 “넌 빨간색이 아니다, 아니 이 세상에 빨간색은 없다”고 말해도 상관 없다. 나는 빨간색이니까. 언젠가 세상이 끼얹은 회색의 막을 잔뜩 뒤짚어 쓴 채 모든 빛을 잃고 표류하던 나에게 “너는 빨간색이야. 내 눈에는 보여.”라고 말해주었던 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 다시 빨간 빛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