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돌에 대한 한 페미니스트의 생각
일단 결론부터 말하겠다. 난 페미니스트고, 리얼돌 수입에 반대하지 않는다.
최근 리얼돌 수입을 둘러싸고 찬반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대법원이 이미 수입 허가 판결을 내린 상태라 잠시 화제가 되고 말 줄 알았는데, 몇주 동안 리얼돌 관련 기사가 포털과 SNS를 도배하는 것을 보고 새삼스레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나는 한 3~4년 전에 단순한 호기심 반, 페미니스트로서의 탐구심 반으로 남성들의 자위기구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처음으로 리얼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확실히 리얼돌은 다른 자위기구와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실제 섹스하는 느낌에 가깝도록 여성의 질 주름을 정교하게 묘사했다는 상품을 볼 때는 '그런가 보다' 하는 느낌이었다면, 여성 리얼돌들의 '전혀 리얼하지 않은' 신체를 볼 때는 무언가 슬픈 감정이 들었다. 심지어 그 당시 리얼돌들의 마케팅 메시지는 하나 같이 폭력적이었다. 당신만 바라보는 성노예를 들이라는 둥, 페니스가 삽입되어 리얼돌의 배가 불룩해지는 걸 보라는 둥, 심지어 리얼돌을 강간하고 임신시켜보라는 문구마저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리얼돌을 보면 왠지 모를 슬픈 기분이 든다.
여성들이 리얼돌 수입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저 슬픈 감정에 기인할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왜 '인형'인 리얼돌에 감정이입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리얼돌 관련 기사에도 이러한 여성들의 비이성적인 사고를 조롱하는 댓글이 많이 보인다. '성 도구화'를 따질 거면 오히려 남성기를 본떠 만든 딜도가 더 '도구'에 가깝지 않냐는 주장도 있다. 나는 이런 주장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국산 리얼돌의 판매가 이미 합법인 상황에서 해외 리얼돌의 수입만 금지할 법적 근거는 없다. 그러니까 리얼돌 수입을 금지하자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분명 논리적이지 않다. 남성들의 주장처럼 이러한 주장은 여성들의 피해의식에 기인한 것이 맞다.
나는 현재 여성들이 리얼돌 수입 허가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이 남성들이 유승준의 비자 발급 거부가 위법이라는 판결을 접했을 때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유승준의 입국을 금지할 법적 근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유승준이 한국땅을 밟는 게 거북하다. 왜? 한국 남성들은 대부분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리얼돌을 금지할 법적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리얼돌이 꼴보기 싫다. 왜? 리얼돌은 한국 여성들이 성(Sex)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많은 피해의식들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리얼돌 수입에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에 동의한 사람(대부분 여성들일 테다)이 거의 26만명에 육박하는 이유다. 유승준 입국에 거부감을 느끼는 남성들이 많은 것, 리얼돌 수입 허가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군대에 피해를 받은 남성, 성에 상처 받은 여성이 많다는 뜻이다. 이는 비이성적이라고 조롱할 일이 아니라, 슬퍼하고 가슴 아파할 일이다.
나는 철학 공동체에서 이런저런 여성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 여성 중 성에 관련한 상처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성이랑 섹스할 때 교감없이 '성기' 취급당한 경험('내가 대주는 사람이야?'라는 기분)부터 어린 시절 동네오빠나 친척오빠에게 무력하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에 대해 상처가 없는 여성은 없었다. 진짜 강간은 아니라도, 과거에 강간을 떠올리게 할만한 경험을 해본 한국 여성들은 당연히 이에 대한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피해의식은 강간과 비슷한 상황, 예를 들면 폭력적인 남성과 무력한 여성, 남성이 지배적인 방식으로 성욕을 표출하는 이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거부감과 공포심의 감정으로 발현된다. 여성들은 리얼돌에 감정이입하는 게 아니다. 여성들이 진짜 감정이입하는 대상은 리얼돌이라는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과거에 남성으로부터 상처 받았던 경험이다. 그래서 여성에 비해 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적은 남성들은(남성들도 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지만, 그건 여성보다는 다른 남성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경우가 더 많다) 딜도나 남성 리얼돌을 보고도 딱히 혐오감이나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남성들은 어떤 여성이 자기 얼굴을 본따 리얼돌을 만든다고 하면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극우 일본인이 한국군 인형을 자기 마음대로 왜곡해서 만든 뒤 그걸 때리거나 희롱하는 걸 본다면 분개하지 않을까.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것은 죄가 아니다. 피해를 받았으니까 피해의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일례로 리얼돌 반대 여론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남성들이 리얼돌을 사용하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엔 강간을 하게될 것'이라는 주장은 피해의식 때문에 생긴 혼란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게임에서 총싸움을 하다 보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현실에서도 살인을 할 것'이라는 케케묵은 주장과 비슷하다. 게임을 열심히 해 보거나 인간 심리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은 안다. 게임을 해서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꼭 물리적인 폭력이 아닐 수도 있다)에 상처받은 사람이 게임을 한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리얼돌을 사용해서 강간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남성성에 상처받은 남성일수록 리얼돌이나 폭력적인 성향의 야동을 볼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남자들은 성욕을 해소해야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라는 남성연대스러운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남성이 리얼돌을 사용하다가 강간을 하게 될 것이다'와 같은 주장이 남성을 지나치게 '공포스러운 존재'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우려된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남성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매도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긴 하지만, 그렇게 남성을 계속 공포와 연결시키면 영원히 남성은 무섭고 피해야될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피해의식은 남성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무조건 이해하자는 말이 아니라 애잔하고 측은한 감정 드는 것)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 때가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이 가능한 순간 아닐까.
피해의식을 한꺼풀 벗기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리얼돌을 사용하는 남성들이 정말 예비 강간범들일까?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현재 국산 리얼돌의 주 구매층은 50~70대 남성이다. 물론 50~70대 남성에 의한 성범죄도 적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예비 강간범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 묘사된 고객들은 폭력적인 범죄자보다는, 리얼돌의 손을 잡고 얼굴이 붉어지는, 한번도 여성과 관계를 맺어보지 못한 성 소외자의 모습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실시한 인터뷰나 통계자료를 봐도, 리얼돌의 주 구매 이유는 성적 착취를 통한 쾌락보다는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싶은 욕구나 외로움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인터뷰에서 한 미국 남성은 처음 몇달은 리얼돌을 섹스 용도 사용했지만 점점 말동무나 친구처럼 느껴져서 더 이상 자위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리얼돌 사용자가 우리가 티비에서 종종 보는, 피규어인형을 자기 애인처럼 생각해 말을 걸고 쓰다듬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피규어인형을 사랑(?)하는 남성들 중에 피규어인형 위에 사정을 하는 등 자신의 위축된 남성성을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남성이 예비 강간범일까? 아니, 설령 그 남성이 강간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피규어인형 때문일까? 그는 소심하고 자신이 없는 나머지 인간 여성이 무서워서 인형놀이로 도망친 사람이다. 리얼돌 구매자도 공포의 대상보다는 이러한 애잔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리얼돌 구매자를 무조건 공포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여론에 거부감을 느낀다. 첫째는 그런 주장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이런 여론이 장기적으로 페미니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을 공포의 대상으로 몰아가기보다는 여성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게 된 피해의식의 근원을 파헤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사도, 여론도 여성들의 눈치를 볼 뿐 그녀들이 이런 거부감을 갖게 된 근원적인 이유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남성들 또한 침묵하거나 여성들의 주장을 조롱할 뿐이다. 많은 여성들이 리얼돌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과거의 아픈 기억에 말미암은 피해의식 때문이다. 여성들이 감정적이라고 비웃기 전에 왜 이렇게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누군가는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 싶다. 왜 리얼돌 수입에 찬성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인가? 한국에 남성 리얼돌을 사용하는 여성은 없단 말인가? 나는 어찌보면 이 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리얼돌 구매를 권장한다는 말이 아니라, 리얼돌이 '성욕 해소'를 돕는다면 왜 남성만 그걸 원하고 여성은 원치 않느냐는 말이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여성들이 남성 리얼돌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리얼돌에 찬성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 리얼돌에 반대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 같다. 리얼돌에 찬성하는 소수의 여성들이 있긴 해도, 그 이유가 법적으로 금지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지 자신이 남성 리얼돌을 갖고 싶어서는 아니다. 어찌보면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나라에 지독하게 뿌리내린 성차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내 또래인 80년대 여성들만 해도 자위를 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요즘 20대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자위하는 여성들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절대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직도 딜도나 바이브레이터 등 여성 자위기구를 사용하는 여성은 극소수다.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야동에 대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했고,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걸레'라고 조리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한국 여성들이 리얼돌이나 야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사회적 억압 때문에 여성 본인들마저 성욕을 금기시하게 되어서 아닐까? 실제로 한국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는 남성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질 못하는 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여성들도 종종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섹스를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여성들이 "오늘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섹스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진짜 슬픈 것은 한국 여성들이 '성욕의 해소'라는 개념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짜 혼구녕이 나야될 사람은 리얼돌을 구매하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리얼돌을 사는 걸 욕하는 남성이 아닐까?
앞으로도 리얼돌은 계속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말하는 리얼돌, 움직이는 리얼돌이 나올 테고, 언젠가는 공상 영화에서나 보던 인공지능 섹스로봇이 개발될 테니 말이다. 리얼돌이든, 섹스로봇이든,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대부분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이 두려워서 안전한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 때문일 테다. 마치 자기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게임으로 도망치고 싶듯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속에서 신이 된다고 한들 그건 현실이 아니기에 공허함은 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나만 바라보는 리얼돌이 있다고 한들 내가 원하는 반응만 하는 대상에게서 절대 인간은 외로움을 해소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이 너무 두렵거나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일 때, 가상 세계는 회피일지언정 좋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해외 인터뷰에서 리얼돌이 장애인이나 노인들, 혹은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읽고 리얼돌이 그런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얼돌이나 섹스로봇이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여전히 생각해볼만한 문제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무조건 막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한번 생긴 인간의 욕망은 막을 수도 없고 막으면 더 커지기만 한다. 다 필요 없고, 나도 일단 말 잘 들어주고 다정하고 잘생긴 섹스로봇이 나오면 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부디 섹스 로봇 회사에서 여성의 욕망도 잘 반영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