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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29. 2019

'예쁘지 않은 여자의 삶'을 떠나 보내며.

나의 외모 투쟁의 역사

 며칠 전에 리얼돌에 대한 글을 한편 올렸다. 현재 여론과는 다른 결의 이야기인지라 혹시라도 욕을 먹진 않을까 걱정하며 글을 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를 가르친 스승이랑 그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논쟁이 붙었다. 그는 내가 리얼돌에 대한 여성들의 피해의식 중 가장 큰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글에서 나는 여성들이 리얼돌을 꼴보기 싫어하는 이유를 1) 리얼돌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2) 여성들은 자위기구를 사용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런데 스승이 그 두 가지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사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여성들이 리얼돌의 신체를 보고 성적인 위협을 느껴서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그러한 측면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리얼돌 이슈가 막 불거졌을 때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리얼돌 사진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한 남성이 어떤 리얼돌 사진을 보며 "와~ 얘는 진짜 이쁘다!"라고 감탄하자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속으로 '이 밀가루 같이 허여멀건한 게 뭐가 이쁘다는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이는 아마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성들 사이에서 백인이나 흑인 남성 모양의 섹스로봇이 인기를 끌면 그에 대한 남성들의 박탈감도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지금의 리얼돌 논란은 여성들이 느끼는 성적 위협감보다는 성적 수치심이 더 큰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여성의 하반신만 본떠 만든 자위기구나 '예쁘다, 못생겼다'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조악한 퀄리티의 리얼돌을 볼 때도 슬픈 감정이 느껴지니까.

  

여성 리얼돌

 

아무튼 이러한 주제로 몇 시간 동안 논쟁을 이어가는데, 뜬금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단순히 스승이 내 글을 비판해서 짜증난 건 아니었다. 그 정도의 비판은 매일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무언가 그의 말이 나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한 20분을 내리 울다가 그를 쳐다 봤는데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 눈물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내 아픔이 진심으로 아프구나. 이 사람은 내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구나.' 그렇게 다 큰 어른 둘이 맥주집에서 티슈 수십장을 써가며 울었다.


 다음 날 일어나 샤워를 하는데 어제 오열한 것이 부끄러워서 웃음이 났다. 묘하게 상쾌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 날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혼자 울며 스스로에게 뭐가 그렇게 서럽냐고 묻고 또 물었다.




 나의 삶은 외모에 대한 투쟁의 역사다. 나는 예쁘지 않은 여자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날, 우리 고모 할머니가 내 얼굴을 보고 '얘는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덕담(?)을 하셨다고 한다. 그 덕담의 저주인지 나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고, 성격도 털털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그때까진 난 내가 예쁘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내가 외모 컴플렉스를 갖게 된 건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다.


'이때만 해도 내가 예쁜 줄 알았지.'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갑자기 남자 아이들이 여자의 외모를 굉장히 중시하기 시작했다. 나랑 친했던 남자 사람 친구들은 놀땐 나랑 놀고 고백은 엉뚱한 여자애에게 하곤 했다. 남자 애들끼리 반 여자애들의 외모 순위를 매겨놓은 쪽지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난 후보군에도 없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정말 억울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며 늘 노력해왔건만, 예쁜 애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가만히 있는데도 사랑을 독차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록 나는 공부에 더 집착했다. '그래, 예뻐서 뭐해. 결국에는 공부가 최고지.'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렇게 공부한 덕에 명문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게 웬걸. 세상에는 나보다 공부도 잘하는데 예쁘기까지 한 여자애들도 많은 게 아닌가. 그때부터 외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매일 쇼핑을 다녔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모 컴플렉스가 사라지진 않았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그 예쁜 여자애들은 화장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내추럴 뷰티'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화장을 짙게 하면 할수록 그녀들의 꾸미지 않아도 예쁜 얼굴과 비교가 되어 더 자괴감만 심해졌다. 그렇게 성형, 화장, 시술, 다이어트로 점철된 몇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다 관뒀다. 첫번째 이유는 나의 어떤 모습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주는 남자친구가 생겨서, 두번째 이유는 남자들에게 사랑받으려고 외모에 집착하는 내 모습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회의 최정점에 올라가면 모두들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너네들 위에 올라가주마!' 나는 컴플렉스와 분노를 안고 사회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나의 삶은 오로지 성공을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외모 관리 따위 할 시간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때 자주 하던 망상 중에 하나가 나중에 크게 성공하면 남자 연예인들 불러놓고 파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아찔한 생각이다. 그대로 성공이라도 했으면 정말 꼴불견 인간이 되었을 것 같다.


매달 미용실 가던 나의 20대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공을 향한 나의 여정은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삶의 모든 일들은 '사랑받고 싶다' 마음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 받았으면 피해의식도 없었을텐데, 그렇지 못한 조건을 타고난 탓에 늘 노력해야만 하는 삶. 그 노력이 짜증나고 억울해서 상처가 가득한 삶. 난 여전히 리얼돌이 꼴보기 싫은 주된 이유는 성적 수치심 때문이라 생각한다(스승도 성적 위협감와 수치심 중 무엇이 주된 이유인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덧붙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분명 나의 외모 컴플렉스와 관련이 있을 테다. 난 스스로 리얼돌에게 위축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설령 그게 핵심 이유가 아니라도) 그 이야기를 글에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거야말로 내가 아직 외모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증거 아닌가. 맥주집에서 내리 20분을 목놓아 우는데 지난 날 내가 외모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외모가 안 되니 공부를 열심히 했던 나, 돈을 많이 벌려고 피똥싸며 노력했던 나. 한때는 삼각김밥 하루에 한개씩 먹으면서 다이어트했던 나, 쌍커풀 수술을 한 뒤 피멍이 든 두 눈을 거울에 비춰보고 눈물이 났던 나. 또, 얼굴 예쁜 친언니는 대학 가서 맨날 고백받는데 나는 나 좋아하는 남자 한 명 찾기가 힘들다고 이불 싸매고 울었던 나, 과거 남자친구가 나보다 예쁜 여자와 바람이 나서 상처 받았던 나. 사랑받으려고 애썼던 수많은 내 모습들이 떠올라서,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아직도 컴플렉스가 남아있는 게 억울하고 분해서 그토록 눈물이 났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남아 있는 외모 컴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다시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는다고 해결될 것 같진 않았다. 일단 그러고 싶은 욕망이 없고, 그런 꾸며진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이 글을 쓰다보니 이제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난 그날 목놓아 울면서 외모에 상처받았던 '과거의 나'를 이미 떠나 보내준 것 같다. 주마등처럼 떠올랐던 상처들을 마주하고 애도하며, '과거의 나'에 대한 작은 장례를 치뤄준 것이다. 나는 외모에 대해 투쟁했던 과거의 내가 안쓰럽고 사랑스럽다. 그 과거의 나들을 꼭 안아주고 싶다. 그동안 참 애썼다고,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넌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울고 불고한 다음 날, 집필실에서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나를 봤는데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전날 하도 울어서 살이 빠졌나?'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아팠던 과거를 떠나보내준 만큼 지금의 나를 더 긍정하게 되었고, 그 마음이 얼굴에도 투사되어 스스로가 예뻐 보였던 게다. 사실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3개월 간의 빡센 글쓰기를 통해 깊고 깊었던 우울증에서 벗어났던 날, 지하철에 비친 내 얼굴이 몇년만에 예뻐 보였다. 그날 난 카톡 프로필을 화장 안한 맨얼굴 사진으로 바꿨다.


내가 좋아하는 내 얼굴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나는 아직 여성으로서의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직 상처가 남아있기에 균형잡힌 글을 못 쓸때도 많다. 마치 가난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 돈에 대한 글을 쓰면 감정이 과잉되거나 논리에 구멍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나도 내 상처가 아직 쓰라리기에 그 상처를 감추고 싶고, 내 상처가 아직 욱신거리기에 나에게 상처주었던 이들을 과도하게 매도하고 싶다. 그래서 한동안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난 균형잡히지 못한 글을 쓰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우니까. 하지만 과잉되면 과잉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그냥 써야겠다. 내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계속 모자란 나를 끄집어내어 세상에 내던져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때로는 엉엉 우는 날이 있더라도 그 다음날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더 예뻐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점점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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