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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l 28. 2019

이제 아빠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만에 온 아빠의 대답. 

 점심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외갓집 내려갔으니 오늘 남편이랑 셋이서 저녁을 먹자는 용건이었다. 솔직히 귀찮았다. 어차피 만나봤자 몇 시간 동안 아빠 자기 자랑만 실컷 들어야 할 텐데. 저녁에 시간 되는 거 봐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얼버무리며 끊었다. 영등포에 있는 작업실에 와서 글 두 편을 미친 듯이 썼다. 시간을 보니 6시. 글을 더 쓰는 건 무리고, 괜스레 눈치도 보여서 아빠에게 전화해 저녁을 먹겠다고 했다. 남편을 교대역에서 만나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까지 갔다. 사람도 많고 후덥지근해서 짜증이 났다. 

 

 약속된 고깃집에 도착하니 아빠는 미리 와 있었다. 주문을 시키고 잠시의 정적의 흘렀다. 아빠가 평소와 달리 약간 머뭇거리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영등포에서 오는 거니?"

 "응"

 "영등포에선 대체 뭘 하는 거니?"


 나는 작년에 5년 간 운영해오던 스타트업을 접고 큰 우울증에 빠졌었다. 더 이상 사업은 하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암흑 같은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준 것은 철학과 글쓰기였다. 난 지난 1년 간 철학을 공부하고 삶을 돌아보는 글을 쓰면서, 앞으로 '나를 표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꿈을 키웠다. 그러다 올해 초 나를 가르친 선생님과 몇몇 친구들과 함께 영등포에 작은 공간, 철학흥신소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난 글을 쓰고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철학을 공부하며, 공간을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가고 있다. 


 "영등포에서? 글 쓰고, 수업 듣고, 팟캐스트 해." 


 나는 평소에 대답하던 것처럼 대답했다. 사실 아빠가 영등포에서 뭘 하냐고 물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빠는 내가 스타트업을 접고 난 뒤 다른 사업을 시작하거나 취직을 하지 않으니 일 년이 넘도록 뭘 하는지 참 답답했던 것 같다. 올해 초에 내가 사람들과 작업실을 냈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매번 작업실에선 무얼 하냐고 물어보신다.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팟캐스트를 한다고 해도, 그 대답이 잘 와 닿지 않나 보다. 


 "그래, 공부하는 건 좋은 거지."


 아빠가 대답했다. 역시 아빠는 내가 뭘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아빠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나 지금 교양으로 공부하는 거 아니야. 난 이걸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어."


 아빠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마도 아빠는 내가 영등포에서 문화센터 같은 곳을 다니는 줄 알았나 보다. 그래서 내가 왜 문화센터를 출근하듯 매일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게다. 


 "직업?"

 "응, 나는 철학과 페미니즘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야."


 아빠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사업가인 아빠는 어려서부터 내가 아빠의 대를 잇길 바랬다. 나 또한 사업가만큼 세상에 좋은 직업이 없다는 아빠의 말에 동의했기에 학창시절부터 성공한 사업가를 꿈꾸며 달려왔다. 대학도 경영대를 갔고, 졸업하자마자 몇 년 간 아빠 밑에서 사업을 배우고, 몇 년 뒤엔 아빠로부터 독립해 나만의 사업을 시작했다. 5년 동안 스타트업을 하며 개고생 했지만 묵묵히 견뎌왔다. 사업가는 내 인생의 유일한 꿈이었으니까. 


 유일한 꿈이었기에 미친 듯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사업이란 건 노력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였을까? 더 이상 이 사업에서 답이 안 나오겠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인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도 억울했지만, 무엇보다 절망적이었던 건 이제 나에겐 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업을 해볼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사업 생각만 해도 구토감이 느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꿈을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나는 우연히 알게 된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으로 '사업가'라는 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꿈이 사업가여서, 한 번도 그게 내 꿈이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사업을 할 때 행복했던 순간은 많지 않았다. 끊임없이 매출을 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숨이 막혔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왜 계속 성취해야 하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혼란스러웠지만, 내 꿈은 '성공한 사업가'이니까 진짜 성공을 이룰 때까지는 닥치고 노력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는 사업을 하며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계속 감정을 파고 들어가자, '사업가'는 애초에 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맞닥뜨렸다. 그렇다. 나는 진심으로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단지 사업가가 되면 아빠에게 가장 칭찬받고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즉, 내가 욕망했던 것은 '사업가'가 아니라 '아빠의 칭찬과 인정'이었던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아빠에게

(중략..) 글쓰기를 하면서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성공한 사업가'가 내 욕망이 아니었다는 거야. 근데 내 내면을 계속 파고 들어가니, 나는 그냥 엄마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더라. 나는 그게 내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 아빠한테 인정받기 위해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아빠, 나는 더 이상 돈을 벌고 성취를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결과 말고 과정에서 행복하고 싶어. "편안하고 불행한 삶"보다는 "불편하고 행복한 삶"을 택하고 싶어. 나는 "아빠 딸 김혜원"이 아니라 "그냥 김혜원"으로 살고 싶어. (.. 후략)


 꼬박 반나절을 울면서 편지를 썼다. 덜덜 떨면서 아빠에게 편지를 전했는데, 아빠는 편지를 받고 1년째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말 용기 내서 쓴 편지라, 아빠의 무반응을 보고 한 동안 속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이미 아빠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내 길을 가겠노라 결심한 터였다. 그래서 아빠도 침묵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냥 편지의 내용처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1년을 살았다. 어쩌면 아빠는 지금까지 내 편지를 못 본 체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철학은 좋은 학문이지. 그런데 그런 건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니? 직업으로 하려면 남들에게 보여줄 뭐가 있어야 하는 거야. 박사는 몰라도 석사 정도는 밟는 게 좋겠다. 대학원은 좀 알아보고 있니?"


 대학원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나올 줄 알았는데 왠지 서운했다. 나는 철학과 페미니즘을 대학에서 '학문'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에게 철학과 페미니즘은 학문이 아니라 '삶'이니까. 물론 앎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대학원에서 보충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학위나 '남들에게 보여줄 무언가'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다시 성취하는 삶, '아빠 딸'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일 테니. 


 "아빠, 난 지금 내가 하는 공부가 좋아.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는 공부를 찾은 거야."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는 또 침묵했다. 그러다가 다시 물었다. 


 "진짜 지금 하는 공부가 좋아?"

 "응."

 "그럼 됐다. 혜원이는 좋아하는 걸 찾았구나."


 아빠의 반응에 조금은 놀랐다. 아빠는 내가 어떤 걸 해야 행복할지 늘 고민했는데 찾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근데 그걸 스스로 찾았으면 된 거라고 말했다. 물론 대학원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한번 더 덧붙였지만 ㅋㅋㅋ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내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장인어른, 혜원이가 철학하고 나서 그냥 지식만 생긴 게 아니라 삶이 바뀌었어요."

 "그래? 허어.. 정말 고무적이구나."

 "그리고 혜원이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그게 다음 메인에 뜬 적도 있어요."

 "혜원이는 왜 지금까지 그 얘기를 아빠한테 안 한 거니? 그런 건 자랑을 해야지."


 난 아빠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주기가 싫었는데, 자꾸 남편이 내가 요즘 뭘 하고 사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솔직히 아빠가 페미니즘도 싫어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폄하할 줄 알았다. 나는 아빠가 혹시라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까 봐 최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다른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아빠가 뜬금없이 말을 뱉었다. 


 "혜원아,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고기를 다 먹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아빠가 블로그로 글을 보는 건 어려우니까 내 글을 프린트해서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워서 싫다고 했다. 내 글에는 내 감정과 삶, 심지어 부모님에 대한 원망까지 너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또 철학과 페미니즘 글은 보수적인 아빠가 보기엔 너무 급진적인 이야기일 것 같았다. 아빠 성격에 내 주장이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를 앉혀놓고 '염려스럽다'며 설교를 늘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빠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누웠는데 계속 아빠의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혜원이는 좋아하는 일을 찾았구나."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아빠한테 글 인쇄해서 보여줘."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깨달음이 왔다. 


 '아빠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길 바랬구나. 아빠는 여전히 내가 궁금하구나!'


 어쩌면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아빠를 오해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의 이미지는 아빠의 삶의 결이 만들어낸 것이니, 당연히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이미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아빠는 진심으로 '사업가'가 행복한 직업이라고 생각해 내게 권한 것일 게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아빠는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 외에 다른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마 아빠는 영원히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공부를 좋아한다면서 대학원에 왜 안 가냐는 잔소리도 앞으로 몇 번 더 들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아빠는 늘 나의 행복을 바랬다는 것, 아빠는 여전히 내가 궁금하다는 것, 아빠는 자신의 방식일지언정 나를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아빠에게 내 글들을 프린트해서 보여 드려야겠다. 아빠가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겐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예의니까. 


 작년에 아빠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오늘 드디어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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