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Oct 14. 2019

'조국 사퇴'에 부쳐

강남 좌파는 모순인가?

 조국 법무부장관이 사퇴했다. 자연인으로서 아내와 딸이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꼴을 지켜보긴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 폐를 끼칠까봐 우려도 되었을 테고, 나라가 자신을 지키려는 쪽과 치려는 쪽으로 나뉘어 떠들썩한 것도 부담스러웠을 게다. 지금 사퇴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안에 쌓인 이 부채감이 훗날 더 큰 동력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노무현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국 장관의 선택에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 화가 난다. 사실 나는 조국이란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당연하다. 어떤 사람(특히 정치인)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사건과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조국은 그간 정치인이 아니었기에 일반 국민들이 알만한 사건에서 뚜렷하게 입장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조국을 모른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만 봤을 때는 조국이 차기 대선후보에 걸맞는 인물인지는 모르겠다(물론 그도 지금까지는 대권에 별로 욕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는 안다. 조국은 검찰개혁의 적임자였다. 검찰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비법조계 인사가 필요하다. 검사 출신이 어떻게 자신의 모든 인간관계가 얽혀있는 검찰 조직에 메스를 들이밀 수 있겠는가? 변호사나 판사 출신은 조금 나을지 몰라도 한 다리 건너면 다 선후배로 얽혀있는 좁디 좁은 바닥이 대한민국 법조계다. 그런 상황에서 학자 출신, 그것도 평생을 사법개혁을 연구해왔고 민정수석으로 일하며 정부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조국만큼 사법개혁을 이끌 적임자는 없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조국이 사법 개혁의 적임자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가 이 지경까지 몰린 것은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적임자가 아니었다면 검찰이 이 난리를 칠 이유도 없다. 검찰이 조국을 막고 싶은 이유는 명백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살았는데, 사법고시도 안 본 놈이 나타나 자신들의 권력을 견제할 기관을 만들겠다고 하니 얼마나 눈엣가시 같겠는가. 하지만 일부 국민들이 조국이 싫은 이유는 그가 검찰을 개혁하자고 주장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조국이 사법개혁을 하는지 마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조국이란 인간이 꼴보기 싫은 것이니까.


 왜 꼴보기 싫을까? 그가 강남 좌파여서다. 강남에서 곱게 자라 고생도 안 해본 주제에 감히 '개혁' 같은 걸 주장해서다. 한마디로 부자인데 착한 척까지 해서 짜증나는 거다. 난 예전부터 왜 사람들이 이명박의 화려한 전과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서, 문재인이나 박원순이 뭐 하나라도 의혹에 휩싸이면 '옳다구나'하고 그토록 물고 늘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마치 학교에서 일진들이 사고치면 대충 넘어가지만, 모범생이 하나라도 잘못하면 크게 혼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착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게 왜 훨씬 큰 잘못처럼 여겨지는 건가? 심지어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질나쁜 짓을 저질렀다 해도?


 그건 사람들이 '선악'보다 '불일치'를 더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건 자신의 예상에 '일치'하는 결과니까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데, 착한 놈이 작은 나쁜 짓이라도 하면 자신의 예상에 '불일치'하니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아니, 그 착한 놈을 좋아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그 착한 놈이 꼴보기 싫었을 때는 통쾌할 것이다. '역시 너도 착한 놈이 아니었어'라는 통쾌함. 그가 저지른 작은 나쁜 짓 하나로 그간 쌓아온 모든 착한 짓을 다 무마시키고 싶은 마음. 그래서 '너도 착한 척했지만 결국 나처럼 나쁜 사람이야'라고 단정하고 싶은 마음. 상대의 작은 흠을 붙잡고 끌어내려 자신과 동급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나보다 착하게 산 사람은 존재하면 안된다는 마음. 그런 비겁한 마음 말이다.


 왜 0 아니면 1로 귀결지으려고 하는가? 나쁜 놈은 맨날 나쁜 짓만 해야 하고 착한 놈은 맨날 착한 짓만 해야 하나? 나쁜 놈이 자기 삶을 뉘우치고 착한 짓을 하면 안되는 건가? 착한 놈이 조금의 비겁함과 부주의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면 그는 한 순간에 나쁜 놈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세상에 예수, 부처말고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조국의 청문회를 보고 "예수 청문회냐?"고 비꼬았던 댓글에 괜히 사람들이 끄덕인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조국이 100프로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딸의 봉사활동 증명서가 위조되었을 확률은 극히 낮다고 생각하지만, 논문 1저자 등재 건은 분명 특혜라면 특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특혜를 받는 것은 그 크기를 막론하고 불공평한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강남 8학군에서 나고 자란 내가 보기에 조국 딸이 받은 특혜는 강남의 평균적인 기준에서 볼때 굉장히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조국 정도의 위치에서 딸에게 특혜를 주려고 마음 먹었으면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특혜를 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뭐하러 딸의 봉사활동 증명서를 위조하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봉사활동 증명서 그냥 한장 떼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1의 특혜를 받아도 '받은 것은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0의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1의 특혜만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같은 입장에서 10의 특혜를 온전히 누린 김성태 딸(KT 특혜채용)이나 황교안 아들딸(중고등학교때 무려 '장관상'을 수상)도 있는데?


 물론 부모의 위치로 자식이 특혜를 받을 수 있는 구조는 잘못되었다. 그렇기에 1의 특혜건, 10의 특혜건, 아예 아무런 특혜를 못 받는 사람에게는 50보, 100보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번만 묻고 싶다. 당신이 만약 조국의 입장이거나 조국 같은 부모를 두었다면, 1의 특혜마저 거부하고 살 수 있을지. 아니, 당신은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가능한, 조국의 경우보다는 작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보기엔 클 수도 있는 특혜들 앞에서 정말 '금보기를 돌 같이' 하며 살고 있는지. 당신은 정말 그렇게 완벽하게 깨끗한지. 아니면 그냥 조국처럼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흠이 있다는 걸 보니 고소하고 통쾌한 것은 아닌지.


 누군가는 특혜를 받고, 누군가는 특혜를 받지 못하는 세상은 분명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것이 조국의 잘못은 아니다. 조국은 그냥 그 불공평한 구조 안에서 운좋게 기득권으로 태어났지만, 최대한 그 안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오려고 노력한 인물로 보인다. 물론 그 노력이 부족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득권으로 태어나 아무런 부끄럼 없이 사는 사람보다는 염치 있는 것 아닌가? 적어도 10의 특혜를 마음껏 누린 사람들보다는 깨끗한 것 아닌가? 부자로 태어나면 모두다 이건희처럼 돈만을 쫒으며 야수처럼 살아야 하는 건가? '부자는 나쁘다'의 도식은 되고, '부자가 착하다'는 도식은 안되는 건가? 그렇다면 부자는 계속 나쁘기만 해야하나? 착한 부자는 존재할 수 없나? 강남에서 좌파적 가치를 믿는 사람은 다 기만인가? 부자로 태어났으면 오직 싯타르타처럼 자신의 모든 부를 내려놓고 고행을 해야만 착해질 자격을 얻을 수 있나?




 강남 좌파는 기만일 수 있다. 정말로 좌파적 가치를 믿는 사람은 진심으로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좌파적 가치를 믿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고생길은 무서운 탓에 앎을 삶으로 밀어부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바로 '강남 좌파'다. '강남'이라는 단어와 '좌파'라는 단어만큼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가치도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강남 좌파'를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누릴 것은 다 누린 주제에 착한 척까지 하는, 기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강남 좌파들이 정말 모순일까? 강남에서 태어났지만 삶의 과정중에 강남적인 가치들에 의문을 품게 된, 아직은 좌파는 아니지만 좌파가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건가? 아니, 세상에는 강남 좌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좌파는 더 많은 '강남 좌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강남 좌파는 모순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이다.


 최근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남자들을 꼴보기 싫어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종종 본다. 기득권인 남자로 살아온 주제에 어디 감히 여자의 삶을 이해하는 척하냐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남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려면 성전환 수술이라도 하고 와야 하는 건가? 정말 여자가 되어 여자의 삶을 겪어야만 여자를 이해할 수 있는 건가? 아니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자들을 꼴보기 싫어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욕망은 순혈주의와 자기연민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네가 감히 나의 고통을 어떻게 아냐?'는 자기연민과 '나와 똑같은 사람만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순혈주의. 나는 오히려 세상을 진짜로 바꾸고 싶다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남성들을 쌍수를 들고 환영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성 평등의 세상을 대체 여자들끼리 어떻게 만든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조금 철없어 보이고, 조금 기만적으로 보일지라도, 남성이라는 기득권에서 '여성'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그 모순적인 0.3, 0.5의 페미니스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그들이야 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여자와 남자로 나뉜 세상에서 변화를 일으킬 사람은 남자에서 여자-되기를 하는 사람들뿐이니까.


 강남 좌파도 마찬가지다. 안다. 그들이 재수없다는 거. 고생도 모르고 자란 주제에 감히 평등에 대해 외친다는 거. 그 모순이 꼴보기 싫다는 거.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이 불공평한 자본주의적 세상을 뒤집을 변수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벗어나 무언가가 -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조국은 깨끗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운좋게 기득권으로 태어나 고생 모르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10의 특혜는 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영토에 있던 기득권층에게 감히 내부총질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끄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버리진 못해도, 특권층으로 살아왔다는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그런 그에게 '왜 너는 더 깨끗하지 못했냐'고 묻는 것이 정말 세상을 위하는 길일까. '강남 좌파'는 완벽하게 '좌파'가 되었을 때만 무엇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착한 부자'는 없지만, '착해지는 과정에 있는 부자'는 있을 수 있다. '강남 좌파'는 모순이지만, '좌파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기득권층'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다 과정 중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비겁한 우리들이 과정 중에 있는 것들을 견디지 못할 뿐.

작가의 이전글 올인의 미학 I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