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Oct 07. 2019

올인의 미학 II

진정한 올인은 '너'를 향한 올인이다.

 왠지 끌리는 곳이 있어서 가봤다. 아프리카의 전통 춤을 추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여자분을 만났다. 그녀는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불안이나 우울, 찌듦 같은 것들이 묻어 있질 않았다. 그렇다고 과잉되게 밝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연스러웠다. 행동도, 표정도. 나와 비슷한 또래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는 게 신기해서였을까?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이 매력적인 공간을 운영해온 운영자였다.


 집에 와서 그 공간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우연찮게 그녀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소영'이었다. 소영은 한국에서 평범한 모범생의 삶을 살다가, 우연히 떠난 멕시코 여행에서 처음 살사를 접하고 춤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그 뒤 한국에 와서 춤을 취미로 즐기다가 역시 우연한 계기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프리카 출신 무용수 마리아와 엠마누엘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와 엠마누엘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온 몇몇 무용수들과 함께 '포천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말도 안되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들과 친구가 된 소영은 그들이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헐값에 매일 기계처럼 공연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박물관 측에서 식비도 제대로 주지 않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여권마저 압수해간 상태라고 했다. 얌전했던 소영은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2014년, 그녀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에 대응하고 통역을 맡고 홍보물을 만들며 종횡무진 뛴다. 그녀의 아름다운 투쟁의 흔적은 이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이후 소영은 연인이 된 엠마누엘과 함께 아프리카 만딩고 댄스를 기반으로 한 무용단 '쿨레 칸'을 꾸리고 사람들에게 춤과 몸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을 시작한다. 소영 또한 몸을 경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오래 살았기에 '삶 안에 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춤 안에 삶이 있는 것'이라는 연인 엠마누엘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했던가. 소영의 삶에도 곧 자연스럽게 춤이 스며든다.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하는 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그녀는, 춤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며 산다. 또 엠마누엘과 결혼을 앞둔 그녀는 다문화 가족이 많은 지역의 초등학교 학생들과 '컬러 프라이드(Color Pride)'라는 춤 퍼레이드를 진행하며 계속 크고 작은 투쟁들을 이어가고 있다.


'소영'의 인터뷰 전문은 여기서:

http://mottzine.com/wordpress/?p=728

 

 이 인터뷰를 읽고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소영의 얼굴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에서 온 무용수들과 친구가 되었고, 친구들이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한 무용수와 연인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가 사랑하는 춤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춤을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춤의 매력을 알리는 일을 시작했으며, 연인이 겪었던 아픔이 진심으로 가슴 아팠기에 '자연스럽게'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도우며 산다. 나는 그녀가 내린 '자연스러운' 선택들을 보며 내 지난 삶이 부끄러워졌다. 나라면 아프리카에서 온 무용수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나라면 부당한 일을 겪는 친구를 위해 그녀처럼 발벗고 나설 수 있었을까? 나라면 어떤 일을 할 때, 좋아하는 일에 대한 순수한 마음보다는 돈 벌고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서지 않았을까?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사랑보다는 늘 내 안위를 우선시하지 않았나? 그런 탓에 나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된 것 아닌가?




 지난 주에 올인의 미학이라는 글을 썼다. 어떤 일이든 끌린다면 무조건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글에서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올인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나'를 향한 올인과 '너'를 향한 올인. 대상이 '나'이든 '너'이든 올인을 해야 미련이 남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이 두 올인이 삶에 일으키는 파장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잊은 게 아니라 쓸 수가 없었다. 나는 '너'를 향한 올인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올인했고, 사회에 나가서는 오랜 꿈이었던 사업에 올인했다. 둘다 '나'를 향한 올인이었다. 다행히 도중에 발 빼지 않고 끝까지 가본 탓에, 나는 공부와 '사업가'라는 꿈에 전혀 미련이 없다. 그 덕에 나는 과거의 욕망 주변을 맴도는 삶을 살지는 않게 되었지만, '나'에게 올인하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힘들고 괴롭게 살아야 했다. '공부'라는 올인을 다음에는 '성취'라는 올인이 기다리고 있었고, '성취'라는 올인 다음에는 '성공'이라는 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나'에게 올인하며 더 이상 올인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달려 갔지만, 그 올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결국 거대한 공허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를 향한 올인은 결국 '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내'가 주고 '내'가 받는 자폐적인 순환 구조, 그 '나' 밖에 없는 세상은 당연히 외롭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반면 소영은 '너'를 향한 올인을 반복해 왔다. 처음에는 친구였던 마리아가 그 대상이었다. 소영은 자기가 하던 일을 제쳐두고 마리아의 일을 마치 자기 일인냥 도왔다. 그 다음에는 연인이었던 엠마누엘에게 올인했다. 그 올인 덕에 소영은 춤을 사랑하게 되었고, 부르키나파소라는 먼 나라의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 자유롭고 인간적인 정신을 한국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소영의 '너'는 계속해서 확장된다. 그녀는 이제 연인 엠마누엘 뿐만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엠마누엘'들에게 올인하며 산다. 그녀는 '내'가 아닌, '너'에게 올인했기에 삶이 공허하지 않다. '나'를 향한 올인은 결국 '나'로 귀결되지만, '너'를 위한 올인의 끝에는 언제나 '또다른 너'가 있기 때문이다.


소영과 엠마누엘의 공간에 있던 글.


 소영은 엠마누엘에 올인한 끝에 수많은 엠마누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삶은 마리아와 엠마누엘, 아프리카 무용수들, 춤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들 등 수많은 '너'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덕에 공허할 틈이 없다. 만일 그녀가 마리아나 엠마누엘을 만났을 때, 올인하지 않고 미지근한 거리를 유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도 나처럼 자신의 야망에만 올인해왔다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제 막 '나'를 향한 올인의 덧없음을 깨우친 나에게 동갑내기 소영의 삶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올인을 해야한다. 계산하고 눈치보는 미지근한 마음은 삶을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는다. 올인을 해야한다. '나'를 향한 올인을 넘어 '너'를 향한 올인을, '너'를 향한 올인을 넘어 '또 다른 너'를 향한 올인을.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인가 보다.


내 사랑이 날 모든 곳으로 데려가네.
작가의 이전글 올인의 미학 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